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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들깨냐? 옥수수냐? 그것이 문제로다

25.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한바탕의 장맛비로 대지를 흠뻑 적신 어제와 달리 오늘은 온종일 구름만 걸쳐있다. 와이프와의 교대식을 마치자마자 곧장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집 앞 왕대추농장으로 직행했다.

장마 통에 영양분만 축내는 도장지들이 무섭게 뻗어 나와 전지를 해줄 참이었는데 어마 무시한 그 량에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우선 급한 대로 통로라도 확보하기 위해 가차 없이 자동 전지가위를 들이대며 빠른 속도로 도둑 가지들을 처단해나갔다.

서편으로 다가가는 태양의 각도를 보아가며 머릿속이 빠르게 정돈되었다. 겸업 농부는 일머리는 서툴러도 나름 계산기를 두들겨가며 일을 하기 때문에 꽤나 효율성을 따지며 일하는 편이다.

 

도둑 가지 처단 작업은 일주일에 걸쳐서 진행시켜 나갈 작정이라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다음은 떨어진 과일 줍기다.

어설픈 농부는 저농약 재배를 한답시고 살충 살균제의 살포를 게을지게 한 탓에 장마 때는 엄청난 낙과 현상이 발생한다.

부지런히 줍지 않는다면 병균이 확산될 수도 있고 또 미관에도 좋지 않아 떨어지는 족족 바구니에 담아서 마당의 한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일곱 개의 대형 액비 통에 집어넣는다.


오늘은 네 가지의 미생물중 고초균이 순번제로 돌아왔다.

농업기술센터에서 배당받아온 20리터 가운데 절반은 네 개의 액비 통에 골고루 분산시키고 나머지 10리터는 대형 수조 통에 담긴 지하수 물과 혼합시켰다.

이렇게 밤새 지나면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내일 새벽이면 물의 색깔이 검은 먹물 색으로 변색이 된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비주얼만으로도 진한 보약 같은 생각이 들어서 가급적 그 상태에서 과실수며 온갖 종류의 엽채들에 살포하고 있다.  


슬슬 모기들이 달려들 때 즈음 오늘의 작업을 끝낼 요량으로 마당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언제 왔던지 사무실에서 퇴근한 와이프가 작업복 차림으로 땅콩 밭을 향하고 있었다. 손에는 새로 산 낫이 들려있었고 각오는 비장해 보였다.

“지금 풀을 못 잡으면 애써 키운 땅콩이고 고구마고 간에 모조리 버리게 생겼어요! 하는 만큼 하고 들어갈 테니까 당신은 먼저 들어가서 씻어요, 아휴 징글징글한 풀들!”

와이프의 이 말에 난 두 가지의 잘못을 자책해야 했다.

첫째는 농기구 선반에 걸려있던 여러 개의 낫들 중 쓸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관리를 부실하게 한 죄! 

그라인더로 갈면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님에도 굳이 새 낫을 사게 만들었으니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둘째는 봄에 모종을 심을 때 와이프가 고집을 부려서 웬만한 밭에는 검은 비닐로 멀칭을 하였지만 그 사이의 골에 난 잡초만큼은 제초제를 살포했어야 했다. 

그 넓은 대추농장에는 새벽부터 열심히 제초제를 살포하였음에도 와이프가 애지중지 키우는 땅콩과 고구마 들깨와 옥수수 밭은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샤워를 마친 후 베란다 카페에 앉아서 제법 여유를 부리고 있었을 때 와이프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데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씨! 손을 비었어! 빨리빨리 소독약 좀 찾아봐요?”

오른손으로 감싼 왼쪽 엄지손가락에서 흥건하게 피가 고인 것으로 봐서는 작은 상처는 아니었다.

소독약을 바르니 와이프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통의 소리가 멈추질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상처에 바르는 연고까지 바른 후 밴드로 칭칭 감아주었다.


그렇게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안정을 되찾은 와이프가 했던 말이 무표정한 내 입꼬리를 올라가게 만들었다.

“들깨 하고 옥수수가 뒤섞여서 한 가지는 포기해야 될 것 같은데 뭘 포기하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쓸데없는 일에 개입 안 하기였다.

다시 베란다 카페로 나와 라디오를 켠 채 해바라기 군락지를 바라보며 멍 때기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산 자이언트 해바라기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단체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씨의 량이 어마 무시하다.


물음에 대한 대꾸를 안 해주는 나에게 이번에는 와이프가 자신의 스마트폰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다가왔다.

