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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ul 15. 2023

그리운 교장선생님

시골초등학교 이야기 2


매주 목요일 저녁, 어김없이 와이프는 초등학교 목련관으로 달려간다. 마을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우리 구청에서 후원하는 라인댄스를 배우기 위해서다. 시골마을에서 이만한 문화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아서 인지 참여하는 마을부녀자들의 열정대단하다.

 모두가 우리 지역의 문화체육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내는 목련관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왔지만 그 가운데는 아직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으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는 나의 모교이자 우리 세 아이들의 모교인 한 공립시골초등학교에서 실내체육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엮은 이야기다. 

우리 학교를 거쳐간 무수히 많은 교장선생님들 가운데 단연 가장 특이했던 분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리 학교는 이 특이한 교장이 물려준 유산을 자양분 삼아서 현재까지도 거뜬히 살아남았고 여전히 씩씩하게 우리 마을을 지키고 있다.   


시골의 초등학교는 아이들의 교육시설이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의 문화체육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학교는 실내체육관을 가지는 것이 숙원사업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로서뿐만 아니라 동문회와 지역사회의 다양한 행사를 위해서도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골학교의 특성상 갈수록 줄어드는 학생수가 문제였다. 겨우겨우 학년당 열명내외를 근근이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교육청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근 학교와의 통폐합 대상이었다.

당장은 동문회와 지역사회의 강력한 저항부딪혀서 한발 물러선 입장이지만 호시탐탐 폐교의 기회만을 엿보던 교육청이었다. 이런 마당에 학교에 실내체육관을 신축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2007년 가을 무렵, 하필 이런 시기에 예사롭지 않은 교장이 부임해 왔다. 그런데 부임하면서부터 이 분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어떤 이는 ‘저런 분이 무슨 교장이냐? 학교 소사면 몰라도!’라고 평가절하하는 이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오랜만에 진짜 선생님다운 교장이 왔다’며 극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그런 평범한 교장이 아니었던 거다. 진정으로 아이들과 학교를 사랑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우리 학교는 콘크리트 담장 대신 나지막한 탱자나무가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어 길을 지나가다가도 교정 내부의 모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언제나 톱이나 낫을 들고서 행정실 장 주사와 함께 노동일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학교의 행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복 입은 근엄한 교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학교 여기저기를 고치고, 또 무언가를 새로 만들고, 재배치하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교장만 있었다.

이렇듯 색다른 교장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았던 일부 동문 및 지역주민들로선 오해와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게 사실이다.


우리 마을은 농촌과 도시가 복합돼 있는 어중간한 도농 복합지역으로서 한편에선 귓가를 찢는 듯한 공장들의 기계소음이 들리는가 하면, 또 한편에선 밭을 가는 농부의 트랙터 소리가 한가롭게 교차하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서 공장의 대형차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사이사이를 채소를 실은 농부의 트럭들이 뒤엉켜 어떤 때는 한두 시간씩 오도 가도 못할 때도 있는 한마디로 복잡한 마을이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중국집만 일곱 개, 가든 형 식당이 다섯 곳, 배달 전문 밥집만 열서너 집이 넘을 정도로 낮에는 넘쳐나는 유동인구로 북적북적이지만 밤이 되면 썰물 빠져나가듯 적막강산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낙동강 건너의 오지학교라는 이유로 특별히 가산 점수를 주지 않는다면 자원해서 우리 학교로 오겠다는 교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교통이나 주변 여건 등 모든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다.

이 특이한 교장이 부임해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치 군인들이 국방부 시계만 쳐다보며 무료함을 달래듯 적당히 시간만 때우려는 무성의한 교직들이 더러 있었다.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골치 아프게 새로운 일을 벌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특이한 교장은 그동안 보아왔던 보통의 교장들하고는 처음부터 달랐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유별났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 부임해 오자마자 근엄한 교장의 표상인 양복을 벗어던지고 막노동꾼이나 입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손수 톱과 삽을 들고서 그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학교를 자기 생각대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게으름을 부릴 수도 없었던 행정실의 장 주사로서는 골이 날 법도 했지만 특이한 교장 옆에서 하루 종일 진땀을 흘렸야 했다.


