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출발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안개 천지에 둘러싸여서 십여 미터의 전방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상윤 대장은 어제 지나온 작은 숲길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조선소년단 시절부터 백두산 종주 행사라면 빠짐없이 참가했었는데 그때 배운 습관들이 아직도 몸에 뵈어 있었다.
상윤은 어제 이 길을 지나올 때 백두산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처럼 그 자신만의 표식을 남기면서 지나왔다.
군데군데 나뭇가지를 꺾어 표식을 남기기도 했고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상윤 대장의 마음은 다급했다.
오늘 점심 안으로 삼지연못가역 텐트촌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급한 마음에 두어 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산행을 강행했던 탓에 뒤따르던 세 여자들의 체력이 한계치에 이르고 말았다.
턱까지 차오른 거친 숨소리가 마침내 상윤을 뒤 돌아보게 했다.
경은과 진숙이 앞에서 뒤에서 은하를 당기고 밀면서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두 남자가 이 감동적인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머쓱한 표정이 되어서 쉴 자리를 찾아보았다.
주변을 서성이던 규태가 마침 볕이 잘 드는 너럭바위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은하의 자리부터 챙기던 경은이 자신의 배낭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호텔 식당에서부터 챙겨 온 샌드위치와 커피다.
“이모님은 오늘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
다 식어버렸지만 이거라도 드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그러자 규태도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배낭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간식용으로 잔뜩 준비해 왔던 육포덩이와 미처 먹을 새가 없었던 도시락까지 꺼냈다.
규태가 킁킁대면서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다행히 도시락의 상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한 모금 시식까지 해보고는 히죽거리면서 하는 말이다.
“묵을만하네! 다들 도시락 꺼내서 묵으면 되겠다,
금강산이나 백두산이나 식후경은 매한가지 아니겠나? 앉은 김에 밥이나 묵고 가자”
아니나 다를까. 여태 새벽에 먹은 샌드위치 하나로 백두산을 강행군하고 있었으니 체력이 바닥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차갑게 얼어버린 도시락이었지만 북한당국이 정성스럽게 장만해 준 도시락은 백두산산행에 특화된 고열량의 도시락이었다.
몇 젓가락을 먹자마자 벌써부터 열기가 올라오면서 삽시간에 게 눈 감추듯 깨끗이 비워버렸다.
간식으로 육포까지 한 입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저 밑에서부터 킁킁거리는 산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상윤이 주의를 집중하면서 귀를 쫑긋거리더니 작은 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백두산 멧돼지들이야!
냄새를 맡고 몰려왔던 모양인데 빨리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갔어!”
이 다급한 와중에도 규태의 번쩍이는 재치는 진가를 발휘했다.
“육포! 육포 한 덩이를 먹이로 주고 가면 시간을 벌 수 있지 않겠나,
한 덩어리만 남겨두고 가보자!”
겨울철에 배고픈 멧돼지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행동은 다반사로 발생했지만 다행히 규태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한 무리의 멧돼지 가족들은 규태가 남겨둔 육포 한 덩이를 서로 먹겠다며 저들끼리 박 터지게 싸웠다.
그 덕분에 미니 탐험대는 식탐 많은 멧돼지 무리들을 따돌리고 힘든 줄도 모르고 한참을 올라왔다.
상윤이 또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제10호 경계비를 발견한 것인데 모두는 더욱 긴장하면서 위로 올라갔다.
어제처럼 중국 국경수비대를 또다시 만날 수도 있어 숨소리조차 억제하면서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다행히 10호와 9호 경계비를 지날 때까지도 중국 국경수비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사에 경계심을 내려놓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 문제였다.
토문강의 물길 흔적이 보이자 마치 반가운 고향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냥 긴장된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꼼짝 마! 손들어!
손 안 들면 쏜다! 모두 손들어!”
중국 국경수비대 군인 세 명이 바위틈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상윤이 침착하게 손을 들면서 일어서자 나머지 일행들도 두 손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진숙이 앞으로 나가면서 상윤의 말을 중국 군인들에게 통역했다.
“오해 마시오! 우리는 조선사람들인데 장군봉을 올랐다가 잠시 길을 잃었소,
길을 잃은 선량한 인민들이니 우릴 그냥 보내주시오!”
이때 총구를 겨누던 두 병사들 뒤에서 이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상사계급장을 단 자가 앞으로 나섰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시끄럽다! 우리의 국경을 침범했으니 월경죄로 체포하겠다!
반항하면 발사할 테니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상윤 대장이 일행들에게 그렇게 하자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모두는 두 손을 든 채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이때 의무병사 한 명이 일행들 앞으로 다가와 잔뜩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양손을 뒤로하라고 소리쳤다.
