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며 배우는 사랑

그리움의 바깥에서

by 개미는룰룰
2006.08.15 하원이하고 성원이는 참 많이 다릅니다. 성격도 행동도.

튜뷰타고 신나게 돌아다니며 수영하는 하원이,
앞에는 물이 하얀데 먼 바다는 물이 파랗다고 상어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원이.

잠잘때 선풍기 틀어주는 아빠의 모습에 행복해 하는 하원이,
잘때 선풍기 틀면 위험하니까 아빠가 선풍기 끄는 거 보고 눈감겠다는 성원이.

수없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구겨신는 하원이,
아빠한테 신발을 구겨신지 말하고 당부하는 성원이.

아파트 단지내를 천박지축 뛰어다니는 하원이,
차오는게 위험하니까 인도위로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하는 성원이.

암기력이 뛰어나서 요절암송도 바로 외워서 달란트 타오는 하원이,
일주일 내내 요절암송을 해도 자신이 없는 성원이, 그래도 수학박사 성원이.

집안의 모든 전등과 모든 장농문을 열어 놓고 놀러 나가는 하원이,
집안의 모든 전등을 끄고 장농문을 닫아 놓고 놀러 나가는 성원이.

아빠가 동화책 읽어줄 때 하원이는 아빠의 엄청난 제스춰와 다이나믹한 동화구연에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네요...
성원이에게도 똑같이 읽어줬습니다....재미있게...
성원이 왈.............
"아빠! 좀 가만히 읽으세요..그렇게 하지 말고 조용히 좀 읽어요!!!"
^ & $ * & # $

아무튼, 애들 보면 웃껴요....^^ 행복 덩어리들.


아빠는 오래도록 아이였던 나를 그리워했어.

아마 지금도 종종 그리워 하는 것 같아.

그래서 가끔 그런 말을 하잖아

“하원이가 결혼해서 자기와 꼭 닮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와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고.


나는 그 말이 어릴 땐 참 싫었거든.

그리움이 커질수록 지금의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어.

내가 그때의 사랑스러운 딸이 아니어서.

아빠가 사랑하던 사람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 같아서.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아빠 안에서 자라고 있는데,

지금의 나는 그 기억의 바깥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은

아주 자연스러운 심리적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사랑했던 시절의 모습을

‘내면화된 표상(Internalized Representation)’으로 간직한다고 하잖아.

사랑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지금의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이 되기도 해.

아빠가 그리워한 것도 ‘사라진 나’가 아니라,

아빠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장면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때와는 다르게 자라고 있었고,

내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었어.

더 이상 아빠의 손을 붙잡지 않아도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아빠가 대신 설명해주지 않아도

내 언어로 느끼고 해석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아빠는 여전히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있었고,

나는 이미 직접 보고 싶은 세상이 있었던 거야.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사랑하면서도,

엇갈린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많이 닮아있지만, 동시에 많이 다르잖아.

어릴 땐 성원이가 아빠를 닮았다고 했고,

지금은 내가 아빠를 닮았다고 해.

어쩌면 그 시절 우리에게 닮음은 위로였고,

다름은 자주 오해였겠지.

사랑하는 만큼 동일시하고,

동일시한 만큼 서운해졌던 시절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알 것 같아.

아빠가 그리워한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사람이 자라면서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 아이는 시간이 씻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더 조용한 자리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존재였어.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가끔 신발을 구겨 신고

집안 불을 전부 켜놓고 나가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천방지축 뛰어다닐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내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여전히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따뜻해져.


이제는 그리움이 더 이상 서운하지 않아.

아빠가 사랑하는 대상이 ‘그때의 나’만이 아니라,

지금의 나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아빠가 그리워하는 ‘그 아이’는

내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고

나는 아마 그 아이를 잃지 않은 채,

지금의 나로도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아.


아빠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었고,

같은 방향을 보지 않아도

사랑은 충분히 자랄 수 있었어.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씩 자신의 세계를 열어두는 마음,

그리고 그 열린 틈으로

서로의 시간이 들어오는 순간 들이었겠지.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두 사람이 제각기 가진

세계가 천천히 겹쳐지는 과정인지도 몰라.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더라도,

서로를 향해 조금씩 접히고 이어지는

그 움직임 자체가 우리가 걸어온 여정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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