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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3. 2023

작은 불씨 속의 희망 하나

시골초등학교 이야기 

오늘은 공 회장과 함께 일찌감치 교육청에 당도하여 거의 하루종일 교육청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사실은 청사에 당도하자마자 교육감에게 하소연이라도 해볼 작정으로 3층에 위치한 교육감실부터 들이닥쳤다.

그런데 오전의 이른 시각임에도 벌써부터 면담 대기실은 발 디딜 틈도 없북적거렸다.

우리와 같은 답답한 사연을 지닌 민원인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전에 면담예약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름 후에나 면담이 가능하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일단 머리부터 집어넣자는 심산으로 무작정 들이밀었다.

혹시 자투리 시간으로라도 잠시잠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얌체 생각으로 기회만 엿보던 때였다. 

우리의 행동거지가  불편해서 도무지 못 봐주겠던지 비서실장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청원서는 교육감에게 꼭 전달할 테니까 면담 날짜가 잡히면 그때 다시 와 달라고 통사정조로 말하는 거다.

하는 수없이 교육감면담을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청원서의 주요 내용은 이랬다.    

      

 『교육감님의 결단으로 허락하신 본교 체육관 신축의 건이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서구청에서는 교육청으로 기부채납하는 건축물은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제40조 제2항에 의거, 10년 이내의 특약등기는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특약등기 대신 조건 없는 기부채납 시에만 받아들이겠다는 부산교육청의 입장은 강서구청더러 법률을 어기라는 바와 같기에 무리한 요구라고 사료됩니다.

모처럼만에 찾아온 우리 아이들의 교육 여건 개선의 기회 좌초되지 않게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더 교육감님의 결단을 청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원자의 명의를 ‘맥도리 문화체육회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아니라 ‘배영초등학교 다목적 강당 건립추진위원회’로 정정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이 교장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 교장이 교육청에 보고하기 위해서 작성한 문서에는 일관되게 ‘배영초등학교 다목적 강당 건립추진위원회’로 명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체육관의 주 용도가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물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체육관이 아이들보다는 지역민을 위한 시설이므로 부지 제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청의 부정적 논리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이 교장은 자신의 생각을 우리들에게 내비치거나 요구하지도 않았다.

맥도리 전체주민들의 총의가 반영된 추진위의 정식명칭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명칭의 문제는 이 교장이 생각했던 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어제 있었던 추진위 이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결론을 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진실로 중요한 건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지역주민들이 서로 사이좋게 사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이라는 실제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그깟 이름은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바꿀 수 있었다.


청원서를 전달한 후, 오후에 예정된 수용팀과의 면담 일정 사이에 시간차의 공백이 발생했다.

남는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이런저런 의논도 할 겸 해서 황 위원을 만나볼 요량이었다.

사전에 약속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통화가 쉽지 않았던 관계로 다소간의 결례를 무릅쓰고 무작정 시의회청사를 방문했다.

사무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외부인이 알 수 있도록 15㎝가량의 문틈이 열려 있어 빼꼼히 내부를 들여다봤다.

안에는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열띤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곧 끝나겠지 싶어 복도의 창밖을 통해서 길가를 지나가는 무표정한 시민들을 하염없이 살펴보는 중이다.

삼십 분을 기다려도 끝날 기미가 없자 다시 문 틈으로 내부의 상황을 확인하던 사이 황 위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봤으니 곧 무슨 조치가 있겠지 싶어 또 기다렸다.

창밖의 시민들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발걸음들이 바쁘다. 각자의 삶을 위하여 재촉하는 발걸음에서는 그 어떤 여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공 회장이 그만 가자고 하여 휴대폰 화면 속의 시간을 살펴봤더니 여기로 온 지도 벌써 한 시간이 지나가있었다.

 

본청 인근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한 후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빼어 들고 청사마당의 나무벤치에 앉았다.

“회장님! 문제는 특약등기거든요. 이쯤에서 우리가 대안 제시를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둔 거라도 있더나?