케이블타이를 꺼내 들고 한 명씩 양손 뒤로 결박할 땐 마치 포로를 결박할 때의 우쭐한 표정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백두산정계비가 보일 텐데 여기서 다시 중국으로 잡혀간다고 생각하니 모두는 억장이 무너졌다.
특히 은하의 허탈감은 극한의 스트레스로 몰려왔다.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경은과 진숙이 급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은하에게 다가가려고 동동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기적이 찾아왔다.
위쪽 백두산정계비 방향으로부터 바스락바스락하는 발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래쪽을 향해서 겨누어지던 총부리들이 보였다.
눈앞에서 갑자기 정의의 우리 편이 떡하니 나타났다.
하나 둘 아니 수십 개의 총부리들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중국 군인들을 위협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꼼짝 마! 물러서지 않으면 발사한다!
여기는 조선 령이다,
제9호 경계비 밑으로 물러서지 않으면 발사하겠다! 물러서라!”
어제 남북대학생탐험대를 씩씩하게 맞이했던 바로 그 백두산부대 병사들이었다.
총부리를 겨누면서 수십 명의 북한군 병사들이 한 발 한 발 우리 쪽을 향해서 다가왔다.
당황한 중국 군인들이 뒷걸음질을 치면서 9호 경계비 뒤로 물러나자 그제야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행히 은하도 차츰 혈색이 되돌아오면서 정신을 회복했다.
진숙과 경은이 급한 대로 자신들의 머리를 이용하여 은하의 몸 여기저기를 긴급하게 마사지한 효력이었다.
미니탐험대가 1442 계단 옆의 샛길을 출발한 지 네 시간 만인 오후 두 시를 넘겨서야 드디어 북한 땅으로 무사 귀환했다.
잠시 후 진짜 흑곰처럼 생긴 백두산부대의 중대장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때 중천에 떠있던 태양빛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 신비한 광채를 만들어 냈다.
중대장이 케이블타이의 절단부터 지시한 뒤 은하와 일행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만면의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 배은하 씨가 맞지요?
몸상태는 어떻습니까? 혈색을 보아하니 일없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상윤동무하고 진숙동무가 맞습니까?
거기 두 동무는 남조선 동무들이고”
상윤이 케이블 타이가 절단된 손을 어루만지면서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맞습니다! 이 분은 배은하 씨가 맞습니다,
우리는 백두산정계비 행사에 참여한 북남의 대학생들입니다”
긴장했던 근육들이 한꺼번에 풀렸던지 일행들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서 서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규태는 아예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백두산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맥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백두산을 뒤덮었던 안개천지는 언제 사라졌던지 모두 물러난 상태였다.
백두산흑곰으로 통하는 이 대위가 일행들 곁으로 다가왔다.
백두산을 호령하는 야생 흑곰답게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매와 까무 짭짭한 얼굴에서 풍기는 강렬한 인상은 간부급 야전 군인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작열했다.
“그렇잖아도 정찰총국의 연락을 받고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동무들이 귀환할 예정이니 정중히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못가역 텐트촌까지 안내할 테니까 우리 차로 갑시다!”
북한당국은 이번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정도로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중 간의 관계가 원만했을 때의 일이고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찰총국의 보고를 받은 정 위원장이 직접 행동에 나섬으로써 이번 사건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이렇게 되자 남북대학생탐험대의 해단식이 정 위원장을 비롯한 노동당 정치국의 상무위원들이 총 출동하는 메머드급 행사로 변질돼 버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미 취재 중이던 조선중앙방송과 KBS는 실시간 생방송체제로 전환되었고 평양시내에 주재 중이던 외신특파원들이 앞을 다퉈 삼지연못가역으로 몰려들었다.
동북공정의 실질적인 최대 피해자이면서도 지금까지 일관되게 침묵했던 것은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려고 했다.
조선중앙방송에서는 동북공정을 규탄하는 특집방송을 긴급 편성했다.
사실 제작은 진즉에 해두었지만 방송으로 내어 보낼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으로 창고에 쌓아둘 수밖에 없었던 울분의 필름들을 모두 끄집어냈다.
억눌렸던 중국에 대한 격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표출되면서 심지어는 땟놈이라는 방송 멘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할 정도로 그 수위는 높았다.
조선중앙방송의 반동북공정 특집 방송은 KBS에서도 동시 방송되면서 중국과 곧 전면전이라도 벌일 기세로 반중국 열기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삼지연못가역 천막촌에서는 벌써 두 시간째 해단식까지 미루면서 천신만고 끝에 백두산을 넘어온 미니탐험대를 기다렸다.
이때 느닷없이 정 위원장 일행이 들이닥치자 남북대학생들이 운집해 있던 천막촌은 이내 열광의 도가니로 돌변하고 말았다.
