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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진인사 대천명이거늘

18.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나의 관심사는 오직 어제 응급 수술한 자이언트 해바라기의 상태였다.

슬리프만 신은채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축 늘어진 상태 그대로였다. 밑부분을 흙으로 수북이 북돋기까지 했지만 생기를 잃어버린 초췌한 모습이 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아직 노란 꽃이 생기기 직전의 새파란 얼굴이며 더 넓은 잎들이며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고 오직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엊그제 와이프와 한바탕의 전쟁을 치른 후 난 아직도 뭔가 덜 풀린 기분으로 불퉁해 있다. 그래도 어제는 아침 출근 전 모닝커피도 마다하고 나가버렸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 베란다 카페에 앉아서 방금 올라온 연재 글을 읽고 있었다.

원두 두 잔을 내려놓던 와이프가 자신도 오늘 연재 글을 읽으며 키득거리며 툭 한마디를 던진다.

“규태 씨가 봤으면 기분 나빠했을 것 같은데…

얼굴이 동글동글한 귀염상이란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 맞나?”

‘그 표현이 어때서?’라고 반응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덜 풀렸던 탓에 결국 아무런 댓구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와이프는 키득거리면서 하루 독자수가 십 명 남짓한 지독히도 인기 없는 내 글을 재미나게 읽어주었다.


딱히 용무도 없으면서 친구들이 차 한잔하러 들렀다가 이런저런 주제로 환담을 나누다 돌아갔다. 그리곤 오늘도 손님다운 손님 한 명 구경하기 힘든 무료한 사무실의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고 인근에 사는 선배분을 바꿔주었다.

“요 며칠 사이 비가 많이 왔을 때 물을 짝 뺐으면 좋을뻔했는데 제초제 뿌린다고 그랬제?”

“예 중기 제초제 하고 요소 살포한다고 일부러 물을 잡아났었습니다”

“풀약 흩인 지 4일이 지났으니까 이제부터는 물을 완전히 빼서 물에 잠긴 모들도 살릴 생각을 해야지!

윗 쪽으로는 색깔이 많이 돌아왔으니까 깊은 모들만 잘 살리면 반타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논에 심다가 남은 모판이 좀 있으니까 그걸로 아직도 드문쪽으로 땜빵(땜질+빵구) 을 좀 더 하는 게 어떻겠노?

우짜던지 간에 지금부터는 내도 신경을 좀 써줄 테니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한번 살려봐야 안 되겠나?”

아 예 고맙습니더 행님!”

다시 와이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은 모판이 좀 된다는데 어떡하지?”

“되는대로 모판을 긁어모아서 논에 담가놔 봐?”

“당신이 심게?”

“그래 심기는 내가 심을 테니까 모판이나 있는 대로 모아놔 봐!”

핸드폰을 내려놓으니 그제야 잔뜩 굳었던 고집불통의 인상이 펴지기 시작했고 내 입가에선 옅은 미소까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나의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논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가족의 문제가 되었고 이웃 농민들의 관심사로까지 확대되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농부는 자신에게 부여된 소임을 다할 뿐 그 이후의 결실은 하늘의 몫일 터,

얼치기 겸업 농부가 농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이웃 농민들도 자신의 일인 양 팔소매를 걷어 올려주는 것이 진정한 농부의 마음이다.

그래서 농업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더 중요하고 재밌다.


그렇치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된다면 재미를 느낄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동기부여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니까.

그래서 난 농사일에 애정이 부족하던 와이프의 마음을 유인할 요량으로 몇 해 전부터는 경제적인 인센티브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우리 농장에서 생산되는 일체의 농작물에 대한 처분권한을 부여하는 파격적인 당근책이었는데 농사일에 대한 동기부여책으로는 꽤 괜찮은 조건이다.

지금까지는 쌀과 블루베리가 주 수입원이었지만 금년부터는 왕대추의 수확까지 살짝 기대되는 상황이다. 뭐 그렇다고 많은 돈을 손에 쥘 수는 없겠지만 와이프와 우리 딸이 좋아하는 여행자금 마련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무릇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딴 주머니 하나쯤이 허용돼야 일할 맛이 나는 법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다가는 어떤 꼴이 는지를 사십 년 전 소비에트의 해체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많지는 않지만 소유 농지의 대부분은 이미 식재한 지 칠팔 년이 지난 왕대추 농장이다. 최근에 제대로 된 수확을 해본 적이 없는 이유를 난 너무명확하게 잘 알고 있다. 결국은 풀과의 전쟁 때문인데 애당초 적은 노력으로 결실을 탐하려 했던 나의 얄팍한 잔꽤로 인하여 벌어진 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지난겨울 동안 스프링클러 시설을 관주 시설로 변경하는 공사를 마치고 올봄부터 본격적으로 미생물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가을에는 제법 탄실한 왕대추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왕대추 열매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라 시장에 내다 팔 정도는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수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진인사’를 다하지 못한 게으른 겸업 농부의 처지로서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과욕일 수도 있겠다.

풀과의 전면전이 두려워서 전문가의 처방전에도 나와있는 제초매트 걷어내기를 주저했다면 농부로서의 소임을 회피했다는 것! 

그런 주제에 ‘대천명’을 기대하다니 쯪쯪


그래도 이제 6월 말이지만 4월 초부터 새벽 별을 바라보면서 분무기 약통을 짊어졌던 날이 무려 12일(브런치 공모전을 앞두고 다시 정리하던 8월 말엔 무려 24일 증폭되었음) 매주 한차례였다. 그런데 전면적으로 제초매트를 걷어낸다면 대체 일 년 동안 약통을 짊어매지 않는 날이 며칠이나 된단 말인가?


그나마 풀과의 전쟁에서 다소 여유가 있다는 것이 벼농사라지만 내게는 그 조차도 아픈 손가락이 되어 쉽지가 않다.

오늘 와이프가 사무실에 당도했을 때 모판 애기는 일부러 꺼내지도 않았다. 그냥 와이프의 의지에 맡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만약 자신의 노력으로 모판을 구해놓는다면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또 한 번의 땜방을 하면 될 터. 굳이 모판이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우 진정된 냉전이 또다시 커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와 정말 어렵다! 농사일도 쉽지 않고 부부간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허긴 인생살이가 쉽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때론 싸우고 좌절하기도 하면서 힘겹게 이겨냈을 때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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