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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지킬 앤 하이드

11.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형제들 간의 위계질서를 확실히 구축해 주었다. 그 결과 지금도 맏이인 딸아이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고 하면 밑의 두 남동생들은 거의 자동으로 OK다.

어버이날 선물로 저들 간에 각출하여 장당 13만 원짜리 뮤지컬 티켓을 끊어주었는데 그 공연일자가 바로 어제였다.

와이프 입장에서는 암만 생각해 봐도 내가 뮤지컬과는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던지 딸의 티켓을 추가로 구매해 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딸과 함께 셋이서 공연장이 있는 문현동 국제금융센터로 향했다.


어마 무시하게 꽉 들어찬 관객들을 바라보니 코로나로 인한 두려움 따위는 진즉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쨌든 생판 처음 뮤지컬이란 것을 보게 되었는데 웬걸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음부터 몰려왔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와이프의 예언이 적중했던 것이다. 대기시간 카페에서 차 마실 때까지는 멀쩡하다가 13만 원짜리 뮤지컬을 보러 와서 쏟아지는 졸음이라니?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나름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다. 어젯밤 그동안 맞추어져 있던 신체적 리듬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열 시경까지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모처럼 아이들이 찾아왔던 연유로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훌쩍 열 시를 넘겨서야 침대에 눕기는 누웠는데 갑자기 마당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동이 발생하는 바람에 또다시 거실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낼 뮤지컬에 동행하기로 한 딸아이 말고도 자칭 동물애호가인 큰 아들도 왔었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마당 원두막에서 써니(믹스 진돗개)와 함께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견사 우리에서 써니를 꺼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목줄을 하라는 딸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아들 녀석이 그냥 데리고 나오는 객기를 부린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야밤에 우리 집을 영역으로 살아가는 들고양이를 발견하자마자 써니가 사정없이 달려들었고, 두 견원지간의 피 터지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평소에는 한없이 얌전하고 착한 강아지지만 밤중이라 그런지 갑자기 늑대의 본성이 드러났던 것이다.


들고양이도 생존본능으로 죽기 살기로 싸웠던 모양이다. 써니의 왼쪽 눈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는데 그쯤 됐으면 들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차갑게 얼어붙은 아들 녀석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축 늘어진 들고양이를 바라보던 그 황망한 표정을?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죽은 동물을 땅에 묻어주면서 자책하던 그 표정을?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하여 문제는 내가 잠잘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고, 지금 13만 원짜리 뮤지컬을 보러 와서는 산간벽지 촌에서 올라온 영감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사실이다.

와이프가 잠을 깨워주기 위해서 목 부위를 집중적으로 눌러주었지만 그마저도 공연이 시작되자 끝이 났다.

웃고 손뼉 치기에 바빴지 문화 수준이 안 맞는 사람이야 자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다는 듯 객석의 열광적인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꾸벅꾸벅 존다고 하여 무조건 정신줄을 놓친 건 아니다.

돈이 얼마 짜린데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버틴 덕분에 멍한 상태의 얼굴로도 볼 것은 다 봤고 들을 것은 다 들었다.

일종의 선잠을 잤던 것인데 공연을 모두 마치고 가장 아쉬웠던 것은 지킬 앤 하이드의 대표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그 노랫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을 때 아뿔싸! 그때만이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지금 이 순간∼’


13만 원짜리 뮤지컬 중에서 8만 원어치는 꾸벅꾸벅 존다고 다 날려버리고 겨우 5만 원어치만 보고 왔다며 딸과 와이프가 핀잔을 준 하루였지만 시곗바늘이 열 시를 향해서 다가가자 어김없이 또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어젯밤 써니와 들고양이가 벌인 OK목장의 결투 때문에 자지 못한 몫까지 푹 자고 일어나니 새벽 네시.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스마트폰의 원기 날씨다.

‘바람도 없고 비도 안 오고 오늘도 풀약 치기 딱 좋은 날씨네’

간단히 물 한 컵으로 새벽 요기를 대신하고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마지막 한 필지의 대추농장으로 향했다.

인근의 농민들이 하나둘 너도나도 약통을 짊어지고 논으로 밭으로 향하고 있다. 역시 새벽시간은 참 열심히 사는 농부들의 세상이다.


두어 시간 만에 20리터 말통을 세 통이나 비운 후에야 오늘 분량의 제초제 살포작업이 마무리되었다.

6월 중순 한창 블루베리가 익어갈 땐 충분한 량의 수분 공급은 필수사항이다. 어제 저수조에 혼합해 놓은 미생물과 액비가 알맞게 잘 녹아들었던지 물 색깔이 먹물처럼 새까맣게 잘 변색되었다.

스프링클러는 해뜨기 전의 새벽이나 해가 저문 저녁 무렵에 돌려야 하는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잘 몰라 대추농장의 어린 묘목들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중순에 식재한 어린 묘목들이 봄이 되어 새싹이 피어났을 때 여름철 뙤약볕이 내리쫴는 한낮에 몇 날 며칠 동안 스프링클러를 돌린 적이 있었다.

농장 옆의 길가를 따라서 인근의 농민이 심은 콩들에도 한참 새싹이 올라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린 대추나무의 새싹들이 말라가고 있어 수분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여 더 열심히 스프링클러를 돌리고 있던 차였다.

콩을 심었던 농민이 다가와 우리 농장의 어린 대추들을 보더니 자신의 콩도 똑같이 잎이 말라가고 있다며 영문을 모르겠다고 하기에 난 가물어서 그런 것 같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뒤에 진짜베기 과수원 농가를 방문하여 알아보니 여름철 한낮에 돌린 스프링클러가 문제였다.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분사될 때 콩잎의 새싹까지 적셨던 모양인데 어린 새싹의 입장에서는 한증막처럼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고문을 받으며 타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린잎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 사건 이후 새벽이나 늦은 저녁 시간대로 스프링클러의 가동시간을 변경했더니 콩잎까지 또다시 새싹이 돋아나 생명의 신비를 목격하게 되었다.

비록 출발은 어설픈 겸업 농부로 시작했지만 하나둘 배워가면서 어느덧 진짜 농민들과도 어울리면서 그들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진짜배 전업 농민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현상이다.

아직은 많이 서툴지만 그래도 열심히 농사지으려는 그 마음을 가상히 여겨서 같은 동료로 받아준다는 의미였으므로…



농지에 투자한다는 것은 십 년이란 긴 시간 동안 단순히 보유만 해도 되는 주식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투기과열지역이나 조정대상지역에서 2년 이상 거주만 해도 되는 주택과도 또 그 차원이 다르다.

헌법에서조차 비자경자의 농지 보유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최소 십 년 이상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전업 농민들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제야 투기가 아닌 정당한 투자로 인정해 주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수들만 시도한다는 그 어려운 적합 겸업 농부 생활을 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나 자신이 즐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최근에 난 그렇게도 열심히 다니던 산행도 뜸할 정도로 하루 중 절반의 시간뿐만 아니라 주말을 온통 농사일에 투입하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농사일과 운동은 다르다고 하지만, 그 또한 생각하기 나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고된 노동일이 되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오롯이 운동이 된다.

매일매일 농사일을 하다 보면,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운동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모든 근육을 골고루 사용하지 않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침저녁으로 매 3회씩 반복하는 맨손체조로도 웬만큼 보충이 된다.


지금 나의 체중이 72∼73킬로를 유지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선후배들은 이전보다도 훨씬 건강해졌다며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다.

이 모든 것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만 할 수 있는 농사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농사일은 훌륭한 운동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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