정 위원장을 향한 북녘학생들의 과도한 환영분위기가 남쪽 학생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차츰 또 다른 형식의 문화로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보여주었다.
이때 우리 동포를 구하고 돌아오는 미니탐험대를 마중 가자는 상록수 대장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제안에 고무된 일만의 남북대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또다시 행군 대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정 위원장이 뚜벅뚜벅 상록수대장에게 다가오더니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도 좀 끼워주지 않겠습니까? 상록수대장!”
정 위원장의 이 말에 적잖이 당황한 상록수대장이 멈칫하면서도 당돌하게 답변했다.
“대신 맨 앞줄에 서 주신다면 끼워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좌중은 일시에 폭소가 터져버렸고, 정 위원장이 함께 온 노동당 상무위원들에게 손짓을 하면서 호방하게 말했다.
“상록수 대장동무의 말이 옳습니다!
명색이 인민의 최고 지도부인 우리가 최고 앞줄에 서는 것은 합당한 조치가 맞습니다,
우리당의 상무위원들은 모두 내 옆으로 나란히 서시라요!
우리 때문에 행군대열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 열심히들 걷기요!”
KBS가 특집생방송으로 방영하던 지금 이 장면은 전 세계로 송출되면서 지구촌 사람들의 눈과 귀를 또다시 한반도로 집중시켰다.
대통령 환송식 때의 만세사건 이후 중국은 온갖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동포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심지어는 배은하라는 한국인을 납치하여 만세사건을 한국정부의 공작으로 몰아가려고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서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다.
그런데 외교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건이 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북한이 먼저 배은하 납치사건과 백두산 무단 월경사건을 전 세계에 까발리고 나섰다.
사건을 최대한 이슈화하여 이번 기회에 동북공정의 존폐를 놓고서 중국과 사생결단식의 정면 대결을 시도할 참이다.
방송카메라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중국을 탈출한 배은하 일행을 맞이하기 위한 남북대학생탐험대의 행진이 시작됐다.
동북공정을 깨부수기 위한 북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지금 전 세계인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수십 개의 장대 깃발을 앞장세우고 씩씩하게 행진하는 행군대열의 맨 앞줄에 정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의 최고 지도부가 나란히 섰다.
이런 모습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국당국으로서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상록수대장의 선창에 따라서 엄청난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을 때 방송카메라는 특별히 정 위원장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클로즈업했다.
그야말로 중국지도부를 경악하게 만든 다음 장면이 곧바로 연출되었다.
정 위원장을 위시한 북한의 최고 지도부가 오른손을 힘차게 흔들면서 상록수대장이 선창 하는 구호를 따라서 외쳤다.
“동위토문 서위압록! 대통합코리아연방 만세!”
“동북공정 박살 내자! 대통합코리아연방 만세!”
“동간도 땅 회복하자! 대통합코리아연방 만세!”
TV를 통하여 이 감동적인 장면을 지켜보던 팔천만의 코리아연방 국민들은 다 함께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치졸하면서도 비열한 방식으로 우리의 국토를 넘보려던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일격을 날리는 통쾌한 모습이었다.
독도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과 주변국가들 간의 영토전쟁은 이제 중국의 동북공정을 끝장내려는 북한의 대반격으로 전환되었다.
중국의 대응여부에 따라서는 양국 간의 더 큰 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구호제창으로 분위기가 최절정으로 달아오르자 통기타를 어깨에 둘러맨 상록수대장이 기타 줄을 멋들어지게 튕기면서 그녀의 상징곡을 전주 하기 시작했다.
다 함께 상록수를 합창할 때 정 위원장도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거대한 행군대열에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백두산의 산천초목도 떨쳐 일어나 함께 춤추며 합창하는 듯했다.
이때 맞은편에서 올라오던 행군 대열을 발견한 백두산부대의 지프차가 백여 미터 전방에서 멈추어 섰다.
지프와 군용 트럭에서 내린 은하와 미니 탐험대원들은 이 압도적인 광경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와’하는 남북대학생들의 함성소리가 온 백두산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연출되지 않은 이 감동적인 장면을 조선중앙 TV와 KBS가 놓칠 리 없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된 화면들은 또다시 전 세계인들의 안방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이번에도 외신들은 한반도와 중국 간 역사전쟁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했다.
당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인터넷판 기사에서는 동북공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주목하면서 특별히 이 시점을 선택하여 대대적으로 반격하는 이유를 파고들었다.
그동안의 모욕을 인내하면서 꾹꾹 눌러두었던 북중간의 문제를 한꺼번에 분출하고 나선 것은 통일 이후를 대비한 확실한 매듭짓기 수순으로 분석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분석은 사실이었다.