오늘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잠시 논에 들러서 찍었다는 제법 의젓하게 자리를 잡은 어린모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기한 듯 말했다.

“생명의 신비가 놀랍지 않아요? 이렇게 싱싱하게 살아났잖아! 조금만 더 땜질을 해주었더라면 더 멋진 작품이 될 뻔했는데…”

이번에도 난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기에 살포시 미소 띤 얼굴로 맞장구를 쳐줄 뿐이다.

낫으로 엄지손가락을 베여 피가 철철 흐르는 가운데서도 기어코 얼마 남지 않은 잡초제거작업을 끝내고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는 의안이 벙벙했다.     

 


다음날 새벽 일어나자마자 블루베리 농장에 액비를 살포하기 위해서 나섰다가 어제 와이프 홀로 전쟁을 치른 격전지를 발견했다.

장마 통에 폭풍 성장해버린 큰 키의 풀들이 와이프의 거친 낫질에 완전히 제압돼 골 가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던지 땅콩 밭에 떨어져 있던 와이프의 꽃 모자를 줏으며 마음이 아련해졌다.


블루베리 하우스 옆으로 나란히 만든 들깨 밭은 와이프 말대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지난 5월 중순 처음엔 들깨 밭을 만들 요량으로 작년에 수확한 들깨 씨앗을 다소 넉넉하게 뿌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싹이 터지 않는다고 판단한 나의 조급증이 문제였다.


5월 말 와이프가 빈 땅에 심겠다며 옥수수 모종을 잔뜩 사 왔을 때 들깨의 강인한 생명력을 믿지 못한 난 들깨 밭에 그것을 심도록 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가느다란 들깨의 어린 새싹들이 빼곡하게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장마 통을 지나면서는 흡사 사자 한 마리를 십여 마리의 하이에나 무리가 둘러싸고 위협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들깨냐? 옥수수냐? 그것이 문제였지만 영악한 겸업 농부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제 내가 너무 힘을 주어서 밴드를 감았던 탓인지 아침까지도 와이프의 엄지손가락에서 지혈이 멈추질 않았다.

비명소리를 들어가며 또다시 소독을 하고 연고와 반창고를 바른 후 이번에는 다소 느슨하게 밴드를 감아주었다.


그리고 와이프가 지시하는 대로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냉장고에서 꺼낸 단출한 반찬 몇 가지를 상에 올려서 초간단 아침상을 차려서 바쳤다.

군말할 처지가 아니었으니 대충 이렇게 아침은 해결했지만 그래도 모닝커피는 마셔야 했다.

어제 규태 와이프가 나의 생일 선물로 보내준 웅장한 크기의 머그컵으로 시식을 해보았더니 앞으로 한동안은 이 컵으로만 커피를 즐길 것 같았다.

꼭 병원을 들러서 치료하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사무실은 안 나와도 된다고 말해준 뒤 집을 나섰다.  


사무실에 출근하여 나의 전용 자리에 미끄러지듯 주차를 하고 내리니 오늘도 어김없이 주차장 주변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2층 아저씨를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어서 온 나! 방금까지 웬 사람들이 측량을 한다고 몰려다니기에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더니만 그린시티 용역 팀에서 나왔다고 하데?”

“아하? 드디어 시작이 됐군요!"

“강을 중심으로 해서 마을 전역을 다 측량한다고 하는 거라! 인제 올 것이 온 것 아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풍경은 그 어떤 동요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상시와 다름이 없다.

돼 봐야 되는 것이지 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는 무감각이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전부터 그놈의 출중한 마을 인물 탓에 워낙 말들이 많았었다. 이렇게 할 것이다 저렇게 할 것이라며 시청 발 여러 청사진들이 난무했지만 별 이상 없이 잘 지내오면서 일종의 면역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오늘도 온종일 사무실에 잡혀있는 고문을 당한 뒤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니 와이프가 보이지 않았다.

피부과에 들러서 간단히 치료만 하고 돌아온 이후 오후 시간 내내 또 잡초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젠 거의 끝내고 들어오는가 싶더니 도저히 못 참겠다며 또다시 향한 곳이 마당 바로 앞의 화단이었다.

화단의 풀 메기 작업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안 보면 몰라도 보면서는 그냥 방치할 수 없는 것이 농부의 마음이라더니 엄지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도 잡초와의 전쟁을 멈추지 않는 와이프가 꼭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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