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법 바람은 서늘했지만 11월 초의 늦가을 태양은 아직도 따가웠다.
모처럼 팀원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하여 재단 인근의 단골 한식당을 찾았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잠시 마당 한 편에서 볼품없이 지고 있던 한 무더기의 코스모스를 바라봤다.
지난 계절 화려하게 꽃피었을 영광을 뒤로한 채 맥없이 고개 숙인 코스모스의 자태가 자못 처량해 보인다.
불현듯 잠시 잊고 있었던 은하의 얼굴이 떠올라 은하의 채취라도 맡아볼 요량으로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앗을 훔쳤다.
주저 없이 코에다 갖다 되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뇌리 속에 기억된 그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코스모스 향내를 맡으며 행복해하던 은하의 예쁜 얼굴만 더욱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때 국정원의 곽 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윤 팀장, 지금 어디 계시오?”
“재단 인근의 식당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이 작자들이 이제야 입을 열었는데 윤 팀장이 지금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신들이 실패할 경우는 곧바로 제2진이 국내에 잠입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미 들어와서 윤 팀장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어요.
이 자들은 중국에서도 대단히 과격한 삼합회 단체로 알려진 장백산천지단 소속이라고 합니다.
천지회는 음으로 양으로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조직이라는데 며칠 전에는 연길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학자 한분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분도 윤 팀장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쪽 정보라인에서는 파악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혹시 배 교수님이? 그럴 일이 없다며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길한 생각들이 엄습해 왔다.
“윤 팀장!, 오늘부터 우리 쪽 안가에서 지내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 요원들이 그쪽으로 출발했으니 혹시라도 수상한 자가 보이면 일단 자리를 피하고 내게 바로 연락 주시오”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오면서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급한 대로 우선 화단 앞 벤치에 앉았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눈도 침침해지면서 사물이 서로 겹쳐서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조여 오면서 머리가 어지럽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는 기분이다.
‘배 교수가 돌아가셨다고 에이 아닐 거야’를 반복적으로 되뇌는 사이 현기증이 더욱 심해지더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것을 참지 못하고 화단의 코스모스 군락지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헛구역질을 해됐다.
다행히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신물이라도 한바탕 토해내고 나니 현기증이 다소 진정되는 기분이다.
손수건으로 입가 주변을 닦은 후 하늘을 쳐다봤다
2년 전 등신불상 앞에서 내게 경고했던 그 단체가 바로 장백산천지회다.
지금 이들이 나를 해치기 위해서 2진까지 국내에 잠입시킬 정도라면 2년 전의 그 경고가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또다시 현기증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서야 하는데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지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뒤따라서 들어오던 사내가 혹시 나를 위해하려는 자는 아닌지 의심하게 되면서 갑자기 목 주위가 뻣뻣해졌다.
동료들이 앉아있는 안쪽의 구석자리로 걸어갈 때에는 어찌나 바삐 걸었던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앉았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얼굴색이 창백해 보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별일 아니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때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어느새 와이셔츠도 축축해진 상태다.
차라리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니 극도로 위축된 심리상태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오십 여 평 규모의 넓은 홀 안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이때 출입문 쪽에서부터 잔뜩 날이 선 회칼을 품속에 숨긴 채 나를 향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공격대상이 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굳어버린 내 몸은 무방비상태 그대로 벽을 기댄 채 방치돼 있었다.
괴한이 다짜고짜 운동화를 신은 채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자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품속에서 번쩍이는 칼을 꺼냈다.
내 옆자리의 팀원들은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인근 회사의 여자 사무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구석으로 피해 달아났다.
이 괴한이 회칼을 빼어 들고 정면 3미터 지점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그 앞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손님 두 명이 동시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다.
일어남과 동시에 한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 뭉치로 회칼을 든 손을 내리쳤고, 또 한 사람은 맨 손으로 괴한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두 사람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던지 조금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다.
괴한은 쓰러질 듯 말 듯 한쪽으로 비틀거리면서도 이내 중심을 잡고는 출입구 쪽으로 뛰어 나갔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나를 살려준 두 명도 괴한의 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지만 그를 추격하려는 의도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제야 식당 안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 밥상이 넘어지는 소리, 어린아이 우는 소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때 국정원 요원들이 들이닥쳤지만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요원 하나가 나를 일으켜 세웠을 때 난 절반쯤은 혼이 나가버린 사람이 되었다.
