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사교육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태권도 학원을 다녔고 미술과 한자 방문 수업을 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영어와 피아노 학원을 추가하여 하루에 아이가 가야 하는 학원이 세 개가 되었었다. 학교 끝나고 태권도, 피아노, 영어 학원을 갔다 집에 오고, 월요일은 미술 방문 수업, 화요일은 한자 학습지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미술 방문 수업은 3학년 올라오면서 끊은 상태다.
아이가 학원을 하루에 세 개씩이나 다닌 가장 큰 이유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대부분 한밤중이 되어서야 퇴근을 했기 때문에 내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아이가 할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블록처럼 학원을 끼워 맞춰 내 퇴근 이후에 아이가 집에 오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아이가 학원을 많이 다니고 집에 온 이후에 방문 수업까지 받은 이유는, 아이가 그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특이하게 학원을 가는 것도, 선생님이 집에 오시는 것도 다 좋아했다.
아이가 1학년 때부터 자주 했던 질문 중 하나는
“엄마, 왜 학원은 끊을 수 있는데 학교는 끊을 수 없어?”
였다. 학교는 의무교육이라서 모든 어린이들이 가야 하는 곳이라고 몇 번을 설명했는데 아이는 잘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매일 재미없는 학교에 가서 재미없는 수업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아이를 가르치신 모든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다.
“너무 열심히 해요. 다른 애들처럼 요령 피우는 것도 모르고 정말 모범적인 학생이에요.”
아이에 대한 이런 평가를 들으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뭔가 찝찝한 구석이 남는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시지만 잘한다고는 별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는 것은 과정, 잘하는 것은 결과이고 많은 것들은 결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아이가 시험을 잘 보느냐 못 보느냐 하는 것,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느냐 떨어지느냐 하는 것, 희망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모두 결과로 결정되는 것들이다. 열심히 하는 것은 보통은 칭찬을 받지만, 남들보다 열심히 했는데 남들보다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연민, 또는 연민을 가장한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게 두려워서 나는 일부러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도, 최선을 다했으면서도 그러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적도 많았다. 목표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그 이유를 내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노력의 부족으로 돌리면 좀 덜 좌절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도 나를, 머리는 있는데 노력을 안 해서 실패한 아이로 봐주면 좀 덜 부끄러울 것 같아서였다.
도대체 나의 이런 비겁함과 두려움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 붓글씨 써오기 여름 방학 숙제가 있었다. 화선지 100장 분량의 붓글씨를 써오라고 하셨던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붓글씨를 써본 적이 없었지만 방학 숙제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벼루와 먹, 붓글씨 붓, 화선지를 사 와서 마루에 앉아 붓글씨를 썼다. 어렸을 때 붓글씨를 조금 배우셨다는 아빠가 옆에서 조금 도와주셨다.
나는 여름 내내 마루에 앉아 붓글씨를 써서 개학하는 날 가져갔다. 이상하게 그 숙제를 다 해온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 매일 학교에 남아 붓글씨 연습을 해야 했고, 여러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5학년 후배와 함께 군부대에서 하는 대회에 나갔었고 그 후배가 은상, 내가 장려상인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장려상을 받은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 후배가 나보다 더 높은 상을 받았다는 건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붓글씨를 쓰지 않았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일이, 내가 어떤 것에도 미친 듯이 달려들 수 없도록 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열심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너무 어려서 그걸 몰랐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크게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아이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었으면 하는 게, 엄마로서의 바람이다. 아이가 어린 나이에 ‘나는 해도 안 돼’라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스스로 미리 한계를 설정하고 좌절감이나 비웃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이의 실패에 의연할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가져본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나 먼저 호들갑을 떨며 실망감을 내비쳐 아이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그래서 아이가 다시 시작하고 다시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다.
이번 주말은 나눗셈과의 싸움이었다. 아이는 나눗셈을 잘하지 못했고, 나는 나눗셈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설명해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답답해 나는 몇 번 큰 소리를 냈고 아이는 몇 번 울먹였다.
아이는 학교에서 하는 모든 수업 중에 수학만 재미있다고 했다. 다른 과목은 다 책에서 읽은 거라 아는 내용인데 수학은 처음 보는 내용이라서 흥미가 생긴다고. 그래서 마음을 놓았었다. 좋아하니까 잘할 줄 알았다.
미리부터 수학 예습을 시켰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나 싶어 후회가 된다. 이제부터라도 집에서 간단한 연산 문제라도 풀어야 할 것 같아 문제집을 주문해 놓은 상태이다. 문제집을 풀면서 서로 또 얼마나 많은 실랑이가 있을지 생각만 해도 걱정이 된다.
수학 공부를 시켜야지, 다짐하다가 어제 아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린다.
"엄마가 자꾸 나 수학 못한다고 해서 수학에 흥미가 떨어졌어."
나의 다그침 때문에 유일하게 재미있어하던 수학 수업을 어렵다고만 여기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아이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엄마는 나보다 수학이 더 중요해?"
아니, 그렇지 않아. 절대.
주말 동안 나눗셈과의 싸움에서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