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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1주년과 된장찌개

by 휴지기

12월 말, 11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이깟 결혼을 무슨 기념까지 하나 싶었지만, 작년 결혼 10주년도 큰 이벤트 없이 그냥 지나가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작년 결혼기념일에, 그러니까 결혼한 지 딱 10년이 되던 날에 남편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밤 10시가 넘어 들어왔다. 나는 서운하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으며 아들과 함께 케이크에 꽂힌 초의 불을 껐고, 남편은 내년에는 꼭 좋은 선물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남편이 약속한 내년이 되었지만 남편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 남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목걸이를 하나 사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었다. 나는, 어떤 걸 살까 미리 고민까지 해놓은 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목걸이는커녕 작년처럼 케이크를 사 올 돈도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 가난했지만 최근 가장, 믿을 수 없게 더 가난해졌다.


나는 올해 결혼기념일에도 역시 아들과 단 둘이 밥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집정리를 한 후, 침대에 모로 누워 책을 읽었다. 빨리 잠들기 위해서였다. 빨리 결혼기념일을 벗어나 다음날이 되었으면 싶어서.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책을 읽으면 그렇게 잠이 잘 온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잠이 들락 말락 할 때쯤 남편이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못 들은 척하고 그냥 누워있었다. 꼴 보기 싫었다. 결혼기념일에도 혼자 있게 하는 남편, 죽도록 일하지만 성과가 없는 남편, 잦은 한숨으로 나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하는 남편이 꼴 보기 싫었다.


잠을 청하면서도 여지없이 이혼을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주방으로 나가 불을 켰다. 남편은 거실에서 자고 있다가 내가 나오는 소리에 잠이 깬 것 같았다. 남편이 말했다.


"된장찌개 끓여놨어. 먹고 가."


가스레인지 위에 남편이 끓여놓은 된장찌개가 보였다.


결혼 11주년에, 남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 된장찌개라는 게, 마흔을 훌쩍 넘은 남편이 이렇게 찌질하고 초라하다는 게, 너무 불쌍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억지로 눈물을 다시 삼키고 아들을 깨워 된장찌개에 아침을 먹였다.


아들은 된장찌개가 맵다고 잘 먹지 못했다. 나는 오히려 매콤해서 더 맛있게 잘 먹었다. 덕분에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이 글들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죽이고 싶고 불쌍한 남편에 관한 이야기. 결혼기념일에 나를 세상 초라하고 처량하게 만들어놓고 밤늦게 끓여놓은 된장찌개로 사람 마음을 잠시 녹이는, 이상한 사기꾼 같은 남편의 이야기.


남편에 대한 원망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하지만 언제나 연민보다 원망이 더 커서 이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한 과거의 자신을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은 이 시대의 와이프들에게 이 글들이 소소한 공감과 웃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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