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여 평 창고의 정 중앙,
호텔지하실의 흐릿한 조명과 퀴퀴한 곰팡이 냄새 때문에 음침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학생용 나무의자에 묶여있던 은하는 검정색 수면안대로 눈을 가린 상태다.
체력은 거의 탈진 상태로 줄에 묶여있지 않았다면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할 지경이다.
장백산천지회는 단지 저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은하에게 끊임없이 절망을 가르치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감시하는 이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삼십여 분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매시간 매분을 이렇게 저들이 원하는 자백을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은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들의 혹독한 눈초리 속에서도 단지 친정을 다니러 왔을 뿐 윤 비서관으로부터는 그 어떤 이야기도 전해 들은 바 없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잡혀온지도 벌써 일주일째,
그동안 끼니마다 주어지는 빵 하나와 생수 한 병으로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안대까지 채워진 채 계속 묶여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남은 생을 마감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 배 교수의 환영이 나타나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주곤 했다.
오늘은 왠지 좀 더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처음으로 지하실로 내려온 왕 회장이 고급스러운 일인용 소파에 그 큰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은하를 노려봤다.
“이십 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니 아비 배 교수! 그 고매한 양반이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어!
그렇게 흥건하게 바지를 적시고는 생쥐처럼 파르르 떠는 꼴은 참말로 볼만한 광경이었지!”
차마 딸 앞에서 할 수 없는 험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장백산천지회의 보스답게 왕 회장의 목소리는 낮게 깔린 중저음을 유지했다.
여전히 그의 오른손에는 쿠바산 최고급 시거가 들려 있었고 천장 가까이에 뚫려있는 작은 창을 향해서 길게 연기를 내어 뿜었다.
“동북 3성지역이 몽땅 거리 고구려족의 후예인 자기네들 땅이라고 선동하고 다니길래 만주족의 후예인 우리가 지켜만 볼 수가 없었지!
여기 장백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우리 말갈여진족이야말로 동북 3성 전역에 걸친 만주 땅의 진짜 주인이었거든!
너희 조선족들은 이제껏 반도족으로 살아온 족속들이었어!
그런 주제에 감히 만주대륙을 넘보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기에 내가 엄중한 경고를 했었지,
그런데도 너희 아비는 기어이 내 말을 듣지 않더라고,
그래서 네 오라비 창우의 반역질까지 엎어서 내가 직접 이 자리에서 당신 아버지를 응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왕 회장은 안주머니에서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빼어 들고 은하를 향하여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은하는 지금 왕 회장이 자신을 향해서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안대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형성된 이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직작 할 수 있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왔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런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아버지의 죽음은 오래전의 일이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선생님의 부하들에게서 매일매일 강요받고 있습니다만 나 살자고 없던 사실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님 환송 행사 때의 일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된 것인데 자꾸 한국정부가 개입된 것처럼 말하라고 하시니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 그저 친정을 다니러 온 연약한 아녀자일 뿐입니다,
절 죽이게 되시더라도 내게서 들을 대답이 달라지지는”
목소리는 떨렸지만 은하의 말에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굳은 신념이 묻어 있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하면 됐어!
네년의 그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한테서 신물이 나도록 들었으니까,
내가 봐도 네년에게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일주일이면 생각할 시간도 충분히 준 것 같고 니 아비가 이 자리에서 죽었으니 내가 허튼소리 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 테지,
그래서 오늘 내가 이렇게 친히 내려온 것이야!”
오른손에 찬 두툼한 크기의 고급 손목시계를 살펴보던 왕 회장이 자리를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시각이 여덟 시를 넘겼으니 정각 아홉 시까지로 하지!
딱 오십 분이 남았으니 그동안 생각을 정리할 마지막 시간은 될 거야,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니 아비 배 교수의 최후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야!”
훠치산과 함께 자리를 떠나려던 왕 회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은하 쪽을 돌아보더니 훠치산에게 명령했다.
“그래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커피 한잔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야겠지!
혹시 아는가? 인생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다 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될지도?”
왕 회장의 지시로 호텔식당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온 감시자들이 은하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정색 안대를 풀어주며 잔뜩 연민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회장님은 생각을 바꾸실 분이 아니라서 해두는 말인데 이것 들면서 제발 생각을 좀 바꾸슈!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그깟 말 한마디가 뭐라고 사람목숨을 버린단 말이요?”
지하창고의 철문이 ‘쾅’하고 다시 닫혔다.
일주일 만에 맛보는 커피 향은 코끝을 강렬하게 자극했지만 이 한잔의 커피가 인생의 마지막 커피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드디어 지하창고에 있던 모든 감시자들이 밖으로 나왔다.
멀찍이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규태가 모두의 얼굴을 모으게 한 뒤 초긴장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한다.
“정 과장이란 사람하고 통화했는데 배은하 씨는 장백산천지회라는 삼합회에 납치된 한국 사람이 맞다는 거야,
우리한테 신신부탁하기를 배은하 씨를 구출해서 최대한 빨리 여기를 벗어나 달라고 하네,
자기들도 이쪽으로 출발할 테니까…”
미니탐험대장의 머릿속은 말끔하게 정리가 끝난 상태였고 이번에도 상윤은 군더더기 없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지하실엔 배은하 씨 혼자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이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같은데 진숙이하고 경은동무는 방으로 올라가서 배낭을 챙겨서 내려오도록 하지,
두 동무가 잘하갔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리가 내렸던 그 버스 정류장으로 먼저 가 있도록 해!”