그러던 사이 볼품없었던 시골학교는 조금씩 변해갔는데 학교 뒤편 담벼락에 나붙은 현수막들을 통해서 학교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걸핏하면 부산최우수상, 전국 최우수상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이 특이한 교장은 학교 개조에 들인 노력과 그 능력을 평가받아 2008년 부산시교육감이 선정한 ‘교장·교감 다채널평가 최우수교장’이 되었고, 2009년에는 전국에서 단 3명만 준다는 ‘아름다운 학교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로 선정되어 부산시교육감 표창을 받았고, 동시에 ‘부산시 학교평가 최우수학교’로 선정되어 교과부장관 표창까지 받았다.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학교문화예술교육 육성을 위한 ‘2011년 예술꽃 씨앗학교 지원사업’ 공모에 부산대표로 선정되어 매년 1억 원씩 4년간 총 4억 원의 문화예술교육활동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당시 교육 관계자들이 줄을 지어서 시골초등학교로 견학 오는 모습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고, 여러 학교로부터 학교 운영의 성공담에 대한 특강을 해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이 특이한 교장은 잠시도 쉴 이 없었다.

우리 학교에서 눈부신 3년의 근무기간이 끝나갈 즈음 교육청 장학관으로 영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 특이한 교장은 보장된 출세의 길마저 마다한 채, 또다시 이 시골학교에서 4년을 더 근무하게 해 달라는 엉뚱한 요청을 하게 된다.

당시 감격한 교육감은 직접 포옹까지 하면서 임명장을 주었다는데 이로써 2010년부터 4년 임기의 초빙 교장이 되어서 도합 7년을 우리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 특이한 교장으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 있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만들어서 하는 사람과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 특이한 교장은 학교와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실천하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마침내 실내체육관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지역사회와 협동작전을 펼치게 되면서 자신의 인맥과 지역사회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하지만 학생수가 부족하여 이미 폐교방침이 정해진 학교에서 체육관을 신축하는 문제는 의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실내체육관의 신축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대담하게도 이 특이한 교장은 지역사회의 파격적인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동문회의 선후배들로 똘똘 뭉쳐진 지역사회는 우회로를 택해서라도 실내체육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운동장 입구에 위치한 교실 한 칸 규모의 목련관이었다. 작은 강당 역할을 수행하던 목련관을 실내체육관으로 사용하려면 적어도 기존보다도 두 배 이상인 칠십 평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했다.


폐교대상으로 낙인찍힌 학교로서는 당연히 신축뿐만 아니라 증축도 허락될 리 없었기에 정상적인 행정절차를 일체 생략하는 대단히 위험한 결정이었다.

지만 이 특이한 교장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목련관의 불법적인 증축과정에 공모했다. 물론 증축에 따른 모든 비용은 동문출신 몇몇 건축업자들이 쾌히 기부하는 형태로 거뜬히 해결할 수 있었다.


비록 교육청 몰래 비합법적으로 증축된 실내체육관이지만 목련관은 지금도 우리 아이들과 지역사회의 문화체육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의 목련관 증축과정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교직생활 말년에 자칫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적어도 이 특이한 교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치는 대신 평소의 그 답게 대응했다.


"사실은 저도 학교 체육관으로 쌓인 우리 동문님들의 원한을 좀 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며칠 전부터 목련관 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거든요!

학교를 위한 동문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격한 감동이 몰려옵니다, 고맙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그렇게 진행하시지요!"


지금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기장의 어느 한적한 산골마을에서 유유자적 농장을 가꾸면서 살아가신다. 이제는 퇴임 후의 망중한을 즐길 법도 할 테지만 웬걸 인근의 유치원, 초등학생들로 늘 북적북적한다.

농장을 아이들의 체험학습장으로 개방한 탓이라는데 여전히 삽과 톱을 든 손으로 농장 여기저기를 고치면서 또 무엇인가를 새롭게 구상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옆에는 견학온 아이들이 농장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해맑은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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