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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진숙의 금반지가 화근이었다

24.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막바지 장맛비가 온종일 내린 덕분에 꼼짝없이 오후 늦게까지 사무실에 잡혀있었다.

오후에도 비가 온다면 자연히 겸업 농부의 오후 일정들이 순연될 수밖에 없어 와이프는 사무실 교대근무를 거부할 명분이 생긴다.   

하루 종일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더라도 25년 구력의 부동산 중개업자는 무료할 틈이 없다. 그동안 읽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둔 책을 펼치기고 하고 국세청 홈텍스를 클릭하여 세법에 대한 각종 질의회신을 섭렵하면서 나름 촘촘하게 시간을 보낸다.


퇴근을 하면서는 이젠 아픈 손가락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적인 논의 모습으로 원기를 회복한 대견한 우리 부부의 논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나 야무지게 풀약을 쳤던지 남쪽 편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던 피와 여러 잡풀들이 바짝 말라서 녹아내린 것부터 눈에 들어왔다.  

이웃 농민의 배려로 남쪽 논두렁에 설치된 50미리 농수관에서는 적절한 량의 물이 흘러 들어오고 북쪽 배수로를 막아버렸음에도 이젠 깊은 논의 어린 모 조차도 물에 잠기지 않는다.

어느새 훌쩍 키가 커버려 자립 생존이 가능하게 된 것인데 대견하고 고마운 생각에 감개무량한 생각까지 들었다.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서 웬일인지 와이프가 공모전 애기부터 끄집어낸다.

“집에 있으면서 요 며칠 못 봤던 당신 글을 몰아서 봤는데 우스워서 죽는 줄 알았어! 백두산 장군봉에서 진숙이한테 상윤이 청혼하는 장면은 정말로 압권이었어! 당신한테 그런 감수성이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감동 먹었잖아 내가!

그런데 말이야, 진숙이한테는 평양백화점에서 샀다는 금반지를 잘도 끼워주더구만! 난 왜 실반지 하나도 없는 거야?

억울해서 안 되겠어! 다가오는 결혼 30주년에는 더도 덜도 말고 진숙이 한테 끼워준 딱 그 정도의 금반지라도 좋으니 나도 하나 끼워줘!

두 번 말 안 한다! 한 돈 짜리라도 좋으니 14호로 골라서 나도 하나 끼워줘! 진숙이는 주면서 왜 난 안 주는 거야? 차별 대우하면 나 정말 열받을 거야!”


다음 달이면 결혼 30주년이다. 몇 년 전부터 다이아몬드니 어쩌니 하면서 기념예물 타령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겐 그냥 마이동풍일 뿐 그 어떤 반응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워낙 사치품에 투자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라서 지난 25주년 때는 당시 최대 용량의 냉장고를 사주면서 퉁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대충 그러려고 했지만 30주년은 뭐가 그리도 특별한지 하다못해 실반지 하나라도 해달라고 저 아우성을 부리고 있었다.

공모전에 나오는 진숙이 야 명색이 청혼을 받는 입장인데 당연히 가느다란 금반지라도 끼워주는 게 맞겠지만 우리야 뭐 입장이 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와이프는 좀체 물러설 생각이 없었고 나의 버티기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조용히 베란다 카페로 자리를 옮겼을 때 딸에게 카톡을 했다.

‘하도 30주년이라 노래를 불러서 그러는데 금반지를 한번 알아봐? 아무도 모르게 한 돈 짜리로, 14호라고 하던데 돈은 아빠가 줄 테니까’     


다음날 새벽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자동적으로 기상이다.

비는 그쳤지만 온통 빗물을 머금고 있어 농장에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

그냥 베란다 카페에 앉아서 서서히 밝아지는 마당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감사해하고 있었을 때 난데없이 ‘띵동! 띵동!’ 카톡이 울렸다.

새벽 다섯 시였다. 서울에 사시는 외사촌 형님으로부터 생일 축하 카톡이 전달되어 무심코 고맙다는 답신을 했더니 또다시 꽃다발 한 광주리를 전해주는 이미지 그림을 전송해 주었다.

역시 나이 드신 분들은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고 하더니 어느새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아침 출근에 앞서 베란다 카페에서 방금 내린 원두를 마주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에서는 어떻게 알았던지 여기저기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들이 날아들고 있었지만 정작 우리 집은 먹다 남은 미역국과 케익 한 조각만이 나의 진짜 생일날을 기억할 뿐이다.