진숙과 경은이 일어나 호텔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상윤이 경비실 쪽을 응시하면서 규태에게 말했다.
“문제는 저기 십여 미터 떨어진 정문 옆에 있는 작은 경비실인데 경비 한 명이 머리를 내어 밀고 지하 창고 쪽을 계속 감시하고 있거든!
저 경비의 눈을 피해서 지하실로 내려가려면 동무가 경비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줬으면 좋갔는데,
그 왜 동무는 농아리를 잘 까니까 동무 특기를 한번 살려보라우?
그 사이에 내가 지하실로 내려갈 테니까”
상윤 대장의 방금 이 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규태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정문의 경비실로 태연하게 걸어갔을 때 앳된 얼굴의 젊은 경비가 작은 창으로 머리를 쑥 내어 밀었다.
이때 규태가 경비의 머리를 그의 큰 덩치로 가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경비가 지하창고의 철문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경비아저씨! 말씀 좀 물어봅시다!
이 근방에 좋은 구경거리가 뭐가 있습니까?”
최대한 험상궂게 보이고 싶은 이십 대 초반의 철없는 사내가 깍두기머리와 잘 어울리는 험상궂은 인상으로 규태를 노려봤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규태의 시건방진 말투는 젊은 경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건방진 말투로는 자기도 지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중국말로 뮈라 뭐라 쏘아붙였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규태입장에서는 꼭 ‘너 뭐 하는 놈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규태도 오만가지의 인상을 찌푸려가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누구냐고? 내가 바로 삼일특공대다”
규태의 익살스러운 코믹연기에 이 철없는 삼합패 녀석이 무료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상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창고의 철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철문에 열쇠까지는 채우지 않았지만 잔뜩 녹이 슨 묵직한 쇠막대기 고리를 옆으로 여는 것이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위아래로 움직여가면서 조심스럽게 열지 않으면 자칫 삐익하는 쇳소리가 날 수 있어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한편 아무 내용도 없이 마구 떠들어대는 규태의 너스레에 젊은 경비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연신 배꼽을 잡고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거저 규태의 코믹스러운 표정연기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됐다 됐어!’
마치 주문을 외듯 작은 소리로 읊조리던 상윤이 드디어 녹슨 막대 고리를 오른쪽으로 밀어젖히는 데 성공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아래로 난 지하계단을 따라서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내려갔다.
모든 걸 체념한 표정으로 인생 마지막의 커피를 마시던 은하가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평소 보지 못하던 낯선 청년이 지하실로 내려오자 은하가 애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주세요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은하는 지금 이 청년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두 손을 비비면서 간절하게 애원하는 본능적인 행동을 보였다.
“선생님 제발요! 저 좀 살려주세요!”
상윤이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로 ‘쉿’을 몇 차 레나 표시하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지금 배은하 씨를 구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어서 여기서 나갑시다!”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상윤의 말에 갑자기 은하의 두 눈에서 광명의 빛이 솟꾸쳤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단단히 묶여있던 줄부터 풀어준 후 제대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비틀거리는 은하의 왼손을 그의 어깨에 걸치게 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학생의자에 결박되어 있었던 은하의 두 다리는 완전히 경직된 상태였다.
혈관의 피를 소통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차라리 혼자서 기어오르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두 사람 모두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이 방법이 결코 효율적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은하를 아래에서 바라보던 상윤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무작정 뛰어올라갔다.
겨우 중간쯤 오른 은하를 안고서 계단을 거침없이 올랐다.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상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지하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때도 상윤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을 했다.
은하를 안은 상태에서 대담하게도 지하실의 철문을 또다시 옆으로 밀고 있었는데 도피시간을 확보하려는 완전범죄의 정석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보다는 손쉽게 철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래도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가 손이 쉬웠다.
진숙과 경은이 자신들의 배낭을 멘 채 규태와 상윤의 배낭까지 손에 들고 나오자 프런트의 안내원 아가씨가 궁금한 듯 쳐다봤다.
진숙이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방의 열쇠들을 프런트에 맡기면서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주변의 경치가 좋아서 산책하러 갑니다! 좀 늦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숙박비는 선불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프런트 아가씨로서는 체크아웃을 하던, 다시 돌아오던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진숙이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자 밝게 미소 지으며 잘 다녀오라며 인사했다.
이때 천지회 패거리 중 한 명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다가와 프런트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냐며 캐물었다.
“오늘 저녁에 체크인한 손님들인데 주변을 산책하러 나간다는데 좀 늦으려나 봐요”
이 건달 녀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걷어 올린 옷소매를 내리려 했을 때 그의 오른 손목에서 파란색의 산 모양 문신이 드러났다.
이 문신은 장백산천지회의 표식으로서 소속된 패거리들은 모두 이 같은 문신을 의무적으로 새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늘 하던 장난기가 발동했던지 안내원 아가씨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손가락 동작을 보이면서 마당으로 내려갔다.