"사실은 어제 특약등기에 대한 법률적 자문을 구해봤거든요,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에서 규정하는 것은 용도가 지정된 국고 보조금이나 지방 교부세로 조성된 일반 재산을 다른 기관으로 양여할 때는 특약등기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일반 재산을 기관에서 기관으로 기부하는 ‘양여’의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에 구청 재산을 교육청으로 기부 채납할 때는 당연히 이 법률을 적용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청에서 시행하는 관급공사의 방식이 아니라 민간위탁 방식으로 사업을 변경하게 된다면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가령 우리 추진위에서 이 사업을 맡아서 체육관을 짓고 등기까지 한다고 가정을 보자는 겁니다.

그런 후에 교육청으로 기부 채납을 하게 된다면 공유재산법에 의한 ‘양여’에 해당되지 기 때문에 골치 아픈 특약등기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냐는 겁니다"

공 회장도 수긍이 간다며 솔깃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구청에서 교육청으로 바로 넘길 것이 아니라, 구청 예산으로 우리가 먼저 짓고, 그런 후에 우리 이름으로 등기를 해가 교육청으로 넘기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 말 아이가?”

“그렇습니다.”

“문제는 구청하고 교육청에서 과연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해주겠나?

그 사람들은 우짜던지 간에 사업을 포기시키려고 오만 가지의 핑곗거리만 찾는 사람들인데…”

“암만 우리를 포기시키려고 해도 명분이 필요한데, 명분이 없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일단 한번 부딪혀 보입시다!”


적당한 타이밍 때, 공 회장이 대안 제시를 하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맞춰서 우린 4층에 위치한 시설지원과로 향했다.

문을 열고서 교육지원과를 들어서자 백여 평 규모의 더 넓은 사무실 천장에 매달린 우측의 팻말을 보고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수용팀' 

우측의 절반이 1,2팀으로 구분된 수용 팀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인원만 해도 족히 수십 명에 이르는 것을 보고는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학교 통폐합 정책이 장난 삼아서 한번 해 보는 정책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로 벌써 세 번째로 만나게 된 수용 2팀의 이 주무가 반갑게 인사하며 안쪽에 위치한 과장실로 안내했다.

비쩍 마른 체격에 훤칠한 키, 전체적으로는 똑 부러진 인상의 박 과장이 자신을 소개하며 자리를 권했다.

이때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수용 2팀의 김 사무관이 들어와 악수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앞전에 교장실에서 있었던 거친 설전에 대한 여진이 채 가시지 않았던지 미세한 찬바람이 와닿는다.

내어온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찻잔을 입에서 떼자마자 익숙한 서류 한 장이 원탁 위에 놓였다.


오전에 교육감에게 전해달라며 비서실장에게 전해준 바로 그 청원서였다. 두어 시간 전에 교육감실에 접수시킨 청원서가 바로 여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아! 여기가 바로 우리 학교 문제를 다루는 실세 부서가 틀림없구나’하는 직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체육관을 짓고 안 짓고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의 생사 여탈권을 바로 이 부서에서 쥐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덕도의 눌차초등학교를 통폐합시킨 실무 책임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직원은 폐교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당연히 동문회와 지역사회에서는 폐교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학생 수가 줄어들어 두세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수업하는 복식수업을 하게 되면 상황이 많이 달라집니다.

학부모들이 먼저 들고서 일어납니다! 나중에는 교사들도 폐교시켜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동문회도 손을 놓게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굳이 이 같은 말을 하는 의도는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동문들이 제 아무리 폐교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폐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 대한 통폐합 절차를 밟게 된다면 앞으로도 몇 단계의 과정을 밟아가며 진행되겠지만 그전에 먼저 동문회의 반응을 타진해 보는 가벼운 몸 풀기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의 반응을 떠보고 있었던 거다.


아직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듯 의도적으로 냉랭한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던 김 사무관이 우릴 쏘아보면서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내년에는 덕두초등학교에 예산이 많이 내려갑니다.

배영 아이들을 위한 좋은 시설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대폭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덕두로 통폐합이 되면 셔틀버스도 제공할 거고 배영 때보다도 훨씬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팔짱을 낀 채, 지그시 감은 눈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공 회장이 피식 웃는다.

“이것 보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들으려고 우리가 여기까지 온 줄 압니까!

