우리는 가난한 부부이다. 아이가 하나인 맞벌이 부부지만 남편의 사업이 잘 되고 있지 않아 맞벌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게다가 남편이 중간중간, 이것만 막으면 잘 될 것 같아, 하는 경제적인 문제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내가 남편에게 지원을 해 주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지원을 해준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것들을 걸고 남의 돈을 빌려 남편에게 줬다. 이번엔 마지막이야, 하는 말을 믿으면서, 정말 이번이 마지막일까? 하는 의심을 가지면서 말이다.
나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다른 가정의 고민거리는 너무나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시댁 어르신들 간섭이 너무 심해 힘들다고 했고 누군가는 남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꼴 보기 싫어 짜증 난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애가 영어학원과 맞지 않아 고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이 키가 너무 자라지 않아 큰일이라고 했다.
내가 듣기엔 어떤 것도 고민이 아니었다. 다들 그 나름대로는 깊은 문제일 수 있겠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팔자 편한 소리들 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앞에서 티 내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아이의 교육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강남에 사는 친구의 딸은 2년째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영어 유치원비에 교재비를 더하면 거의 우리 월급이었다. 친구는, 여섯 살인 자신의 딸이 다른 아이들보다 숫자 개념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수학학원도 몇 달째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덟 살 때 들어갈 국어 학원 대기도 이미 반년 전에 걸어놨다고 했다.
그 친구는, 영유아 사교육판에 자기 같은 사람은 끼지도 못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다섯 살 때 유명한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네 살 때 한글을 다 떼고 영어유치원 입학 면접을 본다고 했다. 영어유치원은 아무래도 영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곳이다 보니 국어와 수학, 운동은 따로 사교육을 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입시 위주로 공부하지 않는 영어학원을 보내기 위해 무슨 시험인가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영어유치원 아이들이 그렇게 또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했다.
굳이 영어유치원을 보내야 하나 싶지만 그 친구가 사는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는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영어유치원 출신이기 때문에 자기 아이만 소외되는 걸 막기 위해 너도 나도 영어유치원에 보낸다고 했다.
자주 들은 내용들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대화를 할 때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라고 말했지만 뒷맛이 씁쓸한 건 변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는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내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유명한 트로트 가수 엄마, 아나운서 아빠를 둔 남매가 미국에 가서 생활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이었다. 4학년으로 추정되는 첫째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영재프로그램에 합격하여 수업을 들으러 미국에 가면서, 아빠와 여동생이 함께 미국에 가 그 아이들의 일상을 담아 보여주는 걸 컨셉으로 하고 있었다.
그 남매는 너무나 영어를 잘했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부모님 없이 촬영팀과만 함께 다니면서 그 아이들은 물건을 사고 관광 기차를 타고 심지어 물건 값 흥정을 했다.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그곳이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긴장감도 크게 없는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은 그곳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귀여웠다. 우리 아이는 한국어로도 못할 참신한 표현들은 그 아이들은 유창한 영어로 해내고 있었다.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그 아이들은 연예인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비가 매우 비싼 무슨 학교인가 유치원인가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남매 중 오빠의 꿈이 미국 항공우주국, 그러니까 나사(NASA)에 들어가는 거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우리 아이 꿈과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도 나사에 들어가서 우주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어 한다. 지금도 아이 책상 책꽂이엔 도서관에서 빌려온 우주 관련 책들이 나란히 꽂혀있다.
하지만, 그 아이와 우리 아이 중 누가 나사에 들어갈 확률이 클까?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답인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우리 아이가, 지방 변두리에서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살고 있는 우리 아이가, 개천에서 나는 용까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 순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균형 있게 해 나가면서 자존감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이의 가능성을 더 키워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이가 배우고 싶다는 것을 다 가르쳐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부모가 되는 건 한없이 큰 죄책감을 함께 떠안게 되는 일인 것 같다.
티브이를 보던 아이가 물었다.
“엄마, 나 돈 없어서 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하는 거 아니야?”
나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너 공부하는 거 싫어하잖아. 근데 공부하고 싶어?”
“지금은 그렇지. 근데 고등학교 가서 하고 싶은 공부 있는데 돈 없어서 못 하면 어떡해?”
“아냐, 절대 그런 일은 없어. 걱정하지 마.”
아이 앞에서 남편에게 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보다. 아이가 이런 불안감을 갖고 있는 줄 몰랐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거친 말들을 하면서
“내가 이런 말도 못 하면 속 터져서 어떻게 살아?”
라고 했었다. 일견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내가 일으키지 않았지만 감당해야 하는 일들을 견디고 있는 중이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말이라도 내뱉어야 좀 살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내 마음 편하자고, 나 좀 살자고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