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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하고 어설픈 프러포즈

by 휴지기

결혼 한 달 전 주말이었다. 엄마와 아빠 생신이 있던 날 즈음이라 나는 경기도에서 본가인 충청도에 내려가 있었다. 둘째 동생 내외와 조카, 그때는 결혼하지 않았었던 막내 동생도 다 함께 본가 집에 와 있었다. 예비 사위였던 남편도 경상도에서 우리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나 남편은, 그때도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여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었다. 남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겠다고 작은 방에 들어가 십 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늦게 와 놓고 옷도 세월아 네월아 갈아입는 남편에게 나는 화가 약간 났다.


남편이 있는 방 문을 노크하며 왜 안 나오냐고 물었다. 그때 막냇동생이 자기가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나는 '형부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방에 왜 얘가 들어가지?' 싶었다. 뭔가 이상했다. 원래 눈치가 없는 나는 그제야 뭔가 꿍꿍이가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동생이 방에 들어가고 몇 분후, 남편이 케이크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이런, 프러포즈였다. 방 안에 들어갔더니 풍선 몇 개는 천장에 붙어있었다른 몇 개는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초록색 뉴발란스 운동화 두 켤레와 편지인가 메모인가가 놓여있었다. 나는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겼다.


프러포즈라니, 친정집에서 우리 엄마, 아빠, 둘째 동생, 제부, 조카, 막냇동생 다 보는 데서 이런 허술한 프러포즈를 하다니, 너무나 남편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프러포즈 선물이 반지나 목걸이, 하다못해 가방이나 지갑도 아니라 운동화, 그것도 초록색 운동화라니, 어설프고 웃기며 황당했다. 알고 보니 이 프러포즈도 막냇동생이 기획하고 제안한 것이었다. 막냇동생의 이런 추진력이 없었다면 나는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짧은 프러포즈가 끝나고 우리는 풍선을 터뜨려 정리했다. 케이크는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조금 먹다가 버렸던 것 같다. 그래도 그때는 잠시 행복했다. 그리고 남편의 그런 어설픈 모습을 조금은 귀엽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프러포즈 끝나고 저녁을 먹고 반주를 하면서 우리 가족 모두는 어쨌든, 많이 웃었다.



"니 신랑은 웃는 게 좀 우는 것처럼 보이드라."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 아빠가 남편을 처음 보시고 한 말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남편 얼굴을 보니 진짜 그랬다. 무표정일 때는 몰랐는데 웃을 때는 약간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빠의 저 말씀이 마치 우리 결혼 생활을 예언한 것 같았다.


나는, 결혼생활이 힘들다. 그냥 감정적으로 남편과 안 맞아서 힘든 게 아니라, 누가 봐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자주 위태롭고, 그래서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이 언제나 마음속 저 깊은 곳에 깔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버텨내야 하니까 남편이 프러포즈 선물로 운동화를 준 것이 무슨 암시라도 된 것 마냥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다.


그리고 또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버텨내야 하니까, 내 비극을 일종을 에피소드로 격하시켜 웃으려고도 한다. 박미선이 남편 이봉원의 사업 실패 이야기를 자기 에피소드로 활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빠가 했던 말, 웃는 게 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딱 들어맞게 될 줄이야, 역시 어른들의 선구안은 탁월하고 놀랍다.


아빠의 말처럼 내 삶은, 가끔은 웃는데도 우는 것 같고 또 가끔은 우는데도 웃는 것 같다.


진정한 해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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