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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사람 손이 참 무섭다더니

13.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너무 정신을 집중했던 탓일까?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새벽 두 시 반이다.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잠을 청하여 정확하게 한 시간을 더 자고 세시 반에 기상했다. 논일을 하다가 중간에 화장실이 급하면 곤란하니까 화장실부터 갔다 오고 어제 아들 녀석이 나 먹으라고 사다 준 빵으로 요기를 대신했다.

아무리 바빠도 원두 한잔 없이 빵을 먹을 수는 없는 법! 이 와중에도 베란다 카페에 앉아서 제법 여유롭게 커피까지 한잔했다. 이만하면 속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이제 출발인데 뭔가 한 가지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쿠! 하마터면 시원한 물 한 통과 라디오 챙기는 것을 깜빡할뻔했다.


챙길 것을 챙겨서 결전의 장소인 논에 도착하니 아직도 어두워서 논에 들어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에 돌덩이 같은 비료 덩이를 비료 통에 담아서 고무망치로 잘게 부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웬만큼 시야가 확보되자 어린 모의 땜빵(땜질+빵구) 작업부터 시작할 요량으로 허벅지까지 오는 물신을 신고 논에 들어갔다.

엄두가 나지 않는 스무 판이나 되는 어마 무시한 량의 모판들과 물에 녹아서 사라져 버린 북쪽 편의 휑한 논을 바라보며 맘속으로 중얼거렸다.

‘좋다 내가 이기나? 너희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친구 윤 사장 말대로 깊은 입구 쪽에 심어진 어린모들은 물에 녹아서 거진 전멸 상태였다. 눈짐작으로 대략 훑어봐도 삼분지 일은 다시 심어야 했다.

물신을 신고 걷는 발은 흐느적흐느적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모내기 땜빵 작업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요령이 없어 속도가 늦었지만 하다 보니 조금씩 최선의 방법을 터득해 가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사실 어린 모 땜빵 작업을 오늘 처음 해보는 것은 아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논과 비슷한 형편의 논에서 몇 해 동안 벼농사를 지어왔기 때문에 모내기 후에는 어김없이 땜빵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험자라면 경험자였지만 겨우 작년 한 해를 걸렀다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마치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어설프게 굴었다.


하지만 차차 몸이 기억하는 대로 제법 숙련농의 흉내를 내게 되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당시는 한낮 땡볕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며 작업을 했었고 지금은 온 세상이 조용한 이른 새벽에 작업을 한다는 차이였다.

그런데 실제로 체험을 해보니 그 차이는 엄청난 차이였다. 비슷한 량의 작업이었지만 이틀에 걸쳐서 허우적거리던 고된 중노동을 지금은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었다.  


심심하지 말라고 주머니 속에 넣어둔 라디오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나를 도왔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지금의 내 상황을 어떻게 알았던지 친절하게도 간간히 다섯 시 여섯 시 일곱 시가 되었다고 매시간을 알려준 덕분에 시간대별로 작업의 진행상황을 체크할 수 있었다.

그사이 날은 밝아졌고 인근 공장의 부지런한 직원들이 출근을 서두르는 모습도 보였다.

아직도 여기저기 휑한 구석들이 눈에 띄었지만 모판 스무 개가  어느새 동이 나버렸다.

아쉽지만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뒤돌아봤을 때 사람 손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곱 시 반, 드디어 세 시간 반 만에 논의 겉모습이 달라졌는데 이젠 이웃 농민들이 보더라도 그럭저럭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타는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서 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켠 후 비료를 가득 담은 묵직한 비료 통을 목에다 걸쳤다.

활착에 성공하여 그런대로 상태가 괜찮은 남측의 모들은 그냥 놔두고 상태가 부실한 북쪽의 모들을 위해서 새하얀 요소비료를 한 줌씩 골고루 던져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중기 제초제 세병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논으로 들어갔다. 윤 사장은 두 병만 살포해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기왕이면 한 병을 더 추가하여 빈틈없이 약제를 뿌려주었다.

 

이제는 정말로 끝인가 싶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나의 작품을 감상했을 때 형용하기 힘든 뿌듯함이 몰려왔다.

어설픈 겸업 농부의 입장에서는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했으니 이제 작업을 끝낼 만도 했지만 갑자기 온전한 농부의 마음으로 나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아직도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고 농민의 욕심이랄까?

남쪽 편 논가에서 물기가 없어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던 어린 모판 다섯 개가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서는 이젠 그만해도 된다고 저것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다섯 개의 모판을 들고 북쪽으로 가져와 깊은 물속에 담가놓았다. 혹시 어린 모판이 다시 살아난다면 아직도 덤성덤성 남아있는 아쉬운 장면들을 어떻게 해볼까 하는 마음에서…    

  



본격적인 겸업 농부로 변신한 이후 농사일뿐만 아니라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전에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척척해내는 나 자신에게 놀란다.

20년 가까이 사용 중인 심야보일러는 겨울철 연례행사처럼 여기저기서 엑셀관이 터지기 일쑤인데 요사이는 큰일도 아니라는 듯 몽키와 새 엑셀관 동가리를 가져와서는 태연하게 고쳐낸다.

와이프가 창문과 현관문의 망사라도 교체하고 살자며 노래를 부르길래 망설이지 않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촘촘 망사라는 것을 발견했다.

자잘한 벌레조차도 들어오지 못할 촘촘한 망사를 주문하여 반나절만에 우리 집의 모든 망사창을 교체해 버렸다.


