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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새벽부터 시작된 말벌과의 전쟁

27.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자마자 밤새 안과 밖을 가리고 있던 마당 방향의 안개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려는 일상적인 행위로써 함께 살아가는 자연과 상호 교감하기 위한 기본적인 의식이다.  

아직도 온전하게 어둠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라 마치 흑백사진처럼 창밖의 압도적인 푸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장마도 거진 끝나갈 시점이라 식물들에게는 가장 성장하기 좋은 환경일 테고 그래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다른 모습이다.


무엇에 끌린 듯 반바지와 러닝만 입은 잠자리에서의 차림 그대로 마당 앞 농장을 차례대로 순시하기 시작했다.

어제 적지 않은 비가 내렸지만 어제는 어제고 여름철에는 하루라도 수분 공급을 중단할 수 없는 것이 블루베리라는 작물이기에 잠깐만이라도 스프링클러를 가동해야 한다.

어설픈 겸업 농부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오늘은 다소 일이 많고 귀찮더라도 내일부터는 게을지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게으른 농법이다. 그래서 농장들마다 양수기 실과 그늘 막을 갖춰 놓고 스프링클러나 관주 시설이 완비돼있다.


양수기 실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모든 시설이 작동하는 방식인데 블루베리 하우스에 물을 주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두 개의 콘센트를 차례대로 눌러주면 두 대의 양수기가 동시에 가동된다.

하나는 저수조 통에 담긴 미생물과 액비가 혼합된 보약 물을 스프링클러와 관주 시설로 내어 보내는 역할을 하고 다른 하나는 지하수에서 퍼 올린 물을 저수조에 보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물을 희석시켜가며 보약 물을 살포하니까 아침저녁으로 자주 살포하더라도 모든 작물들이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어느덧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도 하루 종일 햇볕이 쨍쨍거리더라도 목마르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량을 살포한 후 닭장으로 이동했다.


한 여름철의 수분 공급이라면 블루베리 못지않게 닭들도 수시로 챙겨봐야 하기 때문에 닭장으로 연결된 20리터짜리 물통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다가가려다가 멈추어 섰다.

매일 일상적으로 다니는 닭장의 진입 통로가 밤새 어른 키만큼이나 자라 버린 코스모스들로 인하여 진입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코스모스야 여기저기 지천으로 자라고 있어 와이프가 수시로 드나드는 닭장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창고에서 가져온 전지가위로 대여섯 개의 코스모스를 밑동부터 과감하게 칼질하고 닭장 문을 열어서 간식거리로 던져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던지 말벌들이 사방에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미쳐 피할 틈도 없이 오른 팔목에 두 방 왼쪽 다리 무릎에 한 방을 사정없이 쏘이고서야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쏘일 때의 따끔한 감촉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 엉덩이 주사를 맞았을 때의 따끔함 보다도 열 배는 더 따끔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머리를 쏘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삽시간에 쏘인 부위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주변이 두툼하게 붓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하필이면 닭장의 보조 문 바로 위에 설치된 원형 파이프 안에 말벌들이 집을 지었던 것이다.

저것을 저대로 방치한다면 당장 오늘 아침부터라도 와이프는 달걀도 꺼내올 수 없을 것이고 닭의 사료도 줄 수가 없게 된다.

저 불한당 같은 침입자들이 더 이상 큰 집을 짓지 못하도록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상대는 무시무시한 말벌이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 옷부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아직도 곤히 자고 있던 와이프를 깨워서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아무리 말벌이라고 하지만 어마 무시하게 큰 벌집이 아니라면 119에 신고하기도 그렇다. 이런 유의 사소한 일까지 119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우리나라의 소방행정이 마비되고 말 것이라며 119를 부르자는 와이프의 제의를 단숨에 거절한 후 불한당들을 타도할 작전에 돌입했다.

등산화와 장갑 그리고 얼굴을 망사로 가리는 작업 모자까지 썼으니 전쟁을 치를 복장은 제법 갖추어졌다.

제1차 기습작전에 성공한 불한당들은 작은 승리에 도취된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똥침으로 공격 준비를 마치고 적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전쟁을 처음 경험하는 와이프가 어이없게도 말벌을 상대할 무기랍시고 창고에서 양파 담는 그물망을 찾아왔다.

“그걸로 뭘 어쩌라고?”

“이걸로 저 구멍을 막으면 벌을 가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때까지 말벌들이 가만히 있어줄까? 그래서 순순히 잡혀줄까?”

“그럼 어떡하지?”

“에프킬라가 어디에 있었지? 에프킬러를 찾아봐?”


