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해서 11년째 살고 있는 이곳은 경상도, 다른 지역보다 조금 보수적인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업주부가 많고 가깝게 지내는 아이 친구 엄마들 중에도 직장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중 유독 자주 만났었던 아이 친구 엄마가 있는데, 그 사람은 정말 '꽃같이' 사는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 직전, 의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션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 고애신에게 그 할아버지가 당부했던 말, '지아비 그늘 아래서 꽃같이 살아라', 그 사람은 정말 딱,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는 월급 따박따박 받아오는 부지런하고 건강한 남편이 있었고, 뭐든 더해주지 못해 안달인 시부모님들이 있었으며, 착하고 잘생긴 아들들까지 있었다.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이 살고 있는 그 사람이 나는 언제나 부러웠고, 내가 느끼는 부러움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중 가장 부러운 건 역시 그 사람의 남편, 월급을 따박따박 받아오는, 부지런한, 건강한. 그 어느 것도 우리 남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미덕을 가진 남자를 남편으로 둔 것이었다.
결혼하고 가장 억울한 것 중 하나가 '우리는 맞벌이인데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하는 걸까?'였다.
남편이 사업을 했는데 망하기 직전까지 갔고, 그걸 어떻게든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여기저기서 빚을 졌다. 남편은 금방 일이 해결될 것처럼 말했지만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빚에는 이자가 있다. 나는 월급을 받아서 생활을 하고 아이 학원을 보내고 빚을 갚아야 해서 언제나 돈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나는 항상, 가난하다.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비싼 옷과 가방을 살 수 있는, 바쁘게 여기저기 놀러 다닐 수 있는 그 사람을 보면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 나는 직장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을 해도 제대로 된 내 것 하나 살 여유가 없는데,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복이 많을까.... 다복한 사람 옆에 있으니 나의 박복함이 더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도 없다.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예전에 너무 가부장적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자꾸만 떠오르면서 공감이 되곤 한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다.
이 속담도 그런 말들 중 하나이다. 뒤웅박은 박의 윗부분만 도려내 마치 요강처럼 만든 물건인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은 여자가 어떤 남자를 만나 결혼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뜻을 지닌 속담이다.
뒤웅박. 입구가 좁아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 저런 의미가 되었다고도 하고 부잣집에서는 뒤웅박에 쌀을 담아두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아둬 여자가 어느 집으로 시집 가느냐에 따라 뒤웅박처럼 다르게 살게 되어 저런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나는 전자의 뜻풀이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뒤웅박. 결혼에 빠져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내 모습을 연상시키는 뜻풀이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이혼을 생각한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너무 내 인생을 다 바쳤다. 한 번은, 사랑을 위해 혹은 가정을 위해 한번은 온몸을 던져보자는 생각으로 모험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모험 끝엔 언제나 해피엔딩이던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온몸을 던졌더니 결국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라도 여기서 멈춰야 할지, 피떡이 될지언정 기왕 믿은 거 더 오래 걸리더라도 또 여전히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주 이 결혼의 종말에 대해 고민 중, 그리하여 전에 쓴 글처럼 언제나 이혼 전야이다.
게다가 오늘처럼 꽃같이 사는 사람을 만나고 온 날에는, 내가 피투성이라는 걸 더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다.
꽃같이 사는 사람 옆에서 피투성이로 살아내는 건, 몸도 마음도 너무 고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