“과장님께서 안가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이 비상한 상황에서 나의 선택권은 없었다.
그들의 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을 때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불현듯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디선가 귀에 익은 컨츄리 송이 울려 퍼졌다.
음률이 반복되는 것으로 봐서는 누군가의 휴대폰 벨소리 같은데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윤 팀장님, 전화받으시죠?. 팀장님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운전을 하던 요원의 재촉을 받고서야 난 잠에서 깨어났다.
단 몇 분의 단잠에 불과했지만 마치 몇 시간을 잔 것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휴대폰의 화면을 보니 발신지가 표시되지 않는 전화가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윤 선생!, 아무 말 마시고 듣기만 하시라요.
방금 우리 쪽 동무들이 선생의 목숨을 구했을 겁니다.”
“옛? 그럼 누구?…”
“듣기만 하시라요. 지도자 동지께서 윤 선생을 보호하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리셨단 말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윤 선생의 애국적인 행위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 명심하시라요!.
장백산 천지단 아새끼들은 한번 공격목표로 정하면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는 독종들입니다.
길게 말할 수는 없갔지만, 저놈들 뒤에는 중국 정부가 버티고 있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들이 매번 선생을 지켜드릴 수가 없으니 차라리 국정원 쪽의 보호를 받으시라요.
우리 민족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선생이 반드시 무사하셔야 됩니다. 고럼!”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아서인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조수석에 앉은 요원이 귀를 쫑긋거리는 표정으로 무슨 전화냐고 물었지만 난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는 고풍스러운 덕수궁 돌담길의 운치를 구경하면서 끊임없이 돌고 돌았다. 마치 어디론가를 향해서 미로 찾기를 하는 듯하다.
어느 순간 차는 4차선의 대로변을 질주하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희궁 앞을 지나쳐서 광화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을 건너는 행인들을 기다리느라 잠시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하는가 싶을 때였다.
갑자기 삼십여 미터 후방에서 덤프트럭 한 대가 무서운 기세로 질주해 왔다.
불과 2 ~ 3초의 짧은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피하나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꽝!”
고통조차 느낄 겨를도 없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중단돼 버렸다.
갑자기 암흑의 천지로 변하더니 깃털처럼 그냥 내가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천지에서 이제 나를 느낄 수 있는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는지도 모른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매캐한 소독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단지 후각으로만 느낄 뿐이다.
나는 어느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는 다른 육신들과 함께 침대 한 칸씩을 차지한 채 누워있다.
산소마스크를 통해서 숨을 쉬고, 목으로 호스를 꽂아 강제로 가래를 뽑아내고 있다. 혈관주사를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중이다.
가끔씩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당직 의사가 랜턴을 비추며 내 눈을 들여다볼 때를 제외하면 보통 때는 적막강산처럼 조용하다.
또 잠이 오기 시작한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느 사이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난 캄캄한 절벽 위를 조금씩 기어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용을 쓰고 있지만 사실 하루에 단 한 발짝 올라서기도 어렵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현기증이 나서 그냥 몇 시간을 그대로 쉬어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까마득한 하늘에서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 교수님의 손길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내 얼굴과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야지. 벌써 두 달째 이러고 있으면 어쩌나, 이 무심한 사람아!.”
서 교수님의 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을 난 교수님의 따듯한 손길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오른손을 꼭 부여잡고 계시는 교수님의 양손에서 전류를 타고 그 뜨거운 열기가 내 손으로, 가슴으로 전해진다.
“내가 일전에 자네에게 말한 적이 있었지, 연초에 세미나 참석차 북경에 다녀온다고, 그래서 이번에 가게 되었네.
내 돌아오는 길에 연변에 한번 들러볼 생각이야. 배 교수란 양반도 만나보고 또 은하라고 했었지?
그 왜 자네가 색시감으로 점찍어두었다는 처자 말이야. 가는 길에 꼭 만나보고 돌아오겠네.