그런 소리는 아무리 하셔 봤자 우리한테는 ‘소 귀에 경 읽기’이니까 그만두시고 법률이야기나 좀 해봅시다!

강서구청에서 체육관을 지어서 아무 조건 없이 부산교육청으로 주고 싶어도 기관 대 기관끼리 목적이 명확한 재산을 양여할 때는 10년 동안 특약등기를 하게 돼 있다던데 그게 맞습니까? 법전에 그렇게 나와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같은 우리나라 법을 가지고 강서구청만 지키고 교육청은 안 지켜도 되는 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무작정 아무런 조건 없이 넘기라고 하는 것은 강서구청보고 법률을 어기라는 말밖에 더 됩니까?”

이번에도 김 사무관이 말을 받았다.

“적정규모 학교 육성 계획에 포함된 배영은 통폐합이 완료될 때까지는 일체의 시설 투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의도적으로 김 사무관이 아닌 박 과장을 응시하며 끼어들었다.

“대응 투자를 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체육관을 지어서 그냥 줄 테니까 지을 수 있도록 허락만 해 달라는 겁니다.”

나의 이런 의도는 실무자 말고 책임자와 얘기하고 싶다는 의사 표시였지만 노련한 박 과장은 팔짱만 낀 채 묘한 미소만 띠고 있다.

나의 의도에 가볍게 끌려 들어올 태세가 아니다.

김 사무관이 자기 하고만 이야기를 하자며 나의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또 끼어든다.

“누구의 예산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체육관을 짓게 되면 통폐합 정책에 방해가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겁니다.

만약에 체육관을 짓도록 허용한 후에 그것 때문에 통폐합 정책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여기 있는 우리는 문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특약등기를 조건으로 시설 투자를 허용하는 것은 100% 문제가 된다고 봐야 됩니다.

뻔히 그런 일이 예상이 되는데도 어떻게 우리가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새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는 걸로 봐서는 다혈질은 확실히 다혈질인 모양이다.

자기 혼자서 책임지고 상대하겠다 듯 오늘 이 자리에서 아주 끝장을 보자는 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꼭 지으시겠다면 2012년도에 예정된 통폐합 절차를 밟은 후에 지으십시오! 그때는 허락하겠습니다.

폐교가 되더라도 학교 시설은 그대로 보전하니까 체육관도 지으시고 원하신다면 아예 학교시설을 통째로 지역사회에 맡길 테니까 잘 관리해 주십시오!

이 자의 말하는 태도에서 섬뜩한 살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마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필사적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학습 환경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겠죠?

반면에 동문회나 지역 분들이 자기들의 이기심 때문에 두 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기어코 학교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교육청에서도 당장은 어쩔 수가 없을지 모릅니다.

강제로 통폐합시키는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아이들의 미래를 누가 망치는 겁니까!

여러분들께서 조금이라도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런 편견 없이 생각해 보신다면 오히려 찬성하시는 동문 분들이 훨씬 더 많이 계실 겁니다!

학부모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공직자로서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는데 무어라 할 수는 없을 테다.

지만 명색이 우리가 동문들인데 우리를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금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이들이 추진하는 학교통폐합 정책을 완료하게 되었을 때와 반대로 실패하게 되었을 때 이들이 받게 될 성취감과 좌절감이 무엇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 이 사람은 마치 맹수가 포효하듯이 대단히 거칠게 말하고 있었다.


공 회장이 아껴두었던 회심의 카드 한 장을 만지작거리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시도했다.

“이번에 우리 학교가 부산교육청에서 선정하는 최우수 초등학교에 포함된 걸로 압니다만 맞습니까?

교과부가 선정하는 전국 50위권 초등학교에도 포함됐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회심의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지만 기대했던 반응과는 확실히 온도차가 있었다.

모범적으로 훌륭하게 학교를 경영하시는 교장선생님의 치적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는 인사치레는 있었다,

지만 어딘지 모르게 별것 아니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시 공 회장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래서 지역사회에서 체육관을 지어주려고 하는 겁니다!

학생 수가 줄어들 것 같으니까 학교 문부터 닫자는 것은 패배주의입니다.