중국은 한국대통령의 방중 이후 동북공정의 제3단계라 할 수 있는 북한영토의 병합조치를 전격적으로 중단했지만 동북공정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또다시 언제라도 제3단계의 동북공정이 재개될 수 있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동북공정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겠다는 북한당국의 강력한 의지가 표출되었다.
실제로 남북한의 통일은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신흥강대국의 탄생을 의미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통일을 앞둔 북한은 지금 중국당국에 강력한 경고장을 날리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을 종국적 불가역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중국과는 전쟁도 불사하는 적성국이 될 수 있음을 세계만방에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장백호텔의 왕 회장 사무실에서는 훠치산이 무릎을 꿇은 채 왕 회장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왕 회장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모습으로 시거연기를 천장으로 쏘아 올리면서 TV화면을 주시했다.
갑자기 영웅이 되어버린 배은하가 남북대학생들의 함성 속에서 정 위원장과 포옹하는 모습이 CNN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훠치산! 각오는 되었겠지?”
훠치산은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된 현실을 받아들였던지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회장님이 내리시는 그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회장실 밖에서는 장백산천지회의 중간급 간부 예닐곱 명이 무릎을 꿇은 채 훠치산의 구명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 회장의 진노가 워낙 컸던 탓에 감히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 회장이 리모컨으로 TV를 끈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통유리창으로 펼쳐진 백두산의 풍광을 바라보며 특유의 중저음 톤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다,
그건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미련 같은 것은 남기지 말고 모두 말해봐?”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왕 회장의 평소 스타일을 잘 아는 훠치산은 달랐다.
의연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만주족의 과업을 망쳐버린 제가 무슨 염치가 있어 다른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선이 강탈해 간 절반의 장백산을 되찾는 대업에 그동안 회장님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살아서는 소임을 다하지 못했지만 죽어서 혼령이 되어서라도 회장님을 돕겠습니다”
훠치산의 이 말에 왕 회장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리면서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가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때 복도에서 훠치산을 탄원하던 천지회의 중간간부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왕회장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모두를 섭렵하듯 찬찬히 훑어본 왕 회장이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소음권총을 꺼내 들었다.
“우리는 만주족의 후예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
비록 훠치산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인정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왕 회장이 훠치산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을 때 모두는 훠치산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탁!’ 다시 ‘탁!’ 또다시 ‘탁!’이었다.
왕 회장이 세발을 모두 발사했지만 그때마다 총알이 없는 상태에서 발사되었다.
왕 회장이 훠치산에게 겨누었던 소음 총을 자신의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훠치산! 결코 너는 오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너의 목숨은 우리 선조들의 혼령이 살아 숨 쉬는 장백산에 바쳐진 것이야,
너의 목숨은 이제 장백산에 저당 잡혔으니 잃어버린 장백산을 되찾는 대업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렇게 하여 훠치산의 목숨은 극적으로 구명되었지만 백두산을 중심으로 전개될 이들의 극성스러움은 오히려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적어도 명분을 내세우는 삼합회 패거리였다.
자신들 선조의 이념을 계승하려는 강한 뿌리의식을 가지고 있어 작은 이해관계로 이합집산 하는 일반적인 삼합회와는 그 차원이 달랐다.
저들이 말하는 장백산,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양국이 나누어서 공유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는 어차피 장백산천지회의 앞날은 보장되어 있었다.
중국정부가 나서기 곤란한 각종 궂은일들을 수행하는 용역단체를 자임하면서 자신들 조직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북경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 떨린다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왕 서기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시 주석의 표정만을 살피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허밍친을 사회과학원에 추천한 자가 바로 당신이었지!”
왕 서기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리면서 두 다리마저 심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예! 북경대에서 사학을 전공하던 허 교수를 제가 추천한 사실이 있습니다,
한반도 통일 이후의 동북지역 영토문제에 대비하는 차원이었습니다,
변경지역의 역사를 중국적 시각에서 새롭게 정립하자는 허 교수의 주장이 당시에는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짜증 섞인 표정으로 돌변한 시 주석이 왕 서기의 다음 말을 끊었다.
“됐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직접 들어봐야겠어요!”
잠시 후 시 주석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허 원장이 주석 집무실로 들어섰다.
명색이 당의 중앙 상무위원이란 직책도, 사회과학원의 최고 수장이라는 신분도, 현대판 중국 황제 앞에서는 한낱 하찮은 하급관리에 불과했다.