내가 다녀올 때까지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보자고. 그래서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지 이 사람아!.
자네 나하고 꼭 약속하는 거야, 응?”
서 교수님이 내손을 힘껏 부여잡아주신 덕분인지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갔다.
북경에서의 세미나 일정을 모두 마친 서 교수가 연길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1월 초순의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 때였다.
하루 종일 펑펑 쏟아지는 눈발은 어느 사이에 온 연길시내를 새하얗게 뒤덮었다.
서 교수는 택시를 잡아타고 연길시장 귀퉁이의 허름한 상가밀집지역에 자리 잡은 최 씨 부동산중개소를 찾았다.
썰렁한 느낌의 부동산사무실에는 한동안 사람의 흔적이 없었던 듯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어디선가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 안쪽에서부터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뉘시오?”
“죄송합니다만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서 교수가 방금 인기척이 들렸던 안쪽의 내실 방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최 씨는 나와 보지도 않고 얼굴만 비쭉 내어 밀며 이 낯선 방문자를 멀거니 쳐다볼 뿐이다.
“여기가 혹시 배 교수라는 분이 사시는 데가 맞으신지요?”
배 교수를 찾아왔다는 말에 최 씨가 경계의 눈빛으로 서 교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배 교수는 왜 찾으시오?”
“아하, 제가 똑바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최 씨는 그제야 다소간 경계의 마음을 풀고는 서 교수를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냉방에 그냥 앉히기가 안 됐던지 장롱에서 방석 하나를 내어왔다.
“한국에서 오셨다고요? 우리 배 교수를 만나시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배 교수님은…”
배 교수를 찾는다는 말에 최 씨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 주위를 닦기 시작한다.
얼마 후 웬만큼 마음의 정리가 되었던지 서 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배 교수 그 사람, 두 달 전에 이 세상을 버렸습니다.
날 남겨두고 자기 혼자서만 저 세상으로 가버렸단 말입니다.”
그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은 주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아예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서 교수는 벽면 위에 걸려있던 영정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으로나마 처음 대하는 모습이었지만 과연 민족사학자다운 꼬장꼬장한 기운이 넘쳐났다.
“갑자기 무슨 사고라도 있었습니까?”
이제는 다소 진정되었던지 최 씨가 영정사진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예, 사고가 있었지요. 그 놈들이 우리 착한 배 교수를 해치고 말았지요.
생전 남에게 해코지 한번 안 해 본 착한 우리 배 교수를 그 불한당 같은 놈들이 해쳤단 말입니다!.”
배 교수가 테러로 숨졌다는 말에 서 교수는 짐짓 놀라는 표정이다.
윤 팀장도 이 무렵 사고를 당하지 않았던가!.
두 사고 사이에는 우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서 교수는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요?”
최 씨가 담뱃갑에서 담배한대를 슬쩍 밀어 올리더니 서 교수에게 권했다.
서 교수가 사양하자 자신의 입에 물고는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다시 배 교수의 영정사진을 올려다보며 허공으로 연기를 쏘아 올리더니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전부터 우리 배 교수를 못살게 굴던 작자들이 있었어요.
‘중국인으로 살기 싫으면 중국 땅을 떠나라’고 시도 때도 없이 협박하던 자들이 있었지요.
그 작자들한테 당한 게 분명합니다.
그놈들한테 납치되어서 심장에 총을 맞았습니다. 총을 맞았다고요! 이런 천하의 죽일 놈들.”
“그래, 범인은 잡았습니까?”
서 교수의 이 말에 최 씨가 이번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다 한통속인데 그 놈들을 어떻게 잡아요?
아무도 못 잡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이 간도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죄인인 거죠.
그런데 우리 배 교수와는 어떻게 되시는지…”
그제야 서 교수는 자신의 신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혹시 2년 전에 여기로 출장 왔던 윤 팀장을 기억하십니까?”
“윤 팀장이라면? 동북아 무슨 연구원이라고 하던 윤 선생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 윤 팀장이 내 제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꼭 한번 들러서 배 교수님과 약주 한잔하면서 교류해 보라는 당부가 있어 들렀는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는지,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따님이 한 분 있는 걸로 압니다만…”
“네, 있지요. 우리 은하가 있지요.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네.
