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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내 친구를 존경하게 되었다

17.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초조한 기색으로 베란다에 나왔다. 그리고 나란히 선 위태롭기 짝이 없던 스무네 그루의 자이언트 해바라기를 바라봤다.

아뿔싸! 간밤의 강풍에 처참하게 쓰러진 녀석들과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녀석들까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어제 낮 하우스 파이프에 줄을 쳐서 묶어두는 등 나름 강풍에 대비한다고는 하였지만 3미터에 육박하는 해바라기의 큰 키에 비해서는 여러모로 대비가 어설펐고 안일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대충 밀짚모자만 머리에 쓴 채 장화를 신고 급히 뛰어나갔다.


세상에! 이제 막 꽃을 피우려고 몽우리가 활짝 벌어진 한 녀석이 밑동이 부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직접 씨앗을 발아시켜 애지중지 키운 성목 해바라기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본 순간 어제의 부실한 대비에 대한 후회막심 자책의 마음이 끓어올랐다.

‘쯧쯧 이게 뭐람! 좀 더 제대로 보강을 해줄걸!’

그제야 옆 라인의 하우스 입구에 쌓아 두었던 2.5미터 길이의 파이프 뭉치를 발견하고 그것들로 다시 지주대를 세워주기로 했다.

성목의 해바라기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던 고추 지주대를 뽑아낸 자리에 일일이 파이프를 세우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런 후 해바라기들을 위아래로 질긴 끈으로 느슨하게 묶어주었다.


마지막 순서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이미 아랫부분 대가 부러져버린 해바라기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줄을 쳐서 부목을 대듯 묶어주었다.

그래도 작은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꺾여버린 밑동의 1/3 가량은 그나마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삽으로 흙을 파서 부러져버린 해바라기의 발목 부위 위에 수북이 흙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해바라기에게 나의 진심을 전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무성의했어! 그런데 꼭 좀 살아나 주라! 부탁이다!’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평상에 앉아서 일열 종대로 서있던 자이언트 해바라기들을 바라봤다.

처참한 부상병의 모습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크라이나산 식용 자이언트 해바라기가 한창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병사의 모습으로 오버랩되었던 것은 나의 문학적 감수성 탓이었을까?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 병사를 응원하는 심정으로 자이언트 해바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었지만 나보다도 훌쩍 키가 커버린 해바라기들이 두 번 다시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착시현상이었다.

씨앗을 발아시킨 모종을 키우는 과정에서 고추 지주대로 묶어두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그 모종이 어느새 3미터에 육박하는 폭풍성장을 하게 될 때는 당연히 지주대를 교체해 주었어야 했지만 순간적으로 그 생각을 놓치고 말았다. 해바라기가 자라는 것을 감상하면서도 왜 그런 기본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쨌든 더 이상의 피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사후조치를 취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쓰러져버린 그 녀석이 자꾸만 눈에 밟혀 사무실에 출근해서도 내내 울적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베란다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어젯저녁 와이프와 티격태격했던 여진이 남아있어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인데 아침을 먹자마자 곧장 집을 나섰다.

중간에 나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논에 들러 물속에 담겨버린 채 아직도 생사가 불명확한 북쪽 편의 어린모들에게도 나의 진심을 전했다.

‘어서 활착 하여 보란 듯이 이겨내자, 아자! 아자! 아자!’


사무실에 출근하여 모닝커피를 한잔하면서도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나의 논과 밑동이 꺾여버린 자이언트 해바라기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만 했다.

그러다 언뜻 생각해보니 어제저녁 와이프와 티격태격 한 이후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 나의 아픈 손가락이 무시당했다는 분노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돌쇠로 취급받았다는 분노?

그것도 아니면 진짜로 돌쇠가 마님에게 저항이라도 한 것인가? 나 원 참!


그러던 사이 카톡 소리가 들려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들렀다 온 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와이프가 찍어서 보내왔던 것이다.

눈으로 직접 봤을 때보다도 사진으로 보니 더 넓게 어린모들이 물속에 잠겨있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남측 편 어린 모들의 색깔이 어느새 파란색으로 변색돼 있었던 것이다.

