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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지기 Oct 08. 2024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남편의 어머니는 남편이 대학원 다닐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원래 당뇨가 있으셨지만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었는데, 의료사고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다. 남편은 화를 참지 못해 벽을 손으로 쳤고, 그 여파로 오른쪽 손목이 심하게 손상되어 아직도 손목에 철심을 박고 있다.     


나는 남편의 어머니, 나에게는 시어머니 되실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납골당 사진 속 시어머니는 이목구비가 뚜렷하신 분이었다. 키도 시아버지보다 컸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친정 아빠와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친정 아빠는 아이가 네 살 때, 시아버지는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아빠는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이가 아들인 걸 무척 기뻐하셨다. 엄마가 내리 딸만 셋을 낳았기 때문이다. 칠 남매의 장남인 아빠는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아들을 가지고 싶기도 하셨을 것이다. 한 세대 전이었고, 시골이었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 그리고 공간이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던 장남의 첫째 딸인 나에게     

“저게 고추만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라는 말을 자주 하셨었다. 나는 그 말이 지겨우면서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나도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낯을 많이 가리는, 상냥하지도 예쁘지도 않았던 나는, 내가 남자였으면 여러 제약에서 벗어나 훨씬 더 편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빠는 우리 아이를 예뻐했지만 자주 보지는 못했다. 친정과 내가 사는 곳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는 4시간 넘게 걸렸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대중교통도 없었다. 아이가 친정 아빠와 함께 있었던 횟수를 헤아려 보면 스무 번 남짓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아빠는 내 남편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그리고 우리 아이 이마가 톡 튀어나와서 이마값 한다고 성깔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고생을 좀 할 거라고 했다. 첫 번째 예언은 지금도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고 두 번째 예언은 조금 빗나갔다. 아이는 네 살 때까지는 ‘뭐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싶게 성깔을 많이 부렸는데 다섯 살부터는 점차 순해져 지금은 거의 순둥이가 다 되었다.  

    

아빠는 아이가 네 살 때 가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이의 순한 얼굴을 보지 못하셨다. 그걸 못 보고 돌아가신 게 못내 아쉽다. 우리 아이는 나를 별로 고생시키지 않는다는 걸 아빠가 알고 돌아가셨으면, 가시는 아빠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시아버지는 팔순 잔치까지 하고 돌아가셨다. 시아버지는 우리가 신혼 초에 ‘공자가 시급하다’는 손 편지를 써서 보내실 만큼 친손주를 아니, 친손자를 간절히 바라셨다.  

    

시아버지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으셨다. 큰 시아버님은 사찰 아래 주차장을 하고 하시고 시고모님은 출가하여 비구니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시아버지 댁에는 절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금색 불상이 놓여있었다.     

 

시아버지는 아이 이름을 손수 지어주시겠다면서     


“우리 아들 이름도 내가 지었어. 그래서 잘 살고 있잖아.”     


라고 말씀하셨다.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우리 아들은 남편이었다. 시아버지의 저 말씀을 듣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남편 인생이 너무나 박복하다고, 남편은 진심으로 박복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이 그런 박복한 삶을 사는 데는 시아버님의 탓이 가장 크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잘 살고’ 있다고 여기다니, 당신 아들이 당신 때문에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모르시는구나 싶어 놀랍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시아버지의 작명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손수 이름을 지어주시겠다는 걸 거절하여 괜히 싸우면서 힘 빼고 싶지 않았다. 그러시라고 했다. 며칠 뒤 시아버지는 한자가 가득 쓰인 공책을 보여주시며 이름 세 개를 지었다고 하셨다. 항렬에 맞는 돌림자를 써야 했고 다른 친척들과 이름이 겹치지 않아야 했다. 나는 셋 중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이름을 골라 아이 이름으로 삼았다. 아이는 말봉이에서 벗어나 진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한 번 쓰러지신 뒤 요양병원에 1년 조금 못 되게 있다가 돌아가셨다. 남편, 아이와 함께 요양병원에 가면 아이에게 시아버지를 가리키며    


“할아버지야, 친할아버지. 인사드려.”     


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몇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를 낯설어했다. 시아버지도 우리와 멀리 살아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아이가 태어나고 두 분의 할아버지께서 모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이에게 조부모님은 지금 우리 엄마, 외할머니밖에 안 계신다. 그마저도 멀리 살아 자주 보지 못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근처에 살아 그분들의 보살핌을 자주 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는 엄마 아빠에게서 좀처럼 찾기 힘든 무조건적인 허용, 무조건적인 푸근함 같은 것이 있을 것 같다. 그런 걸 느끼면서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마음의 크기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걸, 내세, 천국 이런 걸 믿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과 같은 순간.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들이 우리 아이의 앞날을 축복해 주실 거야,와 같은 뻔하지만 진실된 소망을 말하고 싶은 순간들에 말이다.     




아이에게 ‘현질’이라는 걸 해줬다. 아이는 마인크래프트가 너무 깔고 싶다고 했는데 그걸 깔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했다. 거금 만 천 원을.      


돈을 지불해가면서까지 게임을 깔아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마인크래프트를 꼭 깔고 싶어 했다. 결국 스티커를 스무 개 모으면 게임을 깔아주기로 했다. 아이는 착한 일, 그러니까 엄마가 스티커를 줄 것 같은 조건부 착한 일을 하며 스티커를 열심히 모았다. 그리고 저번 주말에 드디어 마인크래프트를 태블릿에 깔아줬다.      

아이는 마인크래프트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거기 가상의 공간에 집도 짓고 엘리베이터도 만든다고 했다. 집을 1층으로 지어야 할까 2층으로 지어야할까 고민이라면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그 아이의 게임 세계에 별 관심이 없어 대강 대답해 주었다.      


내가 아이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아이가 게임 세계에서 몇 층 집을 짓든, 엘리베이터를 만들 수 있든 없든, 공동 우물에 개인적인 뭔가를 만들든 말든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이를 괴롭히는 친구들은 없는지, 아이가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는 없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질문들을 하면 귀찮아하면서 대충 대답해 줬다.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우리는 벌써 관심사가 다르다. 우리는 벌써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랑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봐, 그리하여 나에게 자신의 어떤 내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된다.      


내가 어렸을 때 친정엄마, 아빠에게 그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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