공손하게 양손을 앞으로 모은 왕 서기가 숨소리마저 조심하면서 허 원장의 바로 옆 자리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한 후에야 시 주석이 의자를 반대로 돌려 허 원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동안 당신은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와 방향성을 제시해 온 것으로 아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동북공정으로 오늘날 우리 중국이 실질적으로 성취한 성과들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
허 원장은 지금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 주석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자신의 고민들을 직설적으로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크나큰 책임을 통감합니다!
삼십 년이 다되도록 투입된 노력에 비해서 나타난 성과가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허 원장이 순순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나섰지만 시 주석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펴지 않았다.
“한 가지 더!
저들이 말하는 장백산정계비의 진실은 대체 무엇이오?
당신 머릿속의 주관을 배제시키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만 객관적으로 말해보시오?”
허 원장으로서는 시 주석이 진실을 말하라고 했으니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오라총관의 부주의로 발생한 우리 측의 명백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장백산에서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상류의 물줄기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토문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에 정계비를 설치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목극등의 착각이 저들에게 빌미를 주고 말았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 주석이 허 원장을 질책하듯이 노려봤다.
“착각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처음부터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 잡았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터!
두만강의 만주식 발음이 토문강이니 어쩌니 하면서 억지소리를 해됐으니 저들의 술수에 놀아나지 않았나 말입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어요!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는 우리의 것이라고 우겨댔지만 그래서 우리가 얻은 실익이 대체 뭐냔 말입니다!
대국이면 대국답게 처음부터 정직하게 나갔어야 했어요,
허원장! 솔직히 말해보시오!
저들에게 천사백 년 전의 고구려를 되돌려준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 중국이 입게 될 손실이 무엇이오?”
“… …”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일!
중조변계조약으로 확립된 오늘날의 국경을 지키는 힘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위대한 인민해방군의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처음부터 당신들 같은 학자들에게 국가의 중요사업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요!”
얼굴에 잔뜩 노기를 띤 시 주석이 이번에는 왕 서기를 노려봤다.
“지금 이 시각부로 당신 책임 하에서 추진되던 동북공정의 모든 사업들은 폐기되었소!
꼴도 보기 싫으니 모두들 나가시오!”
쫓겨나듯이 주석실에서 물러나온 허 원장은 광장과 연결된 주석궁의 높다란 계단을 내려오면서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 의외로 밝은 표정이다.
아직 1월 초의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부담스러웠던지 청나라 전통복장에 잘 어울리는 멋진 선글라스를 꺼내 쓰면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시 황제의 말씀 중에 틀린 말이 없지 않은가!
애당초 역사를 훔친다는 발상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국의 수치였어!”
춘절 연휴를 앞두고 중국공산당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긴급 소집되었다.
시 주석의 결단을 상무위원회라는 강력한 공식기구를 통하여 공표하려는 목적이었다.
시 주석 아니 사실상의 시 황제가 나머지 여섯 명의 상무위원들을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내린 결정사항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2013년 후진타오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이래 2년 전 실시된 양회에서도 무난히 4연임이 확정되었다.
무려 이십 년간 중국을 철권통치하는 사실상의 황제였기에 상무위원 어느 누구도 시 주석과는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작금의 중조문제를 깊이 고민해 봤어요,
정 위원장까지 직접 나서 우리를 규탄하고 나선 것은 팔십 년의 혈맹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뜻!
혈맹이 하루아침에 적국으로 돌아섰을 때 우리가 입게 될 국가적 손실은 상상이상이 될 것이오,
따라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실리를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이 문제로 국력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오늘 시 주석이 내리고자 하는 결단에 대하여 다른 상무위원들도 왕 서기의 귀띔으로 대략은 알고 있었다.
골치 아픈 동북공정 문제를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통일을 서두르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시 황제는 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하달했다.
“한반도의 통일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우린 싫든 좋든 동북아시아에서 우리 다음으로 핵을 보유한 국가와 이웃하게 되었소,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했던 필요이상의 신경전을 종식할 때가 된 것 같소,
어차피 우리의 적은 미국일진대 적국과 연합하여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발상은 지금 생각해 봐도 심각한 오류가 분명했소!
고구려의 구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조선 인민들이 받은 배신감은 최근 정 위원장의 행보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되었소!”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은 중앙군사위의 부주석이었다.
꼼짝없이 책임추궁을 피할 수 없게 된 부주석은 가만히 눈을 감고서 자신의 운명을 점치고 있었다.
물론 심하게 후들거리는 하체를 계속해서 떠는 것 말고는 사실상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양국의 소원했던 관계를 되돌리는 첫 조치로서 우리가 일으켰던 역사전쟁을 중단하고, 저들의 역사를 2002년 이전으로 되돌리는 조치를 취해야겠어요!
남의 역사를 훔친다는 발상은 대국답지 못한 짓이었어요!
고구려를 저들의 역사로 되돌려 준다고 해서 이미 패망한 고구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요!