‘어라! 그래도 물에 안 잠긴 놈들은 활착에 성공했네! 그렇게 나쁜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오늘도 곽 사장이 비를 맞으면서도 사무실에 들렀다. 요 며칠 사이에 오늘의 첫 손님 자격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오늘도 만만치 않은 토론 주제를 끄집어냈고 나의 생각을 묻고 있었다.

“농협에서 연락이 왔는데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고 싶으면 자경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라고 하네?

그래서 윤 사장한테 농협 영수증 몇 장을 부탁했더니만 뭐라 뭐라 하면서 거절하기에 결단을 내렸소!

올 가을부터는 천상 내가 직접 농사를 지어야겠는데 김 소장! 그게 맞겠지요?”


LH 직원들의 농지 투기 사건 이후 크게 강화된 농지관리 규정들이 급기야는 농협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조합원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강화하여 자경여부를 소명하지 못하는 조합원들을 퇴출시키는 중이었다.  

곽 사장은 몇 년 전부터 윤 사장에게 200평 규모의 작은 논을 대신해서 경작케 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더 강화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윤 사장하고 잘 상의해서 가을부터는 직접 자경을 해보소!

텃밭 농사짓기 에는 딱 적당한 평수니까 로터리가 가능한 관리기만 한 대 구입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요,

소싯적에는 당신도 신물이 나도록 농사일을 해봤으니 그 정도 평수야 뭐 장난 아니요?”

“아 그 정도야 뭐 완전히 껌이지!”


곽 사장이나 윤 사장까지 우린 모두 같은 초등학교의 동창들로서 일명 고추 친구들이다.

농협의 조합원 신분은 대개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승계받은 경우가 많았고 곽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신의 하는 일이 농업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일을 하다 보니 평소 농사를 많이 짓고 있던 윤 사장에게 자신의 땅을 임대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헌법 제121조의 제2항에서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예외적으로 농지의 임대차를 허용하고 있고 농지법에서 규정하는 그 예외적인 사항에 삼천 평 이내의 상속받은 농지가 포함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 간의 임대차는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농협에서 비자경자에 대한 예외 없는 퇴출조치를 취할 만큼 갈수록 제반 여건들이 자경을 강화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곽 사장도 직접 농사를 짓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난 언제부턴가 가까운 지인들이나 손님들로부터 자경에 대한 문의를 받게 될 경우면 한결같이 자경을 권유하는 자경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흙과 함께 숨 쉬며 작물을 키우는 재미를 나의 지인들도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지만 자경의 목적이 생존의 수단이라면 솔직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다. 대단히 슬픈 현실이지만 나의 오랜 겸업 농부 생활을 통해서 어렵게 내린 결론이다.


나야 뭐 처음부터 겸업 농부라는 한계가 있었으니 얼치기 농부가 분명했겠지만 윤 사장의 경우만 하더라도 제법 규모를 갖춘 전업 농로서 삼십 년 넘게 농업에 종사한 프로 농부였다.

하지만 최근엔 여름철 벼농사 외에는 일체의 농사를 포기하고 점심시간엔 인근 식당에서 밥 배달 알바에 저녁엔 대리운전 알바까지 뛰어들었다.


그런데 근자에 만나본 윤 사장의 얼굴이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해졌고 부쩍 마음의 여유도 회복한 터다.

문제는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작물의 시세가 들쭉날쭉이라 늘 농협 빚과 동거 동락해야 되는 악조건의 굴레 속에서는 결코 농사가 즐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벼농사가 즐겁다고 했다. 친구의 와이프도 재가복지센터에 출근하여 따북 따북 월급이 나오는 모양인데 이제야 조금씩 생활이 안정되면서 최근에는 적금까지 들었다며 자랑했다.

그러니 어찌 농사일이 즐겁지 않겠는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중노동이겠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농사일은 즐거운 운동이 된다.

지금 윤 사장은 죽을 맛이던 농사일이 즐거운 농사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안타깝게도 농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서 발견한 즐거움이었다.

윤 사장의 안타까운 입장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공감하는 진짜배기 전업 농부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 말은 피눈물이 나는 이야기가 분명하다.


난 최근에 내 친구 윤 사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밥 배달이던 대리기사 운전이던 열심히 사는 모습이 대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농사만큼은 또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 멋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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