호텔정문의 경비실로 걸어가면서도 습관인 듯 십여 미터 거리의 지하창고 철문상태부터 매서운 눈매로 확인했다.
철문의 고리가 정상적으로 닫혀있다는 것은 지하실 쪽에서는 특이사항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비실을 향해서 또 다른 자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앳된 삼합회 건달 녀석을 상대로 온갖 주접을 떨고 있던 규태가 이제까지의 용무를 끝내려고 했다.
건들건들한 거수경례 동작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며 서둘러서 호텔을 빠져나왔다.
규태까지 호텔을 떠난 지 십여 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호텔의 맨 꼭대기층에서 대기 중이던 장백산천지회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움직였다.
왕 회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요란스럽게 호텔로비로 내려왔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조용해 보였다.
은하를 등에 업은 채 상윤은 쉼 없이 뛰었다.
진숙과 경은도 전봇대 뒤 모퉁이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대기하다가 저만치서 상윤이 달려오자 함께 달리는 중이다.
애당초 목적지에 먼저 와서 기다리기로 약속되었지만 걱정이 되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뒤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오는 규태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무사히 호텔을 벗어난 것을 확인한 상윤이 적당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서 가던 진숙과 경은에게 고함치듯 외쳤다.
“택시를 잡아봐! 택시를 타고 가자”
두리번거리던 경은이 길 건너편에 세워져 있던 택시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 택시 있어요!”
진숙이 건너편의 택시를 향해서 양손을 이용한 큰 동작으로 부르기 시작하자 택시는 스스럼없이 불법 유턴을 자행하면서 다가왔다.
그 사이 전속력으로 달려온 규태가 폭포수같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헉헉거렸다.
택시가 도착했지만 행선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 또 승차인원이 한 명 많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급한 대로 행선지는 정해서 떠나면 될 일이었지만 승차인원이 모두 다섯 명이라 중국인 기사가 주저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규태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던지 오른손을 들어 운전기사에게 보여줬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기사에게 흔들어 보이며 ‘따블! 따블!’을 외치자 그제야 기사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몸이 불편한 은하를 앞자리에 태우고 네 사람은 뒷자리에 끼워 앉았다.
은하가 뒤를 돌아보며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장춘공항으로 가주시면 안 될까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에 규태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럽시다! 어디가 됐던 빨리 출발이나 합시다!”
은하가 유창한 중국말로 기사에게 장춘공항으로 가달라고 말하고서야 택시는 출발할 수 있었다.
은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지명수배자란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탓에 공항을 이용하여 출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경은에 비해서 체격이 다소 작은 진숙이 교통공안의 단속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스스로 허리를 바짝 숙였다.
얼마나 고단했으면 경은의 무르팍에 머리를 누이자마자 진숙이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자연스럽게 진숙의 허리 위에 양손을 올려놓은 경은이 친자매 같은 따듯한 온기를 나누며 위기에서 벗어난 안도감에 젖어들었다.
택시가 출발한 지 이제 갓 십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규태의 휴대폰과 택시기사의 업무용 무전기가 동시에 울려댔다.
“예 정 과장님! 지금 장춘공항으로 이동 중입니다”
규태가 국정원의 정 과장으로부터 장춘공항의 입구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있을 때였다.
택시기사는 사무실에서 걸어온 업무용 무전기를 받자마자 싱글벙글 웃으가며 장거리손님을 그것도 따블요금으로 운행한다면서 떠들어 됐다.
큰 소리로 떠드는 중국인 기사 때문에 통화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규태가 인상을 쓰면서 기사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인 기사는 손님들의 반응 따윈 무시한 채 태연하게 자신의 할 말을 꾸역꾸역 다했다.
조선 손님 다섯 명을 태우고 장춘공항으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을 때였다.
진숙이 벌떡 일어났다.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네! 우리의 이동경로를 다 까발리고 있지 않았네?”
진숙이 이번에는 중국인 기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평소에도 오늘처럼 택시의 이동경로를 묻는 무전이 오곤 합니까?”
진숙이 정색한 얼굴로 질문하자 택시기사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주섬주섬 말했다.
“아니요! 이 무전기는 사고가 났을 때나 사용하는 긴급용인데 오늘은 웬일로 조선 손님들을 태웠느냐?
어디로 가느냐? 꼬치꼬치 묻는 게 이상하긴 했어요, 또 뭐 천천히 가고 있으라 하는 것도 이상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진숙의 통역을 듣고 있던 상윤이 소스라치듯이 고함쳤다.
“빨리 다른 데로 방향을 틀어! 빨리!”
진숙도 중국인 기사에게 큰 소리로 다그쳤다.
“장춘공항 반대편으로 갑시다! 무조건 돌려서 갑시다! 빨리!”
당황한 중국인 기사가 머뭇거리며 속도만 줄였을 뿐 손님들의 절박한 요구에는 부응하지 않았다.
이때 규태가 머리를 앞으로 쑥 내어 밀고 기사에게 오른손가락 세 개를 흔들어댔다.