은하에게 연락을 넣어 볼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최 씨는 자신의 오래된 구형 폴더폰으로 은하에게 연락했다.
“은하야!,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어! 그래그래 어서 와봐라.”
은하가 올 때까지 차라도 대접하겠다며 최 씨가 부엌으로 간 사이, 서 교수는 방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벽의 한 면을 독차지한 책장에는 평소 배 교수의 관심사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중국아이들의 역사교과서며 고구려 발해유적지에 대한 관광안내 책자들, 그리고 동북공정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여러 권의 자료철들 까지,
그중에서도 영정사진 바로 밑에 떡하니 붙어있는 동북삼성지방의 큰 지도가 퍽이나 인상적이다,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되어 토문강 송화강 흑룡강을 따라서 붉은색으로 영토표시를 한 후 파란색 글씨로 ‘통일한반도의 고토회복지역’이라고 써놓았다.
서 교수는 배 교수란 사람을 여태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 척박한 간도 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가슴 한가운데가 짱 해졌다.
그나저나 윤 팀장이 사랑하는 처자가 지금 온다고 하지 않은가.
서 교수는 윤 팀장의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최 씨가 작은 찻상에 녹차를 준비하여 들어왔을 때 뒤이어서 은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뛰어서 왔던지 그녀의 얼굴에는 몇 송이의 땀방울까지 맺혀있고, 최 씨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인사 올려라. 한국에서 오신 윤 선생의 스승님이시란다.”
목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단정하게 머리핀으로 묶은 모습,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청바지가 오히려 조화를 이루는 한눈에도 매우 단정한 느낌의 처자였다.
은하가 다소곳한 몸동작으로 서 교수에게 큰절로 인사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서 교수도 앉은자리에서 함께 허리를 굽히며 마주 인사했다.
“오늘 이렇게 고운 아가씨를 만나고 보니 우리 윤 팀장이 가지고 있던 애틋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은하 씨.”
예의 바르게 무릎 꿇은 자세로 은하가 서 교수와 최 씨에게 녹차를 얌전하게 따라 올렸다.
최 씨가 은하의 눈치를 살피면서 서 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윤 선생 그 양반은 잘 지내는 거 맞죠?
2년 전,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간 뒤로 이내 우리 은하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라니 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서 교수는 난감했던지 묵묵부답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이때 은하가 무안한 표정으로 최 씨를 제지하듯 말했다.
“아저씨는 사정도 모르시면서…”
잠시 후 은하가 서 교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윤 선생님은 무고하게 잘 계시는지요? 바쁘셨던지 몇 달째 답신이 없으셔서…”
이번에도 서 교수는 아무 말없이 팔짱을 낀 채 앞 벽의 고토회복지역이라는 글씨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 모습에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지 은하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 우리 윤 선생님은 무탈하게 잘 계시는지요?”
그제야 서 교수도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해주려는지 은하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결심했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은하 씨,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이 말에 은하는 벌써부터 눈물보따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은하가 서 교수의 무릎 앞으로 다가앉으며 어서 빨리 이야기를 해 달라는 표정이다.
“두어 달 전에 사고가 있었어요.”
서 교수가 여기까지만 말하고 또다시 고토회복지역이라는 글씨를 응시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런데 은하는 이미 어떤 불길한 소식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최 씨가 서 교수한테 다그치듯 말했다.
“윤 선생한테 사고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예,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어떻게 많이, 많이 다쳤습니까?”
은하가 간절히 매달리듯 서 교수에게 또다시 다가앉으며 묻자 서 교수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은하의 손을 꼭 쥐더니 사고 소식을 알려 주었다.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어요. 은하 씨 미안합니다.”
순간 은하가 부엌으로 뛰쳐나가더니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죽여가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십여 분을 그렇게 울 때까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평상심을 회복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서 교수는 어젯밤부터 묵고 있던 백산호텔에 여행 가방은 그대로 남겨둔 채 간편한 복장으로 나섰다.
서 교수가 호텔 앞마당을 거닐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창우가 운전하는 4륜구동 7인용 승합차가 은하와 최 씨를 태우고 호텔주차장에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배창우라고 합니다. 제가 백두산까지 모시겠습니다. 옆으로 타시죠.”
