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서울 사는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나눗셈을 제대로 못한다고, 이를 어쩌면 좋냐고 우스갯소리 같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내 말을 조용히 듣던 친구는,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여섯 살 자기 딸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우리 애가 되게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같은 영어유치원 다니는 우리 애 친구들을 보면 다 한글을 알고 있는데 우리 애만 모르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알고 들어갔는데 왜 우리 애만 유난히 못하나 싶어 너무 답답하고 속상했었어. 근데 있잖아, 생각해 보니까 우리 아이는 한글을 배운 적이 없더라. 우리는 학교 들어가기 전에 유치원에서 한글을 배웠었고, 물어보니까 우리 애 친구들도 영어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한글 학습지를 하든지 부모가 가르치든지 했더라고. 물론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된 몇몇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였어. 그러니까 우리 애는 영어만 하는 유치원에 다녀서 한글을 배운 적도 없는데, 나는 가르쳐주지 않고 우리 애가 못한다고 속상해했던 거였어.”
내가, 우리 애는 학교에서 나눗셈을 배운다고 했더니 그 정도는 누구나 배운다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 가지고 다 잘한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누가 있겠냐고, 아이가 더 잘하길 바란다면 더 많은 걸 가르치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 가르쳐주지 않고 잘하길 바라고 있었구나.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 아이가, 조금 배우고도 좋은 성적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는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가르쳐주지 않고 잘하길 바랐던 건 공부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이 가지고 논 장난감은 야무지게 챙겨서 제자리에 정리해 두거나 밥을 먹은 후 자기가 먹었던 그릇과 숟가락 등을 싱크대볼에 자연스럽게 가져다 넣는 아이의 친구 모습을 볼 때 ‘어쩜 저렇게 모범적인 아이가 있을까’ 감탄을 하면서도 우리 아이에게는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느 날,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아이를 혼낸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는 울먹이며
“엄마가 안 가르쳐줬잖아. 어떻게 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라고 말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방으로 획 들어가 버리는 행동에 조금 더 화가 났었지만 내가 그걸 가르쳐줬는지 안 가르쳐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쳐주지 않고 아이가 저절로 해내길 기대하는 것 같다. 그것들을 왜 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니까 여러 일상과 공부의 당위성과 방법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우리 아들이니까 알아서 잘하겠거니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연히게도 세상에 태어난 지 9년밖에 안 된 아이는 배운 것보다 배워야 할 것이 훨씬 더 많다.
아기였을 때 뒤집기나 걸음마를 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 혼자서 온 힘과 에너지를 기울여 해내야 과정이었겠지만 ‘엄마, 아빠’라고 말을 하는 것, 밖에 나갔다가 오면 손을 씻는 것,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하는 것, 글자를 읽는 것 같은 일등은 어른이 옆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
아이 옆에, 아이가 배워야 하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섬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돈된 일상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나 하나도 버거운 엄마 말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뭐, 어쩔 수 없다 싶다. 우리 아이도 이런 덤벙거리고 허덕거리는 엄마에게 적응해 살아야 하고, 나도 아이를 위해 이런 성격을 계속 고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밖에.
나 하나도 버거운데 엄마가 되었다. 많이 부족한 엄마라서 끊임없이 후회하고 끊임없이 자책하며 또, 끊임없이 배우려고 한다. 이 글들이 내가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데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