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책을 특별히 더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원체 가진 에너지가 적고 귀찮은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다른 놀이를 해주는 것보다 책 읽어주는 게 더 편해 그쪽으로 아이를 계속 유도했을 뿐이다.
자동차 놀이나 역할 놀이를 할 때에는 계속 움직여야 했고 그 상황에 맞는 대사를 쳐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창의적인 생각을 해내야 한다. 그런데 책을 읽어줄 때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에 쓰인 글자만 읽어주면 되었다. 나 같은 귀차니스트 엄마에게는 나름 꿀 놀이였던 셈이다.
아이가 세 살 때쯤 뽀로로 국기카드를 사줬다. 왜 그걸 사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뽀로로가 유명하고, 장난감을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까 뽀로로 국기카드가 보여서 샀던 것 같다. 아이는 국기카드를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다. 워낙 세계사나 세계문화 같은 것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아이와 함께 국기카드를 가지고 놀면서 몰랐던 각 나라의 국기 문양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울 정도로 다시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아이가 국기 카드를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걸 본 후, 다른 국기 카드를 하나 더 샀다. 네 살 때였던 것 같다. 뽀로로 국기 카드는 한 면에 국기와 나라명이 함께 나와있는 거였는데 두 번째 산 국기 카드는 앞면에는 국기, 뒷면에는 나라이름이 나와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일부러 그렇게 된 걸 산 건 아니었다. 국기카드 중에 유명할 걸 찾다 보니 그걸 사게 된 것이었다.
아이와 나는 두 번째로 산 국기카드를 아주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특히 많이 한 놀이가 국기를 보고 나라이름 맞히기 게임이었다. 게임은 항상 내가 졌다. 네 살의 파릇파릇한 뇌를 마흔 살이 다 된 나의 늙어가는 뇌가 따라갈 수 없었다.
아이는 국기카드를 가지고 놀면서 이 세상에 아주 많은 나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아이에게 지구본을 사주었다. 아이의 인식이 계속 넓어져,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 세상에는 아주 많은 나라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이는 지구본은 잘 가지고 놀지 않았다. 가끔 잘 때 무드등으로 활용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부모의 마음대로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섯 살 때 아이는 한글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한글을 떼게 됐는지 정확하게는 대답할 수 없지만, 국기카드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아이는 국기 모양을 외우는 것처럼 나라 이름 모양도 함께 외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라를 나타내는 한글 모양을 외우다 보니 저절로 한글을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가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국기의 유래에 관한 책 두 권과 세계 문화 관련 만화책들을 사주었다. 국기의 유래에 관한 책들은 아이가 서점에 가서 직접 고른 것이고, 세계 문화 관련 만화책은 아이가 도서관에서 재미있게 읽는 걸 보고 주문해 준 것이다. 만화책은 몇 십 권이 한 세트라서 새것으로는 살 수 없어 알라딘이나 개똥이네에서 중고 세트를 주문했다.
아이는 아직도 국기와 관련된 책들, 세계 탐험이나 세계 문화와 관련된 만화책을 많이 읽는다. 지금은, 세계의 대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자꾸만 외국으로 대학을 가고 싶어 한다. 인식을 세계로 넓히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미국이나 영국으로 대학을 가는 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계속 외국에서의 구체적인 미래를 이야기해 가끔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를 알아내고 그 분야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면 아이가 책을 멈추지 않고 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아이는 다른 남자애들과 같지 않게 공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공룡이나 자연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지 않았다. 하지만 위에 나온 세계문화 관련된 책들, 자동차나 기차 관련된 책들은 아주 많이 읽어 너덜너덜해졌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창작동화나 어린이 소설보다는 지식을 알려주는 백과사전류의 책을 더 즐겨 읽는다. 이런 것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충분히 내용이 더 깊이 있게 들어가는 책들을 준비해 줄 수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 말고도 아이가 좋아하는 작가, 아이가 좋아하는 출판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좋다. 우리 아이는 보물찾기 시리즈를 쓴 강작가를 좋아해 강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고, 다산어린이 출판사를 좋아해 거기서 나온 책들은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사고 싶은 책이 없을 때 다산어린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주로 살펴보는 편이다.
이렇게 아이의 책 읽기 성향을 파악하고 아이가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게 계속 책을 제공해 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책 읽기를 지속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스무 권쯤 빌려왔는데 그중에 다섯 권만 읽고 그냥 반납해야 할 수도 있고. 아이가 좋아할 것 같아 큰맘 먹고 책 한 세트를 들였는데 한 권도 안 읽고 방치할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이에게 독서 환경을 충분히 마련해 주는 게 아이가 책 읽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