그 어떤 말보다 손가락 세 개의 위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유턴신호가 있든 없던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는 차량의 간격이 멀어지자 쏜살같이 유턴을 감행한 택시는 무작정 내달렸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교통공안들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려대면서 갑자기 교통검문이 강화되고 있었다.
은하가 뒤를 돌아보자 모두는 상윤 대장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미니 탐험대장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머릿속의 결정사항을 포효하듯이 내뱉었다.
“천지로 가자!”
이 뚱딴지같은 말에 모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백여 미터 앞 전방에서 갑자기 교통공안들이 긴급 검문소를 설치하자 규태가 소리쳤다.
“천지가 됐든, 어디가 됐든 빨리 가기나 하자고! 이러다가 모두 잡히고 말겠어!”
규태의 말을 알아들은 중국인 기사가 오른쪽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요금을 세배로 계산해 주겠다는 규태가 천지로 가자고 했으니 방향을 돌려서 그냥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천지가 되었던 어디가 되었던 지옥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심정들이었기에 이 위험한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택시의 업무용 무전기가 또다시 요란하게 울려대자 규태가 허리를 급격하게 숙이면서 무전기의 전원을 빼버렸다.
이번에는 중국인 기사도 잘했다는 표정으로 규태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어 됐다.
이 와중에도 상윤의 치밀함은 놀라웠다.
진숙으로 하여금 중국인 기사의 휴대폰을 빌리게 한 다음 직접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리고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어 버렸다.
진숙이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양해를 구했음에도 중국인 기사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항의하자 규태가 다시 나섰다.
웃으면서 특효약인 세 개의 손가락을 다시 흔들어 보이자 중국인 기사가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주변은 깜깜한 암흑천지일 뿐 창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샛길을 무작정 달려온 지도 삼십여 분이 지났을 때 모두는 극도의 나른함에 빠져들어 고개를 옆으로 파묻었다.
비몽사몽 간의 상태로 한 시간가량을 더 달리고서야 위험지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택시 승객들의 단잠을 깨운 건 규태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예 지금 천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장춘공항이 아니고요 천지 말입니다!”
차창 밖의 가로등에 비친 안내판은 정말로 소천지를 가리키고 있었고 택시는 북문으로 들어섰다.
“아니요! 천지호텔이 아니고 정말로 천지로 간다니까요,
그래요 소천지인지 대천지인지 좌우지간 백두산 천지로 가고 있다고요!”
정 과장과의 통화를 마친 규태가 택시를 일단 정차시키고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정 과장의 말이 오늘밤은 여기서 묵는 게 좋겠다고 신신당부를 하네,
이 밤중에 천지에 올랐다간 모두 다 얼어 죽기 십상이라는 거야!
대천지든 소천지든 백두산천지가 무슨 동네 뒷산인 줄 아느냐면서 우리 보고 미쳤다고 난리도 아니야 지금!”
이때 초췌한 표정의 은하가 뒤를 돌아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동포분이 운영하던 제가 잘 아는 호텔이 있는데 거기로 가도록 해요,
지금도 그분이 운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이번에도 최종 결정은 상윤 대장의 몫이었다.
모두가 상윤을 뚫어지게 쳐다봤을 때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처럼 이미 똑 부러진 결론이 만들어져 있었다.
“대신 중국인 기사도 우리와 함께 묵기로 하고 내일 새벽 일찍 천지를 오르는 것이 좋갔어!”
이렇게 해서 은하가 잘 알고 있다던 호텔의 인근까지 왔을 때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던 초창기의 북문일대 호텔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대신 아래쪽에 중국인들이 새롭게 운영하는 호텔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오래전 배 교수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행되던 백두산공정을 크게 염려했었다.
한중수교 직후 한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나던 초창기의 호텔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의 자본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당시 백두산 관광지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던 우리 민족의 흔적을 중국은 끝내 용납하지 않았다.
장백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던 북문 쪽의 호텔들을 모조리 철거해 버렸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서문과 남문 쪽 호텔들은 그대로 놔둔 것으로 봤을 때 백두산에서 우리 민족의 자본을 쫓아내려는 중국의 공작이 분명했다.
배 교수가 염려하던 백두산공정은 이미 완료되어 이제는 우리 민족의 백두산이 아닌 중국의 장백산으로 탈바꿈된 상태였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간 호텔이 바로 천지호텔이었다.
규태가 주변의 호텔들을 지나다가 정 과장의 말이 떠올랐던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선택한 호텔이었다.
중국인 기사도 손님들을 천지까지 데려다주고 세배의 요금을 받기로 했으니 별말 없이 호텔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진숙과 경은의 부축을 받으며 호텔방으로 들어선 은하는 창가의 작은 응접세트 의자에 앉아 모처럼 만의 평화에 감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경은이 물티슈를 건네며 은하를 위로하려 했지만 자신 때문에 공안에 잡혀간 일행들의 안위가 걱정된 은하의 눈물 보자기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때 진숙이 자신의 배낭에서 녹차가루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내 룸에 비치된 전기주전자로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진숙이 가져온 따듯한 녹차잔을 음미하던 은하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었던지 옅은 미소를 띠면서 경은과 은하를 바라봤다.
