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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by 휴지기

내가 남편을 만난 건 서른한 살 초겨울쯤이었다.


강남역 지하철 역에서 밖으로 나온 시간이 6시, 소개팅 약속 시간이 6시였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처음부터 늦으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약속 장소까지 빠르게 걸었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 때문에 발이 불편했던 것 같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6시 10분쯤이었다. 소개팅남이 보이지 않았다.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니 아직 도착 전이란다. 천천히 오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약간, 어이가 없었다.


소개팅을 그리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소개팅에 남자가 늦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소개팅남을 만나기 전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10분쯤 지나니 소개팅남이 도착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20분이나 늦게 소개팅 장소에 도착한 셈이다. 남자는 오자마자 일이 바빠 어쩌고저쩌고 변명을 해댔다.


그때 알아차려야 했다. 이 남자는 소개팅마저도 늦는, 약속에 취약한 남자라는 것을.


소개팅남은 나를 데리고 식당(파스타집이었던 것 같다) 흡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처음에 그곳에 흡연실인지 어딘지로 몰랐는데 밥 먹는 중간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담배냄새를 맡고 이곳이 흡연실이구나, 알게 되었다. 나중에 남편에게 왜 소개팅 할 때 흡연실로 데리고 갔냐고 물으니 자신은 그곳이 흡연실인지 몰랐다고 했다. 남편은 담배를 피워서 담배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 남편은 21세기에 보기 드문 애연가이자 애주가였던 것이다. 가끔, 남편이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에 성인남성으로 살았다면 산업의 역군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담배 잘 피우고 술 잘 마시고 노래 잘 부르고 분위기 잘 맞추니, 심지어 가족보다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애사심마저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났다면 훨씬 더 인정받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헛된 예상을 해본다.


소개팅 날, 남편과는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남편은, 내가 크게 재미있어하지 않는 이야기를 혼자 잘도 떠들어댔다. 남편은 내 눈을 마주쳤다가 피했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남편이 소개팅에 늦었고 담배 냄새 올라오는 곳에서 저녁을 먹이고 지루한 이야기들을 해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싫지는 않았다. 그때 남편은, 잘생겼었다.


남편은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늦었다. 6시에 약속이었고 7시 영화를 예매해놓고 있었는데 남편이 6시 50분쯤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강남역 6번 출구 앞에서 남편을 50분 동안 기다리며, 이건 아니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 한다는 마음을 수십 번도 더 먹었던 것 같다. 그때 집에 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이유는, '지금 집에 가면 오늘 하루 망칠 것 같다. 조금만 더, 십 분만 더 기다려보자'는 마음 때문이었다.


남편이 헐레벌떡 약속장소로 도착하고 우리는 함께 또 헐레벌떡 뛰어 간당간당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하루가 재미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때는 잘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다.


이 남자는, 결국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 남편을 아주 오래, 자주 기다렸다. 남편은 12시에 온다고 하고 1시에 왔고 점심때 온다고 하고 저녁때 왔다. 나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자주 외로웠고 불안했고 원망했고 분노했다. 어떤 날, 새벽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날에는, '죽었지, 어딘가에서 차에 치어 죽었지, 죽지 않고서는 전화도 안 받고 이렇게 늦을 리 없지.'라고 온갖 불안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적도 있었다.



원래는 2025년 새해가 되어도 남편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지체 없이 이혼하려고 했다.


새해가 되어도 남편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내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도 지키지 못했다.



대신 남편은, 밥을 해줬다.


김치찜을 하고 닭볶음탕을 하고 간장게장을 만들고 계란찜을 해서, 밥을 차려주었다.


그래서 결국....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다.


남편이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종종 남편 덕분에 웃으면서, 결국은 약속이 지켜지기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믿는 중이다.


결국은 남편이, 한참 늦은 다음에라도 약속을 지킬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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