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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자이언트 해바라기가 살아났다

20.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오늘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원기 날씨부터 확인하고 거실의 창을 열어젖혔다. 장마기간에는 여차하는 순간 잡초들이 순식간에 커 버리기 때문에 비가 없는 날이면 예외 없이 약통을 들쳐 매고 출동해야 한다.

머릿속은 온통 발목이 부러져버린 자이언트 해바라기 생각뿐이었다.


며칠 동안 저녁마다 해바라기가 심어진 라인을 중점적으로 미생물과 액비를 혼합한 보약 물을 살포해주는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발목이 꺾여버린 해바라기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까지 자세히 바라보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해서 차마 자세히 바라볼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안 보려야 안 봐지는 것도 아니다.

축 늘어진 잎사귀들이 차츰차츰 말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삼일 째부터는 정말로 보지 않았고 혹시 살아나거든 애기해 달라고 와이프에게 당부를 해두었지만 지금까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초토화된 우크라이나군의 진영처럼 밤새 불어닥친 강풍의 상흔이 지나간 지도 오늘로 5일째다. 왠지 오늘 아침에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중에 해가 떴을 때 차근히 확인해보기로 하고 우선은 최근 잡초와의 전쟁에서 꽤 승률이 좋았던 새벽 기습작전부터 전개하기로 했다.


오늘의 작전지역은 강변 농장이다. 강변을 따라서 길게 조성된 왕대추 농장 중 좌편과 우편의 농장은 최근 일 년 사이에 모두 매각된 상태다.

그래서 낚시터가 있는 중간 농장만 관리하면 되었지만 매정하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초제를 살포한다는 것은 농사일 중에서도 고난도의 작업이라 할 수 있어 초짜 농부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실은 나 자신도 아직 초짜 딱지를 떼지 못했지만 그래도 좌우의 신입 농부들에 비해서는 꽤 경험자에 속했던 터라 이런저런 자문에 응해주는 처지였다.

백여 미터의 길을 따라서 설치된 울타리 사이로 약효를 배가시키는 전착제까지 혼합한 독한 제초제를 꼼꼼하게 살포했다.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공장으로 출입하는 차량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라 신경을 써서 잡초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온갖 종류의 비난들이 나에게 집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름 위험구역으로 분류해놓고 수시로 제초제를 살포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잡초관리에 신경을 좀 써달라는 마을 통장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이쪽으로는 잡초가 머리를 쳐들 새도 없도록 관리한 탓에 그야말로 반들반들한 지경이다. 농장 안은 그래도 제초매트가 깔려있어 잡초가 전면적으로 치고 올라오지는 못한다. 그럼에 여기저기서 게릴라 작전하듯이 침투해 들어와 빠른 속도로 번지기 때문에 자주 들여다보고 제초제를 살포하지 않으면 금세 엉망이 돼버린다.


제초제를 살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하게 커버린다면 어쩔 수 없이 예초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고생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새벽녘에 약통을 짊어지고 사부작사부작 부지런을 떠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는 것을 깨쳤으니 겸업 농부로 살아가는 동안은 다른 대안이 없을 듯하다.


오늘도 만족스러운 잡초 박멸 새벽작전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양수기실로 향했다. 새까맣게 변색돼버린 저수조의 보약 물을 살포하기 위해서 해바라기 라인으로 설치된 스프링클러를 가동했다.

하우스 파이프의 천장에 매달린 농수관을 통해서 보약 물들이 시원하게 쏟아지자 거대한 자이언트 해바라기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듯 초록 잎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잠시 후 문제의 그 자이언트 해바라기를 향해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어라! 어느새 머리 부위에서 노란 꽃이 피고 있었고 목 부위에는 작은 잎들이 새로 돋아나 새파랗게 생기가 넘쳐났다.

밑동이 부려졌지만 간신히 1/3은 붙어있었기에 새로 교체한 탄탄한 지주대에 부목을 하듯 줄로 감싸 단단히 고정했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수북이 보드라운 흙을 쌓아 두고 매일매일 보약 물까지 살포하는 지극정성에 감응했던 것일까?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잎들이 말라 있었지만 아니 정확하게는 딱 절반은 말랐지만 더 이상은 마르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의 잎들은 사력을 다해서 푸르름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목 부위에 난 작은 잎들로 인하여 해바라기의 얼굴에 작으나마 노란 꽃이 피기 시작했다. 밑동이 부러져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우크라이나산 자이언트 해바라기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마당에서 빨래를 늘고 있던 와이프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해바라기가 살아났어! 어서 와서 보라고! 밑동이 부러졌던 자이언트 해바라기가 다시 살아났어!”

내심 와이프도 바람에 꺾여버렸던 해바라기가 다시 살아나기를 학수고대했던 모양이다.

빨래를 널다 말고 한걸음에 달려와 감동적인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3미터에 이르는 큰 키 위로 목을 내어 밀고 오직 살기 위해서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작은 얼굴이 애처로우면서도 가상하기만 하다.