시야를 창밖으로 돌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백두산의 숲 속 풍경을 바라봤을 때 일주일사이에 겪었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울을 떠나올 때 남편 윤 비서관이 했던 당부의 말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혹여라도 대통령님께서 연길을 방문하게 된다면 동포들의 큰 환영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임박한 선제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위험한 일에 당신을 개입시켜서 미안하지만 우리나라의 처지가 위급하여 당신한테까지 부탁하게 됐어요”
물론 윤 비서관이 은하에게 했던 말은 둘만의 내밀한 대화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은하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경은과 진숙에게 구룡촌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겪었던 일련의 상황들을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경은과 진숙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은하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사실 은하로서는 오늘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꿈속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생명의 은인들을 만나 이렇게 녹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인생을 통틀어서 두 번째로 치열한 하루를 보냈던 규태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작년 삼일절 때 독도에서 겪었던 칼부림사건 이후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오늘 또다시 대단히 위험한 하루를 보냈다.
그때는 일본의 극우세력 다케시마 수복 결사대였고, 이번에는 중국의 극우세력 장백산천지회란 사실만 다를 뿐이다.
상윤은 혹시라도 중국인 기사가 딴생각을 품을까 봐 좀체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몰려오는 극한의 피곤을 물리치며 끝까지 잠들기를 거부했다.
의도적으로 중국인 기사에게 냉장고 안의 맥주를 세병이나 먹인 뒤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상윤은 규태의 잠자리까지 보아준 후에야 입가에서 살포시 미소가 돋아났다.
오늘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으로 대견한 하루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동포 배은하 씨를 구출한 사건은 암만 생각해도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밤새 중국인 기사의 코 고는 소리도 대단했지만 엄청난 스윙의 발길질을 동반한 규태의 몸부림도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기어이 짧게나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누적된 피로가 컸던 탓이다.
딱히 알람소리를 맞추어 놓은 것도 아니지만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상윤이 먼저 잠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릴 적부터 소조직을 통솔하는 지도자로서의 행동이 몸에 뵈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의 천막촌 총평대회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오늘 폐막식 일정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참석해야 한다.
그러자면 점심 무렵까지는 삼지연못가역 천막촌에 도착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호텔식당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을 수 있어 지금부터 서둘러야 했다.
상윤의 기상 소리에 규태와 중국인 기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다행히 은하의 몸 상태도 한결 가뿐해졌다.
모처럼 만의 단잠 덕에 다리의 통증도 잦아들어 이제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도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일행들이 호텔로비의 좌측에 위치한 식당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마당 한편에서는 낯선 SUV차량과 함께 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남자가 건장한 두 청년을 대동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정 과장이 은하를 발견하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배은하 씨!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저는 선양총영사관에서 근무하는 정 과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희들이 안전하게 모실 테니 함께 가시죠!”
다른 일행들은 식당 한 편의 식탁에 둘러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 요기를 대신하면서 이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와 그 옆의 청년들이 누구인지는 어림짐작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은하가 정 과장에게 말했다.
“기수와 경태 경선엄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 때문에 공안에 잡혀갔는데…”
정 과장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행히 경선 씨의 모친은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습니다만 기수 씨와 경태 씨가 좀 난감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고생을 좀 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도 은하 씨의 신변 보호가 먼저입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정 과장은 함께 갈 것을 재촉했지만 은하가 대뜸 되묻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공항이던 어디로던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기수와 경태가 구속되었다면 당연히 저도 수배자의 신분일 것 같은데 어떻게요?”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던 정 과장이 답답해서 안 되겠던지 아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검은 선글라스 속에 감추어진 그의 강골 이미지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당장은 출국이 어렵습니다만 우선 저희 총영사관 내의 거처에 계시다가 이후의 상황을 봐가면서 차차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본국의 재촉이 빗발쳐서 저희로서도 보통 난감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저희들이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계속해서 함께 가기를 재촉하는 정 과장에게서 은하가 한두 발작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과장님! 잠깐만이라도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네요,
죄송합니다만 잠시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정 과장 일행을 남겨두고 은하가 빠른 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종걸음으로 일행들의 자리로 다가왔을 때 진숙이 자신의 옆 자리를 내어주면서 말했다.
“이모님 여기로 오시라요!
어떻게 저분들과 함께 가시기로 하신 겁니까?”
은하가 한껏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행들에게 다소곳하게 말했다.
“어제부터 진숙 씨가 불러주는 이모라는 호칭이 참으로 정감이 가네요!
같은 식구로 대접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저기 계신 분들은 영사관에서 나오신 분들인데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하네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서 이렇게 왔어요,
여러분들은 이제 백두산을 오르신다고요?”
진숙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은하가 상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다음은요?”
상윤이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국으로 가야죠, 저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점심 안으로는 삼지연에 도착해야 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은하가 진숙의 두 손을 조용히 감싸더니 상윤을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도 좀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염치없는 말인 줄은 압니다만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럽니다!”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인 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제히 상윤만 쳐다봤다.
함께 백두산을 오르겠다는 은하의 이 제안을 상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두가 궁금한 표정들이다.
어느덧 상윤은 이 작은 탐험대의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으로 우뚝 서있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이모님 뜻대로 하십시오!
