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사랑이었던 순간

그날, 꽃에 물을 주던 아이

by 개미는룰룰
2001.06.06 "하원이가 보고 싶습니다.
혼자 방에 앉아 하원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며 옷가지를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하원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꽃에 물 안 줬지? 물 안 주면 꽃 죽으니까 아침에 꼭 물 줘~ 알았지?'
오늘도 저는 출근하기 전에 하원이가 명령(?)한 철쭉꽃에 물을 주며, 사랑하는 하원이의 향내를 맡아 봅니다. 쿠쿠...“


아빠는 그날 내 전화를 받고 웃었을까.

아니면, 조금 울컥했을까.


“아빠, 꽃에 물 안 줬지?

물 안 주면 꽃 죽으니까 아침에 꼭 줘~ 알았지?”


그 말 한마디에 아빠는 매일 아침 철쭉에 물을 주며 나를 떠올렸겠지.


처음엔 그냥 아빠한테도 이런 귀여운 면이 있었구나 싶어서 웃으며 넘겼어. 아빠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적어 놓은 말이 사실은 잘 와닿지 않았거든.

고작 며칠 떨어져 있는 시간일 뿐인데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웠다는 게 말이야.


얼마 전, 우리 집에 매일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던 모찌를 하루 다른 곳에 맡겨두고 돌아온 날이 있었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익숙한 그 ‘반겨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집이 너무 낯설고 조용해서 괜히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졌어.

고작 하루였는데도 너무 허전하고 슬픈 거야.


그제서야 아빠의 마음이 다시 읽혔어.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웠다는 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아빠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겠구나.

말보다 행동으로, 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을 물 주듯 조용히 돌보면서 말이야.


생각해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 구조 자체가 그리움의 구조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

심리학에서도 깊이 사랑한 대상은 부재할 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사랑은 ‘함께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더 잘 드러나는 감정이라는 거지.

다소 역설적이지만, 어떤 감정은 부재를 통해서만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


그리고 사람은 그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돌보는 행위’를 찾는 것 같아.

정리하고, 남겨진 자리에 손을 얹고, 작은 습관을 유지하고, 사라진 온도를 다시 맞춰보려고 애쓰는 일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희미해지지만,

감정이 남긴 흔적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잖아.

결국 사랑은 감정의 강도보다는,

시간이 남긴 흔적의 농도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감정인지도 모르겠어.


아빠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살고 있었던 거야.

그리움이 돌봄으로 바뀌고,

그 돌봄이 다시 아빠 마음 안에서 오래된 기억으로 쌓이도록.


나는 그런 아빠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씩 따라 해 보는 중이야.

문득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땐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를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그 사람을 떠올리며 같이 걷던 길을 다시 걸어보기도 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남긴 자취를 가만히 더듬어보는 그런 마음.

아빠가 매일 아침마다 철쭉에 물을 주며

나를 떠올렸던 것처럼.


어쩌면 사랑은 대상을 소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대상이 사라졌을 때도 여전히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감정인지도 몰라.


부재를 견디는 방식,

그 공백을 돌보는 방식,

그리고 시간을 통과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것.


아마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핵심일지도 모르겠어.




모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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