서 교수는 지금 이들과 함께 백두산천지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서 교수는 은하만 동의한다면 함께 한국으로 건너가서 윤 팀장을 만나게 해 줄 작정이었다.
비록 의식은 없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서 교수는 어제저녁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국정원의 곽 과장에게 은하의 한국체류 비자발급을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곽 과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한국인과 거의 같은 권리인 F4비자를 발급받는데 반하여,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F4비자를 발급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중국동포들은 2007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무연고 동포 방문취업비자인 H2비자를 발급받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래서 곽 과장은 병원 측과 협의해서 은하를 윤 팀장의 전담간병인으로 등록하는 조건으로 H2비자를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다섯 시간을 달려가는 동안 모두는 차창밖의 먼산을 바라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 땅은 반만년 동안 일관되게 우리 민족의 숨결이 지배하던 땅이다.
그 때문인지 서 교수는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 길이 결코 낯설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일 간의 불법적인 간도협약 이후 지금은 중국인으로 살기 싫으면 이 땅을 떠나라는 거친 협박을 받는 동토의 땅이 되고 말았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배 교수처럼 서 교수는 지금 감당하기 힘든 서글픔으로 다가왔다.
백두산 천지에 도착하여 은하가 준비해 온 작은 제사상이 차려졌고, 모두는 함께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비록 구름에 가려서 천지를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천지에 녹아든 배 교수의 영혼을 기리는 예식은 그 옛날 고구려의 제사장이 하늘에 제사 지내듯 그렇게 엄숙하고도 장엄한 모습이었다.
이때 백두산의 기운이라도 되는 양 천지에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의 기세가 대단했다.
무방비로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움츠려드는 기색 하나 없이 배 교수의 영혼과 정면으로 교감했다.
창우는 자신 대신 아버지가 흉탄에 쓰러졌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다.
은하는 휘몰아치는 찬바람의 기세 때문에 홍조 띤 얼굴이 되었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표정이 되어 구름 속의 천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최 씨는 몹시도 그리운 친구에게 연거푸 술잔을 뿌려주면서 슬픔을 억누르려는 듯 입술을 깨어물었다.
서 교수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리더니 술잔을 천천히 들어 천지를 향해서 힘껏 던지며 외쳤다.
“교수님!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으로 다시 부활하시어 백척간두에 선 우리 민족을 지켜주소서.”
다시 시작이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발 또 한 발 힘겹게 전진하고 있다,
저 위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부터 비추는 한줄기의 빛을 향하여 난 오늘도 힘겹게 올라서고 있다.
심장의 박동소리는 다소간 힘차졌지만 그 외의 모든 기능은 여전히 정지된 상태로서 의식이 떠나버린 육체는 단지 아무 생각 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일까?
희미하게나마 나를 인식하는 자의식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쿵쾅거리더니 뇌혈류에도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희미하지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다.
순간, 톡 하고 내 손가락이 튀었다.
그리워하던 몹시도 그리워하던 그 냄새!,
그 향기가 내 폐 속으로, 내 심장 속으로, 나의 모든 감각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간혹 청명한 가을날 높은 산에서 맡을 수 있었던 자연 그대로의 향기!
상쾌한 자연 속의 그 향기가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자극하면서 내 몸속의 세포를 동시에 깨우고 있다.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급기야는 나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혈류가 힘차게 운항하는 기분이다,
이제 산소호흡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자가호흡이 가능해졌다, 내 맥박도 정상을 회복하여 힘차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맑은 정신!, 활기찬 육체!,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한숨 푹 자고 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침이 되어서 불현듯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서 눈부시도록 밝은 햇살이 들어왔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햇살이던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내게로 몰려와 요란법석을 뜬다. 너무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햇살은 더욱 밝아지고 내 몸에도 열기가 전해진다.
시끄러운 소리가 다소 익숙해지려고 할 때 내 침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언뜻언뜻 나의 뇌리 속에 기억된 기분 좋은 향기와 함께….
드디어 중환자실에서 2인용 일반병실로 올라와 4월 초의 따스한 봄볕이 나의 온몸을 쪼여주고 있다.