부득이한 사정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힘든 여정이 되실 텐데 이모님의 건강이 걱정입니다!”
“고맙습니다! 제 건강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멀쩡합니다!”
이때 규태가 익살스러운 표정연기를 하면서 불쑥 끼어들었다.
“이모동무! 같이 갑시다,
그 대신 부리나케 올라가야지 꾸물대면 안 됩니다!”
행선지가 정해졌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은하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밝은 표정으로 밖으로 뛰어나간 은하가 정 과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 과장은 황당하다는 제스처를 동반하면서 은하의 계획을 극구 만류했다.
그러는 사이 아직 아침식사를 하지 못한 은하가 마음에 걸렸던지 경은이 애틋한 마음으로 은하의 샌드위치 도시락을 준비했다.
규태는 이번에도 진숙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신의 카드로 체크아웃을 진행했다.
떠날 준비를 끝내고 중국인 기사가 택시의 시동을 켜고 있었을 때 정 과장이 택시에 오르던 일행들에게 다가와 다시 한번 완강하게 말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일월 엄동설한에 백두산을 올라서 북으로 가겠다는 발상은 정말이지 미친 짓이에요!
까딱하다간 얼어 죽기 십상입니다,
이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에요,
모두들 일단 내리시고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해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결정을 되돌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은하까지 막무가내로 택시의 앞자리에 오르려고 하자 정 과장도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솔직히 이런 택시로는 천지까지 올라가지도 못해요, 그것도 뒷자리에 네 명이나 태워서는,
그래요 차라리 우리 차로 갑시다! 그 편이 낫겠어요,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천지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모두 우리 차로 갑시다!”
비록 냉철한 고민도 없이 정 과장이 즉흥적으로 제시한 제안이었지만 일행들의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체의 좌고우면 없이 상윤이 곧바로 수락해 버리자 정 과장으로서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모두는 비좁은 택시에서 내려 넓고 편안한 9인승 SUV차량으로 옮겨 탔다.
중국인 기사를 노려보던 정 과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가운데 사전에 약속한 세배의 택시요금을 정산하기 위하여 규태가 비씨 카드를 꺼내고 있을 때였다.
정 과장이 잽싸게 다가가 규태가 내미는 카드를 순간적으로 제지시켰다.
카드결제를 위해서 단말기를 꺼내 들던 중국인 기사가 정 과장에게 삿대질까지 하면서 항의하는 험악한 상황이 발생했다.
중국인 기사의 난동에 가까운 거친 항의는 정 과장을 보좌하던 요원들의 제지를 받고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정 과장이 피식 웃으며 규태에게 말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택시기사를 보내 주면 공안이나 장백산천지회가 곧바로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목적지까지 중국인 기사도 함께 데려갔다가 우리와 같이 내려와야 합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자는 정 과장의 판단은 역시 국정원의 프로 요원답게 용의주도했다.
정 과장의 부하요원들이 중국인 기사를 강압적으로 다그쳐서 택시를 다시 주차시켰다.
마지못해서 SUV차량에 오른 택시기사에게 정 과장이 다가가 자신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좀 전에 규태가 카드로 정산하려던 금액을 현금으로 건네주자 중국인 기사가 히죽히죽 웃으며 지폐를 세느라 정신이 없다.
정 과장이 덤으로 지폐 몇 장을 더 얹어주자 중국인 기사가 엄지 척까지 하면서 고마워했지만 다음순간 또다시 그 돈을 빼앗아 버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중국인 기사가 다시 큰 소리로 항의하자 정 과장이 유창한 중국말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 돈은 다시 여기로 내려왔을 때 당신한테 주게 될 돈이요,
그때까지는 내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오케이?”
그래도 납득이 안 된 중국인 기사가 갑자기 정 과장의 멱살까지 잡아채고 무섭게 대어 들었다,
이때 정 과장의 뒷자리에 앉은 요원 한 명이 중국인 기사의 목덜미를 기습적으로 가격하여 실신시켜 버렸다.
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던 상윤의 재촉으로 4륜구동은 산을 향해서 거친 질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던 고요는 오래가지 않아서 깨어졌다.
중국인 기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깨어났다.
“어 여기는 소천지 방향이 아니잖아!”
그러나 자신을 향한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중국인 기사는 이내 타협책을 시도했다.
옆 자리의 정 과장을 바라보면서 깐죽대듯이 말했다.
“내 돈! 내 돈만 주면 조용히 있을게!”
자신의 실속만 차리게 해 준다면 협조하겠다는 중국인 기사의 타협안이었다.
정 과장이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안주머니에서 조금 전 주려던 지폐를 다시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면서 말했다.
“이 돈이면 당신 오늘 하루 일 안 해도 되잖아!
백두산이나 구경하면서 조용히 다녀오자고! 나하고 약속할 수 있지?”
다시 돈을 받게 된 중국인 기사는 정 과장에게 엄지 척을 하면서 둘 사이의 신사협정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이미 날은 밝아 천문봉 아래 백두산주차장을 향하는 SUV 차량들이 줄을 지어서 달려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소란은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지만 중국인 기사는 애당초 신사협정 따위를 지킬 의도가 없었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는 은밀하게 휴대폰의 전원 버튼이 눌러졌다.
