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정과 시댁은 너무 멀었고 남편은 육아에 있어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아이가 이만큼 별 탈 없이 자라준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던 것 같다.
아이는 16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녔다. 아이가 그때 꼭 어린이집에 가야 했던 건 아니다. 보통은 3세부터 어린이집에 보낸다는데 그때 아이는 2세밖에 되지 않았었고 내 육아휴직 종료 시기도 몇 달 남아있었다.
그런데, 나도 좀 쉬고 싶었다. 보조양육자가 없는 낯선 공간에서의 독박육아는 나를 좀먹고 있었다. 내면의 화가 쌓이니 아이에게 짜증을 내는 횟수가 늘어났다. 결국 아이를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어린이집에 보낸 이유는 몇 달 동안의 내 휴식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비교적 빨리 적응했다. 자신과 놀아주는 사람만 있으면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와 놀아줄 친구들이 있었고 선생님들이 있었다. 아이는 집에 있는 것보다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낮 시간 동안 혼자 카페에 가서 책을 읽기도 하고 몇 안 되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했다.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던 순간들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크게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대학교 때는 돈을 벌어야 해서 끊임없이 과외를 했다. 그 이후는 직장생활, 또 그 이후는 육아와 집안일......아무 걱정 없이 마냥 쉬어도 되는 것인지, 이렇게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도 되는 것인지 불안했다. 그러면서 그 몇 달의 여유도 마음 놓고 누리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짠하기도 했다.
처음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에는 0세 반이었다. 우리 아이를 포함하여 3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다들 잘 걷고 뛸 수 있지만 옹알이를 하는 ‘아가’들이었다. 아이가 1세 반으로 올라갔을 때에도 어린이집 선생님이 바뀌지 않았다. 마음이 놓였다. 그 선생님은 나보다 훨씬 우리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있는 분 같았다. 내가 아이가 낮잠을 잘 자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선생님께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어린이집에서는 이마랑 머리만 잠깐 만져주면 바로 잠이 들던데요.”
그분은 베테랑이었다. 나보다 우리 아이를 더 많이 알고 계셨다.
내가 복직을 하고 난 후, 우리 아이는 가장 먼저 등원하고 가장 늦게 하원하는 아이가 되었다. 어린이집 교실에서 혼자 놀고 있었을 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안쓰럽다.
아이가 세 살 무렵이었다. 갑자기 일이 생겨 한달쯤을 7시에 퇴근해야하는 일이 생겼다. 어린이집은 5시 반쯤에, 늦어도 6시에는 문을 닫았다. 6시 이후 그 한 시간을 아이가 있을 데가 없었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어떻게 하지?”
하고 말 뿐이었다. 남편은 언제나 육아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그러고도 니가 아빠냐?’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도 딱 그런 순간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어린이집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거절당할 걸 각오하고 한 부탁이었다.
“아이가 한 달쯤 7시까지 있어도 될까요? 제가 일이 생겨서요, 저희 남편도 일찍 못 온다고 하고.”
선생님은 짧게 고민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제가 집에 데리고 가서 좀 봐줄게요. 집이 여기서 가까워서 끝나고 같이 걸어가면 돼요.”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후 한 달 동안 선생님은 우리 아이와 함께 퇴근을 하셨다. 가서 간식도 먹이시고 초등학생인 선생님 딸이랑 놀게도 하셨다,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늦게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돌보던 아이를 집에까지 데려가서 더 돌봐주는 것, 이건 아무나 할 수 있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께서는 그 일을 흔쾌히 해주셨고, 덕분에 우리 아이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자라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아이는 내가 시간이 안 될 때 많은 어른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았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을 같이 다니던 아이 친구의 엄마들이 그 집 아이와 우리 아이를 함께 놀게 하면서 돌봐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서울에서, 친정 바로 옆에 살면서 육아에 친정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친한 친구가
“아이가 인복이 있나 봐. 어쩜 그렇게 매번 필요할 때마다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
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 부모가 시원찮은데 다른 인복이라도 있어야지.”
라며 자조적인 대답을 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직장 선배에게도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늦게 퇴근할 때마다 돌봐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어요. 애가 인복이 있나 봐요, 라고. 그러자 직장 선배이자 육아 선배인 그 분이 말씀하셨다.
“그래, 아이가 인복이 있는 것 같네. 근데 자기가 그때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아, 그래, 맞다. 나는 간절했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허둥대고 있을 때 누군가는 내 사정을 눈치채고 먼저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내 부탁을 듣고 흔쾌히 아이를 자기 집에 있도록 했다. 나는 간절했다.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이 주변의 사람들이, 문제의 해결 방법이 되어주었다. 감사하다. 진심으로.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린이집 선생님, 유치원 선생님을 잘못 만나 고생을 한 경험들이 적지 않다. 두 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닌 우리 아이는 그런 힘든 경험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이의 인복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이가 앞으로도 좋은 어른들을 만나 좋은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아이, 남편과 함께 티브이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고 있었다. 튀르키예에서 정치 개혁을 일으킨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이가 말했다.
“그 사람 아타튀르크 아니야?”
맞았다. 쿠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이 나왔다. 신기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오빠, 저 사람 알아? 난 모르는데”
“나도 모르지.”
라고 대답하고 남편은 아이에게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터키 사람이야?”
너무 웃겼다. ‘터키 사람이야?’라고 묻는 게. 나는 오래 웃었고 남편은
“자기는 이런 걸 좋아하더라.”
라면서도 자신의 성공한 개그에 뿌듯함을 드러냈다.
나는 남편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힘들었고, 지금도 미친 듯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과 같은 순간 때문이다.
남편 때문에 소리내어 웃는 순간, 이 순간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