“창원 사는 친구가 8월 1일과 2일 충북 제천으로 휴가를 간다는데 어떻게 같이 가도 돼?”

“8월 1일은 코로나 4차 접종이 예약돼 있는데?”

“그거야 당신 혼자 맞으면 되는 거고 한두 번 맞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당신 의견이야 뭐 중요하나? 이 나이에 내가 가고 싶으면 알아서 가면 되지!”

“그런데 묻기는 뭐 하러 묻는 거야?”

“사실은 나한테 물어본 거야! 따라가도 될 만큼 컨디션이 올라올까 어떨까 해서…”

“이 여름에 어디를 가본들 우리 집만큼 편하게 쉴 수 있는 데가 있을 것 같해?”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난 몸만 허락한다면 국내고 국외고 간에 막 싸돌아다니고 싶어, 지금 컨디션으로 나가면 개고생이라서 그렇지!”

그러면서 뭔가 또 생각났던지 잔뜩 미소를 머금고 다시 말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의 청혼 장면은 암만 생각해도 웃겨버렸어!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규태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경은의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다는 묘사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거든! 옛날에 나한테도 그랬잖아!”

난 그런 기억 자체가 없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마당으로 시선을 돌리자 와이프의 표정이 또다시 돌변하면서 그놈의 금반지 애기를 또 꺼낸다.

“진숙이 한테 끼워준 게 가느다란 거라고 했으니까 한 돈 짜리라고 치고 진숙이하고 나하고 차별 대우하지 마! 그땐 진짜로 가만 안 있는다!”

“… …”     


사무실에 출근하자 말자 스마트폰으로 걸려온 손님의 전화를 받았다.

마지막 남은 나의 작은 강변 땅이 눈앞에 삼삼 거려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매도의사를 물어보는 전화였다.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으므로 차후 비슷한 물건이 나오면 연락을 주기로 하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다독거려 주었다.

‘토지도 인연이 없으면 내 것이 될 수가 없거늘!’ 맘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을 때 때마침 신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차 한잔 할 수 있느냐며 자리에 앉는다.

이때 내 머릿속을 스친 단어는 사람의 인연이었다.


윤회니 전생이니 하는 동화 같은 비과학적인 애기들은 애당초 관심도 없지만 25년을 부동산 중개업자로 살아오면서 토지와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혹시 내가 소개했다면서 소장님한테 전화 온 사람 없었습니까?”

“아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제 주변에 농지에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있었어 소장님을 소개해 드렸거든요, 아마 연락이 오게 되면 잘 좀 부탁드립니다”

두 잔의 무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신 사장과 마주 앉았다.

“부탁은 제가 드려야지요! 그나저나 강변 땅과 사장님의 궁합이 잘 맞는가 봅니다, 부동산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누가 땅의 주인인지 알아맞히는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 생겨서 대충은 알아맞히거든요!”

“다 인연이 있지요! 내 소유의 고철상 땅을 팔고 나니까 얼마 안 있어 몇억이 올랐단 말입니다,

그 일로 우리 마누라는 지금껏 잔소리를 해댑니다만 그때 그 땅을 안 팔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또 누가 압니까?

팔자말자 땅값이 튄 것도 다 그 사람 복이요, 그 덕분에 내 맘에 쏙 드는 강변 땅을 산 것도 다 내 복이요,

모두 다 자기 복이 있는 법인데 매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지요!”


방금 이 말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도인들이나 할 법한 말이지 않던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공감이 가는 지당한 말이라는 생각과 함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누구라도 앞으로 걸어갈 길은 잘 보이지 않지만 이미 지나온 길은 잘 보이는 법, 그래서 같은 인생을 다시 한번 더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간절하겠다. 하지만 그렇게 달라져버린 인생이 오히려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을 감사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같은 세상을 두 번 산다는 현대 판타지물의 설정을 싫어한다.

가능하지도 않은 비과학적인 설정도 싫지만 주인공만 똑같은 인생을 반복해서 사는 불공정성이 더 싫다.

비과학적이고 불공정한 현실도피적인 설정보다는 차라리 미래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돌직구처럼 좌충우돌 당당하게 살아가는 일반 소설 장르가 훨씬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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