사고를 당한 지는 5개월 만이고, 은하가 내 간병을 자청하여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지는 3개월 만이다.
올 초 서 교수님이 은하를 데리고 왔을 때는 내 얼굴이나 한번 보여주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은하의 비자를 빨리 만들기 위하여 편법으로 H2비자를 만들어야 했고, 이때 은하를 내 전담 간병인으로 등록시켰다.
그런데 은하는 나를 보자마자 실제로 내 간병인을 자처하면서 지금껏 지극정성으로 나를 보살펴 주었다.
은하의 이런 모습을 처음에는 어머니나 서 교수님도 며칠간만 저러다가 말겠지 생각했지만 몇 주가 지나도록 은하의 지극정성이 멈추질 않자 두 분은 그제야 은하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은하의 간병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그야말로 헌신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잠자리도, 식사도, 목욕까지도 모두 병원에서 해결하면서 오직 나의 간병에만 모든 정성을 쏟았다.
심지어는 나의 기저귀도 거리낌 없이 갈아주고, 물수건으로 내 몸도 깨끗이 닦아주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따듯한 온도의 바람은 어느덧 계절이 초여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고 있다.
사고를 당한 지는 이미 8개월째로 접어들었지만 나의 온전한 의식은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도 은하는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창우의 간곡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정히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조만간 직접 들어와 강제로라도 끌고 가겠다며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게 점심을 먹여준 은하가 내입을 닦아주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우리도 재활치료를 해봤으면 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꼭 그렇게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몸이 굳어져서 영원히 못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 힘들겠지만 우리 한번 해봐요? ”
이렇게 하여 오늘부터 곧바로 재활치료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이 시작되었다.
침대에서 똑바로 앉히기 위하여 은하가 나의 양어깨를 힘껏 잡아당길 때 나도 안간힘을 다해서 용을 썼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모습을 자신의 침대에 누운 채 무기력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창백한 표정의 창가 쪽 환자가 제아무리 용써봤자 소용없으니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하는 눈빛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난 거저 착한 여인의 안쓰러울 정도의 강한 집착에 협조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집념의 여인을 도와주고 싶어 나를 일으켜 세우려는 눈물겨운 호소에 응답하고 싶었다.
가느다란 몸으로 얼마나 피곤했던지 은하가 보조침대에 앉아 기진맥진한 상태로 내 침대에 얼굴을 엎드렸다.
이때도 난 홀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두 팔을 침대바닥에 대고 일어서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을 때 창가 쪽의 환자는 혹여라도 내가 먼저 일어나 버릴까 봐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자신만 홀로 침대에 누워서 무의욕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매일매일을 그렇게 몸을 비틀며 일어나려고 용을 쓰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팔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은하는 어깨를 당기고 난 팔에 힘을 주면서 사력을 다해서 몸부림치기를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새벽이었다.
이날도 밤새 혼자 몸을 비틀며 일어나기 위하여 사투를 벌였다.
침대에서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던 순간 갑자기 허리에서 힘이 솟구치더니 나 홀로 허리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이 기적 같은 모습을 밤새 지켜보던 창가 쪽의 환자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침대 위에서 심하게 뒤척였다.
이 소리에 은하가 깨어났다.
내가 떡하니 침대에서 앉아있는 모습을 본 은하가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창가 쪽의 환자도 이제는 두려움보다는 부러움의 얼굴이 되어서 우리를 지켜봤다.
이날 오후, 난 처음으로 은하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실려서 병원마당을 오가며 산책을 즐기고 있다.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앙증맞게 봉우리 지면서 머지않아서 울긋불긋 온갖 빛깔들로 피어날 것 같았다.
은하가 그중에서도 가장 튼실한 놈으로 줄기 하나를 꺾어 내게 건네주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한다.
코스모스 특유의 톡 쏘는 향내가 코를 찌르며 이유도 없이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 기억나십니까? 연변에 오셨을 때 코스모스를 꺾어서 제 머리에 꽂아주지 않으셨습니까?
어서 쾌차하셔서 그때처럼 제 머리에 코스모스를 꽂아주셔야 합니다!”