오히려 보다 더 좋은 교육 여건을 만들어주  반대로 학생 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으로 우리 학교에 체육관을 지어주려고 하는 겁니다!

지리산초등학교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서울 강남에서도 유학을 보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교육에 대해서만큼은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수한 시설에서, 우수한 선생님들이, 우수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수준 높은 양질의 교육을 시키는 학교에는 멀리서도 유학을 보내겠다는 것이 요사이 신세대 학부모들의 마음입니다.”


이때 김 사무관이 검은색 표지의 두꺼운 서류철을 뒤지더니 서류 한부를 꺼내든다.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목을 연필로 줄을 쳐가면서 읽어 내려갔다.

강서 구청장에게 우리 학교에 문화체육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면서 보낸 바로 그 청원서였다.

“우리 지역에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문화체육회관이 없는 관계로 실내에서 다수의 주민이 참여하는 결혼식이나 각종 문화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맥도리체육대회와 각종 마을축제 등 우리 지역 대부분의 공동행사를 배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고 있지만 다목적 체육관이 없는 관계로 일기 사정에 의해서 행사가 무산되는 등 그 애로사항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하면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 서류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항공소음 주민지원사업비로 체육관을 지어달라는 내용의 이 청원서는 우리 추진위의 명의로 강서 구청장에게 보낸 것이었다.

주민지원사업을 확정해 달라고 사업 시행자에게 보내는 청원서에서는 체육관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순수한 교육 목적의 시설이라고만 쓸 수는 없는 문제였다.

비록 학교 부지 안에 짓더라도 우리 주민들을 위한 시설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 청원서를 들고 와서 지금 김 사무관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것이 여러분들께서 맥도문화체육회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의로 강서 구청장에게 보낸 청원서의 내용입니다.

이 청원서의 그 어디에도 아이들을 위한 교육 목적의 시설이라는 문구가 없습니다.

우리 솔직하게 한번 말해봅시다! 여러분들은 말로는 아이들을 위해서 체육관을 지어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마을 주민들을 위한 시설물을 은근슬쩍 학교 부지에 짓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대목을 보면 확실하게 그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배영초등학교 부지 외에는 맥도 지역 5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문화체육복지 시설로서의 다목적회관을 건립할 수 있는 토지 마련이 어려운 실정이고…'

말을 빙빙 돌리지 마시고 이제는 우리 좀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이 부분이 바로 학교에 체육관을 짓겠다는 여러분들의 의도가 맞지요?”

보기 좋게 한방 먹은 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청원서의 작성자인 내가 직접 해명해야 했다.

“작성자가 바로 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항공소음 주민지원사업비로 진행하는 사업을 확정하기 위한 청원서입니다.

같은 실무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학교에 체육관을 지어주기 위하여 다소의 융통성을 부린 걸 가지고 고지식하게 문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신다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육감님한테 올린 청원서에는 청원자의 명의가 바뀌어 있을 겁니다.

어제 있었던 추진위 이사회에서 추진위의 명칭을 ‘배영초등학교 다목적 강당 건립추진위원회’로 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는 사업시행자인 강서구청으로부터 이 사업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본색을 드러내어도 되겠다 싶어서 본래대로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형식보다는 사업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김 사무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난 여러분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우리를 이용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쯤에서 오늘 회합의 선발투수 격인 김 사무관을 쉬게 하려는 듯 지금까지는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 과장이 끼어들었다.

여전히 가슴에는 양팔을 낀 모습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강서구청에 요구해서 토지를 사 달라고 하십시오.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체육관을 짓겠다고 하면서 교육청 부지에 짓겠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서는 자신들의 논리가 꽤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지 의기양양한 표정의 김 사무관이 회심의 미소까지 지으며 박 과장을 바라봤다.

“확인해 봤더니 주민지원사업비로는 부지 매입은 못하게 돼 있습니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으로 박 과장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구청 자체 예산으로라도 토지 구입을 해달라고 졸라야지?

구청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구청이 관리하는 국유지를 내어 주는 방법도 있을 거고…

제발 애꿎은 우리한테 찾아와서 땅을 내놓으라고 떼쓰지 마시고, 구청에 찾아가서 땅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십시오!

구청에서 해결해 주는 게 맞습니다.”