와이프가 신발장 위에서 찾아온 에프킬라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거의 빈 깡통이었고 다른 하나는 용량이 삼분의 일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쩐지 무기의 상태가 부실하게 보였지만 기왕에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지체할 수는 없었다.

오른손에 에프킬러를 장전하고 적진을 향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을 때 와이프가 적의 동향을 살피며 말했다.

“그걸로는 안 되겠어! 말벌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아!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어! 119를 불러야겠는데…”

적진을 살피러 간 정탐 병의 보고였으므로 순간 나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새까맣게 달라붙은 말벌들이 전열을 가다듬으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동안의 단순무식에서 우러나온 만용이 사라지면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무기를 보완하지 않고서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에프 킬라 좀 더 사 가지고 와야겠어!”

“몇 개나 사 올까?”

“한 네다섯 개 정도? 좌우지간 많이 사 가지고 와!”

새벽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마을에 24시 편의점이 들어온 이후로는 큰 어려움 없이 적과 싸울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다. 후방에서 무기를 구하러 간 사이 말벌들과는 잠시 합의되지 않은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덩치가 만만치 않은 거미 한 마리가 멋모르고 원형 파이프 입구로 다가오다가 전투병 말벌들이 새까맣게 진을 치고 있자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사실 난 비록 저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은 처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박멸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공존은 불가능하니 한쪽은 굴복을 해야겠지만 나의 목적은 저들을 퇴각시키는 것이지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다.

합의되지 않은 잠깐의 휴전 시간 동안 스마트폰으로 말벌 퇴치법에 대한 검색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작전 구상에 돌입했다. 드디어 무기를 조달하러 갔던 와이프의 차량이 도착했다.

성능 좋은 최신 무기 네 개와 중고 무기 한 개를 평상 위에 가지런히 세워놓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싸움의 방식을 터득한 진영이 언제나 유리한 법! 난 좌고우면 하지 않고 총알이 빵빵하게 장전된 무기를 왼손과 오른손 쌍으로 든 채 적진을 향해서 다가갔다.


‘나는 너희들을 몰살시키고 싶지 않으니 시간을 줄 때 도망가라!’는 메시지를 확성기로 말하듯이 3미터 전방에서부터 에프킬러를 살포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하나도 아닌 두 개에서 동시에 발사되는 에프킬러의 위력은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핵무기와 같았을 것이다.

처음엔 제법 저항하려는 기세로 버텼지만 왼손 오른손 두 군데에서 발사되는 강력한 핵무기의 위력 앞에 전투병들이 맥없이 쓰러졌고 마침내 벌집 안에 대기 중이던 여왕벌이 빠져나왔다.

난 뒤로 한 발작 물러서며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이미 핵폭탄 공격을 받은 이후라 날지를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계속해서 빠져나오는 잔당들을 향해서 또다시 무지막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후방에서 지켜보던 와이프까지 기세가 올라 자기도 두 개의 에프 킬러를 들고 겁도 없이 공격 대열에 합세했다.

몇몇 마리가 겨우 탈출에 성공하는 한산대첩 수준의 대승리였다.

그런데 한번 오른 와이프의 기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져서 나뒹굴고 있던 말벌들을 돌멩이로 사정없이 내리쳤고 원형 파이프의 입구를 나뭇가지로 완전히 막아버렸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이 났지만 영광의 상처인 퉁퉁 부어오른 팔목과 무릅팍의 상처는 계속된 얼음찜질에도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웬만하면 버텨보려고 했는데 이것 보십시오! 인제는 오른쪽 팔목이 왼쪽보다 두 배는 퉁퉁 부었지 않습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달려왔습니다!"

“말벌한테 쏘여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다음부터는 쏘이자마자 바로 오세요! 재작년에는 쥐한테 손을 물리고서도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오시더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넵!”

 어마 무시한 식성으로 닭장의 사료를 축내던 괘씸한 녀석을 손으로 잡으려다가 왼손을 물린 사건을 지금 원장이 소환하고 있었다. 나이 든 간호조무사는 팔목과 다리에 소독약을 바르면서도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이다.

소독을 마치고 말벌의 똥침보다는 족히 열 배는 덜 아픈 엉덩이 주사를 가볍게 한방 맞고 약국에 들러서 3일 치의 약까지 조제하여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부터는 죽이지 않고 그냥 쫓아내는 방법을 연구해야지, 아침부터 너무 많은 살생을 한 것은 큰 패착이었어!'


난 지구촌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다 같이 고귀하므로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는 와이프가 경기를 일으키며 놀라곤 하는 새끼 뱀이나 무시무시한 똥침으로 내 팔과 무릎을 공격한 말벌도 마찬가지다.


단지 서로가 불편하지 않도록 다소간의 간격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뿐이지 이렇듯 매몰차게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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