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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휘발되고 현실은 끈질기다

by 휴지기

결혼 전 경기도에서 근무할 때였다. 같은 사무실을 열 명 정도가 함께 썼는데 내 옆자리에 계신 분은 50대 초반의 여자분이셨다.


그분은 언제나 풀메이크업을 하셨고 화려한 옷을 주로 입으셨다. 말투도 조금 차갑고 도도해 여왕 같은 이미지를 풍겼고, 사무실에서 나이도 제일 많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약간의 예우를 갖춰 그분을 대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분이 유일하게 여왕 같은 풍모를 잃으시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어느 날은 남편분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길래


"사랑한다는 사람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둬?"


하고 화를 내셨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결혼 전이라 결혼의 실상에 대해 뭣도 몰랐던 나는 사랑한다는 고백에 화를 내는 그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셨는데 화를 내셨다고요? 남편분 엄청 로맨티시스트이신 거 같은데.... 남편분이 좀 불쌍하신 것 같아요."


그랬더니 그분은 자신이 결혼 후 겪은 고난에 대해 나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하셨다.


당신이 결혼직후 남편과 주말 부부를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신의 집안과 미모, 실력에 비해 부족한 남편을 만나 얼마나 후회하며 살고 있는지, 네이버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유명하고 유능한 남편을 둔 여동생과 비교가 되어서 얼마나 억울하고 가슴이 아픈지 말이다.


나는 정말 그분의 억울함과 원망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분의 남편은 그때도 어느 공기업의 임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십여 년 전에 함께 일했던 그분이, 충분히 먹고살만하던 그분이 남편에게 가졌던 원망, 분노 이런 것들이 조금은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그분은 그 나름대로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남편을 원망하는 순간 남편에게 받는 사랑 고백이 얼마나 헛되게 느껴지는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고려시대 대중들이 즐겨 불렀던 고려가요 중에 '만전춘별사'라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얼음 위에 대나무 잎으로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 망정

얼음 위에 대나무 잎으로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 망정

정둔 오늘 밤 더디 새어라, 더디 새어라


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결혼 전에는 이 작품을 보고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랑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얼음 위에 놓인 대나무 이파리 위해서도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위에서 둘이 함께 얼어 죽더라도 그 또한 미칠 듯이 로맨틱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랑은 감정이고 결혼은 현실이었다. 감정은 존재하다가도 어느 순간 휘발되어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현실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감정은 순간이지만 현실은 끈질겼다.


사랑한다는 말, 그 한 단어 때문에 버텨야 하는 현실이 위태롭다. 그래서 종종 나는 십여 년 전 그분이 떠오른다. 사랑고백을 받고 화를 냈던 그분이 말이다.


어제도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온 남편이 말했다.


"자기야 나 속이 너무 안 좋아. 시원한 국물 먹고 싶어."

"뭐? 새벽 한 시야."

"나 라면 끓여 먹을 테니까 옆에 앉아만 있어 주면 안 돼?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위로 좀 해줘."

"아우~ 미친놈."


하면서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 김칫국을 끓여줬다. 새벽 한 시에.


남편은 김칫국 세 사발을 들이키며 맛있다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기야, 사랑해."

"꺼져."

"나는 자기가 이렇게 욕하면서 할 거 다 해주는 게 너무 좋아."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고 했는데. 내가 호구라서 남편이 더 진상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약간은 로맨티시스트인 것 같다. 남편의 사랑고백이 얼마나 헛된 말인지 알지만, 가끔은 그게 아주 큰 함정일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항상 내 발등 내가 찍었다고 자책하고 또 자책하지만....


가끔은 욕을 먹어도 속 없이 웃는 늙은 남편이, 귀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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