불현듯 마당에 설치된 평상위 처마가 더 길었으면 비도 피하고 햇볕도 충분히 가릴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일주일 내내 머릿속으로 구상에 들어갔다.

구상이 끝나자마자 즉시 행동에 들어갔는데 패널 석장을 사 가지고 와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반나절만에 뚝딱 만들어버렸다.

우선 해머를 이용하여 대추나무 지주대로 사용하고 남아있던 25미리 파이프를 땅속 깊이 박아서 네 개의 기둥부터 만들었다. 용접은 할 줄도 모르니 철과 철을 이어서 고정하는 작업은 철 마감재를 감싼 후 충전기로 피스를 박아서 해결했다.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경험칙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얼랑 뚱땅 건축방식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원칙은 있다.

그것은 매미급의 태풍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건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0년 전 태풍 매미가 우리 마을을 덮쳤을 때의 위력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가급적 최종단계에서는 질긴 농업용 노끈으로 단단하게 고정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의 노동력만으로 여러 채의 농막과 원두막도 며칠 만에 뚝딱 만들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황토로 만든 화덕이라고 말하고 싶다.

5년 전의 어느 날, 난 닭장 옆의 빈 공터를 꽤 오랜 시간 주시하고 있었다.

용감무쌍하게도 아궁이와 화덕을 만들 요량으로 여러 편의 유튜브를 섭렵하면서 머릿속으로 만들었다 무너 뜨리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기를 한 달 만에 우선 아궁이 만들기부터 도전했다. 고물상에서 구해온 드럼통을 절단하여 중심을 잡고 그 주변을 블록과 적벽돌로 둘러싸 모양을 만들었다.

큰 솥을 걸 칠 수 있도록 철근을 엮은 후 조심스럽게 여러 겹의 시멘트를 발라서 단단히 고정시키고 최종적으로는 황토 시멘트로 마무리를 했다.


내내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와이프와 아이들도 생각 이상으로 거를듯한 작품이 만들어졌던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졌다.

오롯이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을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뿌듯함은 곧바로 다음 작품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샘솟게 했다.

여러 편의 화덕 만들기 유튜브중에서도 가장 정석이라고 판단되는 하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그대로 따라 했다.

아궁이에 비해서 화덕은 재료구입 비용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궁이를 만들 때는 채 십만 원도 덜지 않았지만 화덕을 만들 때는 모두 육십만 원 이상이 들었다.


우선 블록으로 허리 높이 정도의 기초단을 쌓았는데 크기는 한 평 가량이었다.

단 아래의 빈 공간에는 장작을 모아두는 공간이었고 평평한 단 위에 본격적으로 나의 작품을 만들 작정이었다.

화덕이 만들어지면 아래의 단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감안하여 기초를 할 때는 철근을 아낌없이 촘촘하게 깔았다.

아궁이를 만들 때는 몇 포 들어가지 않았던 20킬로짜리 황토 시멘트를 처음부터 미리 스무 포를 준비해 놓고 시작했다.


우선 농장 앞 수로에서 퍼온 모래로 봉우리 모양을 만들고 연통을 꽂을 자리를 확보한 후 비닐을 씌우고 그 위를 조심스럽게 황토 시멘트를 발라나갔다.

입구에는 옛날식 아궁이 철문을 달기 위해서 적벽돌을 쌓았고 그 위에 철근을 올린 후 황토 시멘트를 발랐다.

이렇게 꼬박 하루를 말린 후 다음날 다시 굵은 철사를 촘촘하게 둘러친 후에 황토 시멘트로 한 겹을 더 발랐다.


다음날은 유럽에서 수입해 왔다는 화덕용 보온 담요를 꼼꼼하게 빈틈없이 감싸고 또다시 철사를 둘러싼 후 황토 시멘트를 한 겹 더 발랐다.

다음 날은 평소보다도 두 배 이상으로 많은 물을 배합한 황토 시멘트를 바가지로 퍼서 위에서부터 줄줄 흐르게 했다.

그러자 볼품없던 겉표면이 매끈하게 변하면서 제법 그럴듯하게 미장을 한 듯이 보였다.


그다음 날 드디어 모래를 퍼내고 비닐까지 걷어낸 후 입구에 아궁이 철문까지 설치하자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다.

준비했던 스무 포의 황토 시멘트를 모두 발랐으니 화덕의 두께가 무려 한 뼘이 더 될 정도로 엄청 두꺼웠다.

완성된 작품을 바라볼 때의 그 감개무량함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하게 벅차오른다.


혹시 몰라서 3일을 더 말린 후에야 우리 가족의 첫 화덕요리 시식회를 가졌다.

화덕 안에 잔뜩 밀어 넣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핀 후 사십여분이 지났을 때 강렬한 장작불이 숯불로 변하여 안정을 찾아갔다. 이때를 기다려 두툼하게 쓴 돼지고기 목살 덩어리를 철망 위에 올렸다.

십 분 간격으로 뒤집기를 반복하여 기름기가 짝 빠진 목살 덩이가 한눈에도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을 즈음 조심스럽게 꺼내어 당당한 표정으로 와이프에게 전달했다.


첫 시식회 때 우리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화덕을 만든 예술가로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명절날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날엔 가끔씩 화덕에 불을 지핀다. 우리 가족의 경험칙에 의하면 닭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요리로는 기름기를 쫙 빼낸 화덕요리가 최고다.

은은한 잔불로 구워내는 2부 순서인 피자랑 군고구마도 기가 막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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