이때 갑자기 공 회장이 의도적으로 큰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합석해 있던 교육청 직원들이 이제야 자신들이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던자세를 고쳐 앉으며 굳은 표정으로 공 회장을 바라봤다.

“이것 보십시오! 듣자 듣자 하니까 기분이 많이 상하는데, 내가 오늘은 꾹 참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이렇게 말하는 공 회장의 말투에는 비장감이 묻어있었다.

“우리 주민들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이 사업을 한다면 차라리 도로포장이나 배수로 정비나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이 사업을 우리 동문들이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 십 년 전입니다.

우리 모교 출신 선배님 한 분이 본청 시설국장으로 계실 때부터 우리 동문들이 문턱이 닳도록 여기를 방문했었는데 체육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학생 수가 적다는 문제 때문에 안 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때부터 우리 동문들의 숙원 사업은 모교에 번듯한 체육관을 지어주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동문회와 우리 주민들이 의논을 해서 항공소음지원비로 학교에 체육관을 지어주자, 이렇게 합의를 봐서 구청을 설득하고 해서 일을 이 만큼이나 진척시켜 온 거란 말입니다.

교육청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여러분들이 말씀을 그렇게 함부로 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어디 내 말이 틀렸습니까? 틀렸다면 어디가 틀렸는지를 말씀을 한번 해보세요?”


공 회장은 치켜뜬 눈을 쏘아붙이듯이 박 과장에게 고정시킨 뒤 하던 말을 계속했다.

“자, 이제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구청에서는 특약등기가 법률상 강행 규정이기 때문에 무조건 해야 된다고 합니다.

특약등기 없이 기부 채납을 하게 되면 감사 지적 사항이 되기 때문에 실무자들이 문책을 당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육청에서는 무조건 못해준다는 것 아닙니까?

통폐합이 예정된 학교에 특약등기를 조건으로 체육관을 받게 되면 차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이 따르게 된다 뭐 그런 말 아닙니까?

이것을 좀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나중에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으니까 그냥 안 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특약등기라는 골치 아픈 놈을 이참에 빼버리면 어떨까요?”

이 말에 공 회장을 바라보는 시선들에서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지 묻는 듯하다.


“우리 추진위에서 대안을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우리 추진위에서 먼저 체육관을 짓고, 추진위의 명의로 건물 등기를 한 후에,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교육청으로 기부 채납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되면 기관 대 기관이 아닌, 민간에서 기관으로 기부 채납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따라서 특약등기라는 골치 아픈 놈을 빼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 과장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자기 직원들을 옆 테이블로 따로 불러서 즉석회의를 진행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벌써 네 시간 가까이나 논쟁 중이었다.

일행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박 과장이 정리된 입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그 대안이라면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공 회장이 웃으며 말한다.

“과장님! 애매하게 말씀하지 마시고 분명히 말해주십시오!

내일 구청에 들어가서 그쪽과도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교육청의 분명한 답변을 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빈틈없는 공 회장의 다그침에 박 과장이 다시 신중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가능하도록 최대한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대신 이 조건에 대해서만입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약속해 드릴 수 없습니다.”


쌍방은 오늘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핏대를 세워가며, 엉덩이가 배길 정도의 긴 시간을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도 일어날 때는 모두가 웃으며 함께 악수를 나누었고, 박 과장은 복도까지 따라 나와서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이런 것을 두고서 작은 희망의 불씨라고 하는 걸까.

어쨌든 이 불씨하나를 조심스럽게 감 싸들고 교육청의 더 넓은 계단을 내려왔다.

아직 구청의 반응이 걱정되긴 했지만 불씨조차도 없는 절망보다는 작은 불씨라도 있는 희망이 낫다는 생각으로 그나마의 위안을 삼는다.

청사의 마당에서는 제법 매서운 늦가을 바람이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이동시키며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이때 공 회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황 위원의 전화였다.

“공 회장님! 죄송합니다. 오신 줄은 알았지만 중요한 회의를 하던 중이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멀리 서 오셨는데 차도 한 잔 대접 못하고 그냥 돌아가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한 우리가 결례를 한 거죠”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았다. 모처럼만에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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