4월 초 스물네 개의 우크라이나산 자이언트 해바라기 씨를 구입하여 육묘 장에서 파종하여 모종으로 키웠다.

그런데 이렇듯 단 한 녀석도 예외 없이 모두 건강하게 자랐으니 이 뿌듯한 마음을 형용할 수가 없었다.

와이프가 건강하게 살아난 해바라기의 사진을 찍어서 가족 카톡방에 올리니 잠시 뒤 딸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나 주말에 집에 갈 거야’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항상 깨끗한 바닥이지만 그래도 잔뜩 물을 묻힌 밀대를 들고 구석구석 바닥청소를 진행한다.

평소에도 출입자가 많지 않아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지만 굳이 매일매일 빼먹는 일이 없다.

코로나 이후 추가된 항목이 하나 더 생겼다. 소형 분무기로 출입문의 문고리부터 소독제를 살포하여 마른 헝겊으로 다시 닦는 일이다. 화장실의 문고리도 마찬가지. 그다음은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살포하는데 분무기에서 흩어지는 소독약의 효과를 본 이후부터는 빠짐없이 시행하고 있다.


한 곳에서 이십 년 넘게 터를 잡고 사무실을 운영하다 보니 커피포트가 있는 탁상 주변으로 개미가 끝도 없이 몰려들었고 주방에는 바퀴벌레도 장난이 아니었다.

개미 약도 설치해보고 바퀴벌레 약을 매달 구입할 정도로 열심히 살포했지만 효과는 그때뿐 박멸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매일 아침 소독약을 뿌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개미와 바퀴벌레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이후 소독약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게 되면서 나의 청소 항목에 정식으로 추가된 것이다.


청소를 마친 후 마시는 커피 한잔은 단순히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되는 그런 가벼운 행위가 아니다.

반드시 마셔야만 되는 경건한 의식 같은 것이기에 커피를 만드는 과정도 좀 복잡하다.

원두는 베란다 카페에서 이미 마시고 왔으니 지금부터는 무카페인으로 가야 된다.

여러 잔을 마셔야 되는 사무실의 특성상 위장을 보호하기 위한 나만의 특별 전략이다.


이제는 각종 성인병을 걱정할 나이도 되었으니 기왕이면 칼슘이 풍부한 우유를 1/3 가량 섞은 후 전자레인지에서 1분가량을 돌린다.

그런 다음 끓인 물을 적당량 부으면 제법 에스프레소 흉내를 내는 비주얼로 변신하게 된다.

많게는 하루 일곱 여덟 잔을 마시다 보니 카페인이 있는 일반 커피를 마신다면 위장이 견뎌 날수가 없었겠지만 신통방통하게도 무카페인은 부담이 없었다.


자칭 에스프레소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 때 와이프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 지금 나 논에 와서 아저씨를 만나고 있는데 아저씨가 하실 말씀이 계시 다네, 바꿔줄 테니까 받아봐요?”

“동생 논에 와서 자세히 보니까 내 짐작이 맞았네!

북쪽에 난 배수로 구멍이 너무 커서 물을 뺄 때마다 흙이 어마 무시하게 실려 나갔던 거라,

수로에 쌓여있는 흙이 전부 동생 논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데 배수로를 작게 해서 흙이 못 빠져나오게 해야겠다,

내가 배수로 구멍을 작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앞으로 배수로는 더 이상 손을 안 되는 게 좋겠네!

논의 물을 밤새 서서히 빠지게 만들었어야지 이런 식으로 급하게 빼게 되면 흙이 다 실려 가서 모들이 제대로 활착을 할 수 있었겠나 말이다!”

“잘 몰랐습니다, 매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님!”

“동생은 이전에도 벼농사경험이 있었다 아이가! 이런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그래도 새로 심은 모들까지는 내가 책임지고 살려줄 테니까 한번 해봐라! 하다 보면 재미가 있는 기라”

“예 행님!”


사실 농사 중에서도 벼농사가 차지하는 경제적인 비중은 형편없이 낮은 편이다. 900평 한 필지를 기준했을 때 이것저것 농업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순수하게 내 손에 떨어지는 이익이 백만 원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배기 전업 농민들은 시설하우스 재배시기인 겨울철에 한 해 농사의 승부수를 띄우게 된다.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반년 동안 부지런히 일한 논의 입장에서는 일종에 휴식을 취하면서 보약을 먹는 시기가 여름철 벼농사 시기다.

그래서 몇 달 동안 논에 물을 가두어서 벼를 키우는 행위는 흙을 살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 된다.


옛날부터 벼농사를 대하는 우리 농민들의 마음은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다 함께 풍년을 소망하는 그 넓은 마음속으로 녹아들 수가 있다면  나 또한 그들이 인정하는 진짜배기 농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작은 얼치기 겸업 농부였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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