호텔주차장에서 카드결제를 하기 전 규태로부터 돌려받은 휴대폰의 전원을 켬으로써 자신의 현재 위치를 노출시키려는 의도였다.
이제 돈도 받았겠다 더 이상은 공안에 쫓기는 조선인들과 함께 여행할 마음이 사라졌고 또 자신을 겁박했던 정 과장 일행을 혼내주고 싶었다.
문제가 터졌음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 기사의 바지주머니에서 그동안 대기 중이던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완력으로 중국인 기사의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압수한 정 과장이 크게 낙담한 표정을 짓더니 차량을 운전하던 요원에게 소리쳤다.
“방향을 돌려서 다시 내려가!”
정 과장이 중국인 기사의 옆구리를 오른손으로 한차례 가격하는 것만으로도 중국인 기사는 그 자리에서 실신해 버렸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정 과장이 푸념하듯이 내뱉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위치는 노출되었을 테니 모두 우리를 믿고서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소천지의 표시판이 보이는 양 갈래의 도로 지점에 이르자 정 과장이 직접 중국인 기사의 휴대폰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잠시 후 차가 도착한 곳은 중국인 기사가 처음부터 택시의 목적지라고 말하던 소천지의 진입로 입구였다.
요원 한 명이 중국인 기사의 뺨을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차에서 내리게 했다.
함께 차에서 내린 정 과장이 가죽잠바의 안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중국인 기사에게 지폐를 건넸다.
“당신 휴대폰은 내가 산속으로 던져버렸으니까 이걸로 요즘 새로 나온 최신 폰을 하나 장만하도록 해!”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어깨까지 토닥이면서 친절하게 악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쓸데없는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겠다는 프로 요원다운 뒤끝 조치였다.
중국인 기사가 떠나가는 차량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있자 상윤이 혼잣말처럼 하는 말이다.
“어젯밤 우리가 천지에 간다고 했지 언제 소천지에 간다고 기랬냐?”
백두산 서문의 우거진 숲 속,
일필휘지로 휘어 갈긴 ‘장백호텔’의 현판이 한눈에도 주변의 호텔들을 충분히 압도했다.
이 호텔의 맨 꼭대기 층에 자리한 장백산천지회 사무실에서는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팽팽한 적막감이 흘렀다.
이때 심복 훠치산이 건네준 전화기에서는 길림성 공안국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드디어 도망친 일당들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북파방향 소천지 인근입니다,
헬기를 보냈으니 편하게 이용하십시오!”
왕 회장이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소천지라? 거긴 또 왜 갔을까?
영험하다는 소천지의 물 한 사발을 떠다 놓고 뭘 빌러 갔을까?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훠치산이 왕 회장이 꺼내든 시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회장님 이건 순전히 저의 상상력입니다만 정상적으로는 출국이 어려우니까 혹시…”
“혹시 뭐? 장백산을 넘어서 조선으로 가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정상적으로는 출국이 안되니까 밀항의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왕 회장이 목으로 시거연기를 넘기려다가 갑자기 사례에 걸리고 말았다.
큰 동작으로 기침을 여러 차례 한 후에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훠치산을 바라봤다.
“이 엄동설한에 장백산을 넘어서 어디로 간다고?
아니지 아니지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겠어,
지금으로선 그 방법 말고는 딱히 여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을 거란 말이야,
훠치산! 곧 헬기가 도착할 거야,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반드시 그 년을 잡아와야 될 거야,
이번에도 놓친다면 내가 널 용서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한 왕 회장이 서랍에서 꺼낸 권총으로 훠치산의 얼굴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자신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라는 경고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총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훠치산이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반드시 그 계집년을 잡아서 회장님 앞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틀림없이 그렇게 해야만 될 것이야!
이번에도 날 실망시킨다면 차라리 천지 물속으로 뛰어드는 편이 나을 거야,
내 말 명심해 훠치산!
오늘이 배은하 년 탈출에 대한 너의 죗값을 탕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사실을!”
길림성 공안국의 헬기 세 대가 소천지의 상공에 나타났다.
공안헬기가 나타나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중국인 기사가 아래에서부터 격한 동작으로 양손을 흔들어댔다.
이것을 신호로 판단한 공안헬기 한 대가 산언덕으로 착지를 시도했고 나머지 두 대는 백두산의 정상을 향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착지한 헬기에서 내린 공안이 중국인 기사의 신원을 확인한 뒤 함께 헬기에 올랐다.
백두산 천지에 솟구친 천문봉 아래 주차장에는 이미 도착한 두 대의 헬기가 프로펠러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그 옆으로 세 번째 헬기가 착지하려는 순간 천지 저편에서부터 짙은 안개가 빠른 속도로 몰려오면서 십여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헬기에서 내린 중국인 기사가 먼저 와서 대기 중이던 훠치산과 그의 부하들에게 여유롭게 웃으면서 다가갔다.
제법 거만한 폼새로 훠치산에게 악수까지 청했던 것은 자신이 은하 일당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만큼 알아서 잘 대접하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그렇잖아도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던 훠치산이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중국인 기사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그런가 싶더니 인정사정없이 볼때기를 연속적으로 후려갈긴 뒤 훠치산의 부하들에 의해서 강제로 무릎 꿇렸다.