앞으로도 변함없이 양국 간의 현재국경은 더욱 튼튼하게 지켜질 테니 말입니다,
동북공정의 폐기와 함께 우리가 취해야 될 두 번째의 조치는 우리의 내부 문제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오,
조선족은 이제 우리의 보호대상에서 삭제되었소!
따라서 오십오 개의 소수민족 명단에서 제외된 조선족 자치주는 해체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생각보다도 강경한 시 주석의 조치에 모두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지만 감히 토시를 달만큼 용감한 신하는 없었다.
딱히 달아야 할 토시도 없었기에 모두는 거저 손뼉 칠 타이밍만 기다릴 뿐이다.
모든 상무위원들이 착한 학생들 마냥 온통 신경을 집중하여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자 시 주석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선족 자치주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도 한족의 이주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해야겠어요,
충분한 정도의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앞으로 십 년 안에 우리 한족의 비중이 팔십 퍼센트 이상이 되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아울러서 중국인으로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조선족들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모두 추방될 것이고 조선족 자치주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야 합니다!”
이 말과 함께 갑자기 뜬금없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초조한 심정으로 앉아있던 중앙군사위의 부주석이 조급증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그러자 나머지 상무위원들도 일제히 시 주석의 지침에 동의하는 박수를 쳤다.
이 상황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은 단연 부주석이었다.
시 주석이 가상하다는 듯 힐끗 한번 쳐다보자 이때를 기회삼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석님의 말씀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당합니다!
주석님의 말씀대로 조치함으로써 통일된 한반도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부주석이 시 주석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말의 강도를 조절하려는 민첩함을 보이자 눈치 빠른 시 주석이 넉넉한 표정으로 하던 말을 계속하게 배려했다.
이에 자극받은 부주석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우리가 저들의 영토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량을 베푼다면 저들의 영토에는 미군도 주둔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기회에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물러나게끔 조치해야 합니다,
이것을 조건으로 저들과 협상을 벌여서 우리의 실익을 챙겨야 합니다!”
부주석의 이 말에 시 주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시 주석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던 왕 서기가 재빨리 일어섰다.
“옳습니다! 미국과 한반도는 지금도 전쟁의 여운이 남아있습니다,
미국이 선제공격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의 통일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핵을 보유한 한반도의 통일은 일본의 안보상황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용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먼저 나서서 핵을 보유한 한반도의 통일을 인정해 주고 그 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한다면 그들은 필시 우리의 요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통일 한반도는 기존의 한미일 삼각 방위동맹 대신 차라리 우리 중국과 군사동맹을 구축할 수도 있습니다!”
시 황제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 신하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지 흡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때 시 주석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던 총리가 깊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통일 한반도의 국호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대통합코리아에서 큰 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조치해야 합니다!
통합은 남과 북을 상징하겠지만 큰 대자는 조선족 자치주까지를 포함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요,
이 문제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합니다!”
방금 총리의 이 주장은 시 주석에 의해서 큰 공감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주한미군철수 문제와 함께 통일한반도 정부에 요구할 두 가지의 핵심사항이 정리되었다.
이날 중앙상임위원회에서 결의된 사항들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어 그동안 추진되던 동북공정의 모든 사업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아울러 소문으로만 무성하게 나돌던 조선족 자치주의 해체도 공식적으로 결의되어 길림성 직할의 행정체제로 재편됐다.
이로써 조선족은 중국의 오십오개 소수민족 명단에서도 사라져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공식적인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
어제저녁 떠들썩하게 진행되었던 삼지연못가역 천막촌에서의 해단식을 끝으로 모두는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혼자 서있던 규태에게 여전히 씩씩한 표정의 진숙이 다가와 다정한 미소로 악수를 권했다.
“어제 내가 동무한테 딱 잘라서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한 건 말이야,
동무가 싫어서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경은동무를 바라보라는 뜻이었는데 내 말 알아들은 것 맞지?
이럴 때 여자들은 숙명적으로 이런 분야에서는 굉장히 촉이 뛰어나거든,
경은동무의 눈빛을 보면 그 마음속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 단박에 알 수가 있단 말이야,
동무가 잘 좀 챙겨주라우!
솔직히 말해서 동무입장에선 경은동무 정도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되는 것 아니네?”
따지고 보면 진숙의 말이 타당하다는 것을 규태가 모를 리 없었다.
뒤통수가 간지러웠던지 겸연쩍게 웃으면서 걸쭉한 입담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상윤 동무래 진숙동무를 바라보는 눈매가 심상치 않던데 내가 봤을 때 말이야,
둘은 속궁합까지는 몰라도 겉궁합은 찰떡궁합이 확실해 보이니까 진득하게 잘 사귀어보란 말이야!”
