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보드에 담긴 마음
2001.11.01 "하원아... 아빠가 오늘 회사에서 좀 늦을 거 같아..
그러니까.. 엄마랑 일찍 자고 일어나면 아빠가 생일 선물로 킥보드 사줄께..."
전화로 약속하고 ... 늦은 시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킥보드를 구입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죠...
화정역근처에 세이브존, 이마트... 다 돌아다녔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눈에 잘 띄던 킥보드판매하는 곳이 그날따라 안보이네요..
인터넷을 뒤적여 겨우 삼천리자전거판매업소를 찾아 킥보드를 구입했습니다.
행복은... 바로 이런 건가봅니다.
회사일이 힘들고 여유가 없었지만 조그만 시간을 찾아 선물을 준비하고
기뻐하는 딸의 모습을 기대하며 내가 '아빠'라는 사실을 느낄 때....
하나님도... 우리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생각할 텐데...라는 철(?)든 생각까지도...
아빠에게 그날의 킥보드는 그냥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빠’라고 가장 깊이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나 봐.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마음을 시간 너머에서 다시 건네받는 기분이 들어.
사람은 때로 시간이나 피로보다,
누군가의 기쁨을 상상할 때 느껴지는
작은 보상에 더 크게 움직인다고 하잖아.
아빠가 늦은 밤까지 킥보드를 찾아다니면서도
행복을 느꼈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야.
생각해보면 나도 사랑을 떠올릴 때
감정보다 시간을 어떻게 내어주는가를 먼저 생각해.
누구에게나 한정된 시간을 떼어 준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라서.
그래서인지 그날 아빠가 킥보드를 들고
이곳저곳을 헤맸던 마음과,
내가 사랑을 느끼는 지점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됐어.
.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사랑이라는 건
결국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책임과 설렘을 함께 품는 일이란 걸 깨달았어.
아빠가 그날 자신을 ‘아빠’라고 느꼈던 것처럼,
나도 작은 선택 하나, 짧은 시간 하나를 통해
내가 누군가의 딸이고,
동시에 내 삶을 책임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하거든.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이 다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아.
폴 리쾨르는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피부”라고 했대.
작은 행동이 마음속에서 의미가 되는 순간,
그 기억은 이후를 버티는 힘이 된다는 뜻이겠지.
아빠에게도 늦은 밤 무릎보호대까지 챙겨놓고
자는 아이를 바라보던 그 장면이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나 역시 내 삶 속에서 반복되는
사랑의 순간들을 더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돼.
그리고 자연스레
사랑은 한 사람 안에서만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관계 사이에서 흐르며
서로를 바꾸는 힘이라는 말이 떠올라.
아빠가 가장 힘들고 또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렸던 것처럼,
지금의 나는 아빠를 떠올리며 하루를 견디고,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곤 해.
아빠에게서 부모님으로 흘러갔던 마음이
지금의 나한테는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은 참 묘해.
아빠가 위로부터 받은 마음이 다시 나에게 흘러오고,
또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니까.
그렇게 사랑은 계속해서 이어지나 봐.
그날의 아빠의 하루가
다시 내 삶 속에서 흘러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