그제야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한 중국인 기사가 훠치산의 발아래 바짝 엎드려서 죽을죄를 지었다며 싹싹 빌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다소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훠치산 특유의 쇳소리 섞인 고음이 신경질적으로 난사되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증표다.
“나 지금 극한으로 열받아 있으니까 빨리빨리 말해!
배은하와 함께 있던 연놈들이 모두 몇 명이야?”
초긴장 상태에서 훠치산이 갑자기 몇 명이냐고 묻자 중국인 기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던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그러자 화를 다스리지 못한 훠치산이 오른 구둣발로 중국인 기사의 얼굴을 가격하는 몸짓을 취했다.
“다섯 명인가 여섯 명쯤 됩니다!”
잔뜩 겁먹은 중국인 기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훠치산이 일어섰다.
“한두 놈도 아니고 대여섯 놈이라면 찾기는 쉬울 거야 그렇지?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여기서 빨리 찾아보자고!
살고 싶으면 반드시 찾아내야 될 거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중국인 기사를 앞장세운 훠치산 일당은 이른 아침부터 백두산 천지를 구경하기 위하여 산에 올랐던 수백 명의 인파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녔다.
오늘 훠치산은 왕 회장으로부터 마지막 경고까지 받았던 터라 일이 잘못될 경우 자신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훠치산은 지금 오직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중국인 기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거칠게 재촉했다.
반면에 중국인 기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 대신 자신의 미숙한 행위에 대한 회한으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당국의 수배를 받던 중요 외국인을 고발했을 때는 영웅대접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수모나 당하려고 조선인들을 배신하고 당국에 협조했었나 생각하니 회한의 감정이 울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만큼 한가한 처지가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그 또한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충실한 밀고자의 역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장백산천지회와 공안들이 북파코스의 중국령 천지에서 백두산의 안개와 싸우고 있었을 때 짙은 밤색의 9인승 SUV차량은 서파코스를 이용하여 유유히 백두산을 올랐다.
정 과장이 자신의 손목시계로 확인한 시각이 오전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안개에 둘러싸인 백두산의 풍경은 오늘의 대장정을 환영하는 오히려 좋은 환경이 되어 주었다.
드디어 1442 계단이 보이기 시작하자 미니 탐험대의 상윤 대장이 적당한 지점에서 차량을 세우게 했다.
“오늘 정 과장님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인솔하겠습니다!”
정 과장이 은하의 복장상태를 가만히 살피고 있었을 때 은하는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귀덮개모자를 꺼내어 머리에 썼다.
온전한 형태의 등산복 차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 경선이 시장 갈 때 입던 겨울복장이라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일월 한겨울에 백두산을 종주하는 행장으로서는 미덥지가 않았던지 정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은하의 목에 감아주었다.
“지금도 전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제 판단은 잠시 유보시키고 여러분들의 무사 귀환만 빌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특히 배은하 씨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서 모쪼록 여러분들의 협조를 당부합니다!”
경은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배낭에서 빨간색의 새 등산화를 꺼내더니 은하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건 제가 예비로 준비한 등산화인데 이모님한테 드릴게요, 운동화보다는 그래도 나을 겁니다!”
경은이 건네준 빨간색의 등산화로 갈아 신은 은하가 자신에게 꼭 맞는다면서 깡충깡충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흡족해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 과장이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미니탐험대원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니탐험대가 1442 계단의 주변을 벗어나자 정 과장은 곧장 곽 차장에게 상황보고를 시도했다.
“차장님! 방금 배은하 씨와 남북대학생 네 명이 북중국경 지점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북중국경 지점이라니?”
“그게 말입니다, 사실은 지금 백두산 서파코스를 이용해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사히 넘어간다면 지금 시각이 열 시를 넘겼으니까 아마도 오후 두 시경에는 북중국경을 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어지간히 말려보았습니다만 배은하 씨의 의지가 워낙 강력해서 더 이상은 도리가 없었습니다,
고생한 기억 때문인지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저도 지금의 이 상황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 이곳의 사정으로 볼 때 배은하 씨가 국내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루트인 것은 사실입니다”
“휴∼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나중에 따져볼 일이고 이미 시작된 일이라면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그쪽에 꼬리라도 잡히는 날엔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니까 정 과장이 뒷수습을 잘하도록!”
곽 차장이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취한 제1차적 조치는 국정원장에게 보고하여 북한의 정찰총국에 이 사실을 신속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미니 탐험대의 안전한 복귀는 이제 북한당국으로 넘겨졌지만 곽 차장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누구보다도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 윤 비서관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애타게 기다리던 곽 차장의 연락을 받은 윤 비서관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곽 차장으로부터 목련꽃 배송작전이 잘못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지 일주일 만의 연락이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은하를 구출하여 지금 백두산을 넘어오는 중이라 한다.
아직 온전하게 은하의 안전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천신만고 끝에 장백산천지회라는 삼합회로부터 탈출하여 생존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윤 비서관의 가슴속에 억눌려있던 벅찬 감정이 용솟음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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