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도강 Aug 29. 2022

드디어 50회 연재 날이다

12.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오늘 새벽에도 무사히 눈을 떠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이런 감정은 얼마 전 송해 아저씨가 밤새 안녕이라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탓이 컸을 것이다.

나이 들어서 저렇게 집에서 편히 잠자다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겠는가!

언제부턴가 나의 마지막 로망은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다가 나도 모르게 밤새 안녕하는 것이다.


지난달 20년째 연례행사인 종합 건강진단을 받았다. 마지막 순서로 수면내시경을 받기 위하여 침대 위에 누웠다. 대장까지 한꺼번에 검사를 하려니 누운 자세가 묘했지만 익숙한 마지막 멘트가 들렸다.

“약물 들어갑니다, 하나 둘 셋”

간호사의 이 말과 함께 난 20년째 똑같은 임사체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는다면? 깨어날 수 있을까?를 염려하지만 막상 의식을 잃은 후에는 그냥 내가 사라졌고 한참 후 꿈조차 없던 잠에서 깨어났을 땐 ‘아 또 살았구나!’를 맘속으로 중얼거린다.


잠시 잠깐이었지만 죽어보니 나라고 하는 자아가 사라졌을 뿐 아무것도 없는 그냥 無였다. 죽음이 실제로 이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은 현대 과학을 신뢰하는 물리주의자를 자처한 이후부터다.

벌써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꽤 오래전의 일이다. 대학생 시절 규태와 난 ‘동학사상연구회’라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목적은 우리 민족의 민중 사상을 바탕으로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서구의 민중 사상은 우리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것 같아서 왠지 불편하기만 했으니까…

이때 함께한 후배들 중에는 준현이도 있었고 경은이 정득이도 있었다. 모두 공모전 내 글 속에서 꽤 비중 있는 배역들을 맡고 있지만 지금 이들은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커다.

내가 직접 말하기는 쑥스럽고 지나가는 말로라도 규태가 입소문을 좀 내어주어야 하는데 그놈의 주식 때문에 엉망이 돼 버렸다. 그러기에 애당초 뉴튼의 말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동학을 접한 이후로 희미하게나마 내 맘속에 남아있던 죽은 자의 혼령이라던가 하는 비과학적인 요소들을 이겨내는 면역세포가 만들어졌다.

해월 선생의 향아설위 사상이 내 머리통을 망치로 내려쳤을 때 그때의 각성은 이후 나의 인생을 지배하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조상님은 존경의 대상이지 제사의 대상은 아니다. 마음은 뇌라는 육체의 작용 현상일 뿐 별개로 존재하는 혼령이 아니므로 내 몸이 사라지면 당연히 함께 사라지는 것!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님은 우주에 만연하는 기운을 굳이 ''자를 붙여서 신령 기운으로 상시켰다. 하지만 인간들의 귓속말에 반응하는 인격신이 아니었기에 복을 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아인슈타인이 인격신을 부정하면서도 무궁한 우주를 경외의 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은 지구보다도 큰 태양계,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큰 우리 은하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광대한 대우주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이러할진대 고작 지구에 사는 인간들의 복이나 구하는 인격신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동학사상에 우리들의 이십 대는 깊이 빠져들었고 이후 당당한 물리주의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 쉽게 말하면 그냥 현대 과학을 신뢰하면서 잘살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삶은 실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나에게 제사 차림의 권한이 주어졌을 때 난 과감하게 제사상의 밥그릇 위치를 조상님의 혼령이 계신다는 벽에서부터 후손들이 있는 우리 쪽으로 가지고 왔다.

몇 해를 그렇게 하다가 그 또한 무상한 행위임을 깨닫게 되자 우리 아이들의 마인드에 어울리는 형식으로 다시 전환되었다.

순전히 살아있는 우리 후손들의 식성에 맞는 차례상을 차려놓고 밥 먹기 전에 잠시 묵념하는 것으로 차례상의 개혁을 시도했다.


물론 나름 묵념사도 있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조상님들의 은덕에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그리곤 곧바로 즐거운 식사시간이다.

그래서 동학에서는 인내천! 곧 사람이 한울님이라고 가르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사상인가 말이다.     




새벽 네시, 약통을 짊어지고 장마가 오기 전에 마지막 제초제 살포 작업에 나섰다. 목적지는 어제 미처 끝내지 못한 대추농장이다. 두 시간 반 만에 약통 세 통을 다 비우고서야 마무리되었다.


아침 출근 전 베란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마트폰으로 오랜만에 공모전 사이트를 열어봤다.

아뿔싸 아직도 열명남짓! 오늘이 50회니까 딱 절반을 지내왔는데도 이 모양이라면 와이프의 말대로 이제는 정말로 기대를 접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새 방금 내린 커피잔을 들고 와이프가 다가왔다.

“일본에 사는 친구하고 서울 사는 친구가 이번 주말에 우리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데 그래도 돼지? 1박 2일로!”

“알아서 하시오! 대신 날 엮을 생각은 말고”

“그러면 안 되는데, 토욜 저녁에는 고기도 좀 구워주고 일욜에는 낚시도 하고 보트도 태워주기로 했는데?”

와이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면서 하는 말이다.

“그냥 좀 해주지?”

이 한마디가 날 단번에 굴복시키고 말았다.