“아! 이 동무래 생긴 건 미련 곰탱이같이 생겼지만 눈치 하나는 백 단도 더 되는 동무구만!
우리 사이를 벌써부터 눈치챘었단 말이지!
맞아 상윤은 저학년 때부터 일편단심 나 하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자처했는데 그런 상윤의 마음을 이제 더는 외면하지 못할 것 같아,
더 그랬다간 왠지 벌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사람들이 의리로 살아야 되는 것 아니 갔네?”
때마침 저 만치서 상윤이 다가왔다.
진숙과 함께 있는 규태의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면서 특별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동무! 조국의 통일대업은 이제 시작되었으니까 우리 모두 연방정부의 안착을 위해서 일익을 담당해야 되지 안 갔어!
나와 진숙동무는 진즉부터 연방정부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랬어,
우린 앞으로도 좋은 동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주 연락하자고!”
상윤이 악수를 하자면서 오른손을 내밀었을 때 규태는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상윤의 목을 감싸는 장난기를 발동했다.
“내가 어제오늘 동무를 겪어보니까 말이야,
판단력과 통솔력도 뛰어나서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딱 한 가지가 문제야!
동무는 인민들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등한시하는 나쁜 습성이 있던데 고것은 앞으로 좀 고치라야!
고것만 빼고 나면 동무래 코리아연방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갔어!”
규태의 장난기 섞인 인사말은 모두에게 한바탕의 폭소를 터트리게 했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윤이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대통합 코리아연방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으니 더욱더 민주적인 소양을 쌓아야 돼 갔지,
하지만 우리가 당면했던 요 며칠의 엄중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 않았갔어?
동무가 좀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하라우!”
이때 경은이 은하와 함께 나란히 팔짱을 끼고 다가왔다.
은하가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다소곳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제 생명의 은인들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옆자리에 서있던 진숙이 은하의 두 손을 따듯하게 부여잡았다.
“은혜라뇨? 같은 코리아연방의 인민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헤어지면 고우신 우리 이모님을 언제나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다시 뵙는 그날까지 무탈하시고요”
진숙의 이 말에 규태가 또 호들갑을 떨고 나섰다.
“무슨 소리! 앞으로도 자주 만나야지,
봄가을로 백두산 종주도 하고 서울과 평양에도 한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이야,
아참! 또 여름에는 부산 해운대로 한번 놀러 와야지?
부산 내려오면 내가 화끈하게 한턱 쏠 테니까!”
규태의 넋두리에 환하게 웃던 은하가 또다시 모두에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래요! 규태 씨 말대로 우리 모두 자주 만나도록 해요,
서울 오시면 반드시 연락을 주시고요,
여러분들을 꼭 한번 저희 집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미니탐험대원들이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을 때 남쪽을 향하는 특별열차가 서서히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수천 명의 남쪽 학생들을 태운 열차가 삼지연못가역을 출발하자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쉬운 석별의 정을 표현했다.
나란히 함께 앉은 은하와 경은 그 맞은편의 규태가 떠나가는 열차의 차창을 내려다보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우두커니 떠나가는 열차를 바라보던 진숙과 상윤도 만감이 교차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2030년 2월의 춘절연휴가 끝나자 계엄령에서 해제된 연변일대는 모처럼 만의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악몽일 뿐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다.
두 달간이나 지속된 계엄령 기간 동안 우리 동포들은 마치 역모의 죄를 지은 중죄인처럼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계엄령의 해제와 동시에 취해진 조선족 자치주의 해체는 그야말로 현실적인 문제와 맞닥뜨리는 심각한 문제였다.
78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최초의 자치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치주의 청사만 폐쇄되는 것이 아니었다.
연변일대에 걸려있던 한글간판들이 모조리 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동포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글의 사용이 전면 중지되었다.
중국당국의 의사는 분명하고도 명확했다.
중국인으로 동화되어서 살아가던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조국으로 떠나라는 협박이었다.
물론 유화책도 병행되었는데 대대적인 사면조치 덕분에 기수와 경태가 풀려나는 행운을 얻었다.
구치소 앞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인파들 속에는 경태와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서 하염없이 철문 쪽을 주시했다.
기수가 먼저 철문 밖으로 걸어 나오자 기다리던 그의 가족들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기수를 둘러쌌다.
반갑게 재회하는 기수가족의 모습을 경선은 멀찍이서 바라만 볼뿐 다시 구치소의 철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내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당장은 다가가지를 못하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경선의 이런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가족들과 먼저 재회 중이던 기수였다.
기수의 귀띔을 받은 경태가 느티나무 쪽을 향해서 다가갔고 둘은 망설이지 않고 격하게 포옹했다.
