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

침묵이 이야기가 되기까지

by 개미는룰룰


아빠의 일기는 중학생 입학 전에서 멈춰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의 기억도 그즈음에서 희미해진다.

그때의 나는 집보다 교실에 더 오래 있었고,

아빠의 목소리보다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엄마 아빠와의 시간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 시절의 나에게 친구들과의 하루는 세상의 전부였다.


집에 들어오면 늘 혼자였다.

90년대생으로 자란 아이들 대부분의 그랬겠지만,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우리는 저마다의 집에서 스스로 저녁을 맞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면 조용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웠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갔다.


외로움은 늘 곁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을 켜고,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이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자립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거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빠는 그 무렵부터 일기를 쓰지 않았다.

아마 더 이상 내가 아빠의 하루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

주인공이 없는 일기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나는 점점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아빠와의 대화가 재미없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부담스러워지기만 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져서,

말이 아닌 마음으로만 연결되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의 아빠는 아마

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나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면 뛰어올라 안기던 나.

야단을 맞고도 금세 화가 풀려

웃으며 아빠한테 안기던 나.

하지만 아빠는 그리움을 쓰는 대신,

그걸 견디는 법을 택했을 것이다.

사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나를 믿는 마음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는 방식으로.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점점 더 집 밖의 세계에 익숙해졌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부모님의 말보다 또래의 시선이 더 중요해졌다.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누구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 아빠와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예민했고,

부모님의 걱정을 잔소리로만 들었다.

내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만으로도

안심하는 부모님의 숨소리가 들렸던 시기였으며,

내가 가장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집은 여전히 같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건 내가 사랑받지 못했던 시기가 아니라

서로에게 사랑이 닿지 않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도 보지 못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외로웠다.


어쩌면 나는 아빠의 일기가 멈춘 시점부터

나의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종이에 쓰지는 않았지만

내 안의 문장들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공백은,

사랑의 또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르겠다.

함께 있지 않아도,

서로를 중심에 두고 도는 궤도 같은 사랑.

글로 남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던 이야기.


아빠의 펜이 멈춘 자리에서,

나의 이야기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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