“거참! 대게 귀찮게 하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고기 구워라면 구워야 하고 배 띄워라 하면 뛰워야지.

그나마 오십하고도 후반에 들어서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인생살이의 진리를 깨쳤으니 그래도 너무 늦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윤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당신 논에 와있는데 북쪽 깊은 쪽으로는 천상 새로 심어야 되겠네! 전체로 보면 한 삼분지 일은 손을 다시 봐야 되겠다, 기왕 하는 거 중기 제초제도 두어 병 뿌려주고 요소는 반포만 흩여도 되겠네, 남들 보기도 그렇고 하니까 고생 좀 하는 게 맞겠소!

여분으로 물에 담가놓은 모판이 대충 스무 개 정도 될 것 같으니까 이것만 다 심어도 얼추 해결될 것 같은데 앞으로 고생하시오!"

원기 날씨를 확인해 보니 낼 밤부터는 본격적으로 장맛비가 예상된다고 하니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우와 끔찍하다! 대체 스무 개의 모판을 무슨 수로 심는단 말인가?


점심을 대충 먹은 후 와이프에게 사무실을 인계하고 집에 도착하니 기다리던 장판이 도착해 있었다.

두께 2.2미리에 길이가 11미터에 이르는 모노륨 장판의 무개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끙끙거리며 데코타일이 깔려있던 기존의 베란다 위에다가 그대로 장판을 깔았다.

벌써 십 년은 지난 것 같은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이것저것을 다한다는 자칭 만능 설비업자에게 맡겼던 공사의 대가는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나타났다.

깔려있던 데코타일의 공사가 애당초 부실공사였던지 슬금슬금 뜨기 시작하자 내 딴에 생각해 냈던 것이 비슷한 색깔의 시트지를 그 위에 바르는 것이었다.

이젠 뭐 거의 시트지로 도배를 했을 정도로 더덕더덕하여 보기에도 흉물스러웠다.


지난 주말 지킬 앤 하이드 때문에 집을 다녀간 딸의 추상같은 명령이 있었다. ‘제발 지저분한 베란다 바닥이라도 좀 어떻게 해보라고?’

누구의 명령이라고 지체한단 말인가. 즉시 장판을 주문했고 유튜브로 셀프 모노륨 장판 시공하기도 열공했다.

문제는 모노륨 장판의 경우 폭이 1.8미터로 고정돼 있다는 것이고 우리 집 베란다의 폭은 1.95미터라는 사실이다.

고수들만 한다는 그 어려운 장판 이어서 붙이기를 고민하고 있었을 때 아들의 경승용차 레이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써니와 검은색 들고양이 간의 결투 사건 이후 자칭 동물애호가인 아들의 마음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린 아들 녀석이 내게 인사를 하자마자 곧장 써니에게로 달려갔다.

OK목장의 결투 사건 이후 우리 부부는 써니를 본척만척 견사 우리에만 가두어두고 있었지만 아들 녀석이 다가오자 꼬리를 흔들어댄다고 난리도 아니다.


아들이 도와준 덕분에 어렵사리 유튜브의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아들은 내가 기술자라도 되는냥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장판 시공에 부쩍 관심을 드러냈다.

대학에서 태권도를 전공하고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몇 해 동안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다 최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던 차였다. 우리 아들은 소박하게도 일한 만큼 벌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월 이백만 원도 안 되는 열정 페이를 강요받으며 아이들 통근차 운행까지 온갖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난 그냥 지켜만 보기로 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태권도 사범이라는 직업으로는 미래를 계획할 수가 없어 입주 청소하던가 도배장판 헬스 트레이너까지 두루두루 알아보는 모양이다. 열심히 살려고 하는 그 태도가 가상하여 난 조용히 아들을 응원하고 있는 중인데 어쨌든 지금은 나의 보조로서 거뜬히 한몫을 해내고 있다.


남는 장판으로 평상 위까지 리모델링을 하고 나니 안팎으로 집안의 분위기가 한층 깔끔해졌다.

부엌에서 물 한잔을 마시고 왔을 때 아들에 의해서 베란다 카페의 세팅이 말끔히 완료되어 있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그동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미뤄두었던 대사를 완성하고 나니 마음 한편이 뿌듯해진다.

그 사이에 와이프가 퇴근하여 쓱 한번 쳐다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듯이 별 말이 없다.


아들이 그전부터 블루베리 수확할 때 꼭 불러달라고 했었는데 사전에 그렇게 약속이 되었던지 와이프와 함께 블루베리 농장으로 이동하여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들이 작은 물통 가득 블루베리를 수확하여 왔는데 레이 트렁크에 실으면서 기분이 좋은지 내내 싱글벙걸이다.


난 전지가위를 쥐어주면서 아들에게 오이며 애호박이며 마음껏 필요한 만큼 따가라고 하자 너무너무 좋아한다.

많이 서툴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가 농사일을 하는 것은 이런 맛을 향유하기 위해서다. 아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어설픈 겸업 농부는 내일 새벽 치러야 하는 대사를 위해서 꼼꼼하게 장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요소 한포와 비료를 담을 통 그리고 중기 제초제 세병과 물신, 아뿔싸! 오래된 비료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어 잘게 부술 고무망치! 또 뭐더라? 장갑 두 켤레…     
        

매거진의 이전글 지킬 앤 하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