이럴 땐 그 어떤 말보다도 가슴과 가슴의 밀착으로 서로 간의 감정을 교감하는 방식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경태가 말했다.
“교도관으로부터 처음 사면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압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경태의 가슴속에 파묻힌 경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요?”
“경선 씨와 내가 만들어갈 우리 가족의 행복한 미래!”
이 감동적인 프러포즈에 대한 대답이었을까.
그녀의 심장소리가 쿵쾅거리면서 경태의 허리춤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성주가 박장대소를 하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지인들을 불러 모았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선남선녀 한 쌍이 벌이던 이 아름다운 광경은 주변의 지인들을 한꺼번에 몰려들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노총각과 한번 다녀온 청상과부의 새로운 인생을 축하하는 작은 무대가 만들어졌다.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경선에게 다가간 성주가 검은 비닐에 담긴 따끈따끈한 두부 한 무를 건네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 어디를 잠시 들렀다가 오는 길인데 말입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가르쳐 주는 거라,
두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삼십 초 안에 두부 한 무를 다 먹는다면 모든 액운을 물리치고 잘 살 수 있다고 하던데 어째 도전 한번 해볼라요?”
성주가 장난 삼아서 하는 말이었지만 액운을 물리치고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두 사람으로서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지인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면서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자 성주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게임을 시작하는 동작을 취했다.
반듯하게 높이 들었던 오른팔을 아래로 쭉 내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경태가 먼저 두부를 먹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않고 두부 한 무를 우작스럽게 먹는가 싶더니 반도 먹지 못하고 그만 체하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경선이 경태의 등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성주는 쉬지 않고 초시간을 재고 있었다.
“17초, 18초…”
경태의 체증이 겨우 가라앉고 있었을 때 초조한 표정의 경선이 순간적으로 경태의 손에 쥐어져 있던 비닐봉지를 낚아챘다.
경태가 반쯤 먹다만 생두부를 꺼내 들고 우적우적 잘도 먹어치웠다.
“27초, 28초”
드디어 마지막 한 조각의 두부를 입속으로 밀어 넣고 경선이 빈 봉지를 높이 들었을 때 성주가 큰 소리로 승리의 피날레를 불었다.
“삼십 초!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
드디어 오늘 한 쌍의 원앙이 탄생했습니다,
우와 이건 뭐 거의 기네스북감입니다!
난 지금까지 이렇게 두부 잘 먹는 신부를 본 적이 없는데요,
새 신부님! 도대체 비법이 뭡니까?
혹시 두부공장 집 딸이라도 됩니까?”
성주가 마이크라도 되는 듯 볼펜을 경선의 입에다 갖다 대고 물었을 때 수줍음 많은 경선이 경태의 등뒤로 숨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콩농사를 지어서 어릴 때부터 신물이 나도록 두부를 많이 먹어서 그래요”
이 말에 모두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경선을 자신들의 무리로 받아들였다.
창우는 두 사람의 석방을 축하하기 위해 인근에서도 맛집으로 소문난 돼지갈비 식당을 통째 예약해 두었다.
뒤늦게 합류한 연구소의 청년단원들까지 합세하여 드넓은 홀 안이 가득 들어찼다.
경태의 옆 자리를 지키던 경선도 어느새 이들의 형수나 제수씨로 불리게 되었다.
자리에 앉은 창우가 일행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앞으로의 생각들은 정하고 있나?”
소주대신 자작으로 막걸리 한잔을 들이켠 성주가 향토연구소의 소장답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뭘 어쩌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여기가 우리 고향인데 고향을 지켜야지요!
조선족 자치주가 아니면 어떻고 한족들이 또 엄청나게 밀고 들어오면 어떻습니까?
고향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난 여기서 끝까지 우리 땅을 지킬 겁니다!”
다정한 눈빛으로 경선의 얼굴을 바라보던 경태도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겁니다!
조상님이 물려주신 땅인데 누구 좋아라고 여기를 비워준단 말입니까? 택도 없지요!”
기수도 소주잔 대신 성주가 부어주는 막걸리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웃으며 말했다.
“나도 동감입니다! 경태 말대로 누구 좋으라고 떠난단 말입니까?
어쩐지 지금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아서 당분간 여기를 안 떠날 생각입니다,
배 교수님이 우리한테 남겨주신 그 말씀이 난 아직도 귓전에서 맴돌고 있거든요,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대통합이 될지 중통합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별 셋을 노래하면서 여기서 그냥 살아가렵니다”
이때 창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기수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자칫 이 말이 흘러 나가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창우도 바로 이 말 때문에 아버지 생전에 크게 다툰 적이 있었는데 그만큼 위험한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의 대통합은 중국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중국의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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