어느덧 병원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은하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 온 것이다.
그동안 은하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눈물겨운 재활훈련을 하였고 어느덧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우린 어제와 마찬가지로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군락지로 걸어간다.
이제는 목발을 짚으며 나 홀로 걷고 있고 은하가 자기 머리에 코스모스 꽃잎을 꽂은 채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들만의 단골 나무벤치에 앉았다.
은하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내 오른손을 자신의 왼손으로 맞잡은 채 말했다.
“선생님!, 사실 전 요즘이 무척 행복하답니다,
선생님과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그렇지가 않으십니까?
그런데 맨날 나 혼자서만 이야기하고 에이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행복하다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내 양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더욱 힘주어 포개어 잡은 채 내 눈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선생님!, 이제 몸은 걱정 없습니다, 문제는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불굴의 투혼으로 선생님의 몸을 일으켜 세웠듯이 이제부터는 그 마음을 일으켜 세우셔야 합니다!,
선생님의 이 맑은 눈을 보면 전 단번에 알 수가 있답니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해내실 수 있습니다!”
은하는 계속 뭐라고 하면서 중얼중얼 말하고 있었지만 난 언제나처럼 아무런 말이 없다.
아직도 자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백치 상태이므로 아무런 말없이 은하의 말만 듣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 다시 새로운 봄이 다가왔다.
그동안 재활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으로 이제는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병원에서도 이제 더 이상의 치료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어머니와 서 교수님이 의논하여 퇴원을 결정했다.
어머니는 나를 부산으로 데려가면서 은하도 함께 가주었으면 했지만 염치없는 생각이라 차마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서 교수님이 창우와 통화하여 은하 문제를 상의해 보았지만 창우의 입장은 한마디로 단호했다.
그다음 날로 곧바로 날아온 창우는 더 이상은 곤란하다며 강제로 은하의 손을 이끌고 연변으로 돌아가 버렸다.
언제 정상인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여동생을 맡겨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후의 한적한 시간, 난 고향마을의 뒷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
사실 낚싯대만 드리웠지 낚싯바늘도 없었고 푯대도 없었다.
단지 물결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눈동자를 따라가면서 무엇인가를 한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가을이다. 우리 마을 길가를 따라서 울창한 코스모스 군락들이 끝도 없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난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코스모스 꽃길을 걷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코스모스 꽃길을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한편 은하는 지난봄 창우의 손에 이끌려 연변으로 돌아온 후 창우의 권유로 또다시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전과 같이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이면 오늘 있었던 하루의 일과를 꼼꼼하게 기록한 일기형식의 이메일을 매일같이 나에게 보냈다.
말미에는 어김없이 ‘오늘도 선생님이 무척 그립습니다’를 빠뜨리지 않는다.
사고 후 2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직도 온전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지만 그런데도 은하는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회복될 거라는 믿음보다는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은하는 지금도 나를 간호하면서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오빠의 거센 반대를 물리칠 명분이 없었다.
애당초 나와는 결혼만 약속했을 뿐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무심한 시간은 흘러 다시 2년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연말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여 은하는 처량한 마음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북경시내의 옥탑방 평상에서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사로잡혔다.
지금 은하가 바라보고 있는 이 별들은 6년 전 나와 함께 연길시내에서 바라보았던 바로 그 별이다.
그러나 별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인지 그때와는 다른 별인 것 같았다.
그때는 희망을 속삭이는 별이었지만 지금은 기약 없는 이별만 노래하고 있으니.
은하는 또다시 나에게 보낼 메일을 작성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로서 감회가 무척 새롭습니다, 선생님과 헤어진 지 2년 하고도 8개월이 지났습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새해를 비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겠지요,
한해의 마지막 태양이 사라졌듯이 선생님을 괴롭히는 나쁜 기운들도 마지막 태양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힘내십시오!, 비록 선생님 곁을 떠나 있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은하가 함께 하겠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오늘도 선생님이 무척 그립습니다」
여기는 백두산의 최정상 장군봉이 올려다 보이는 더 넓은 백두산 자락이다.
‘東爲土門 西爲鴨綠(동위토문 서위압록)’의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진 백두산정계비를 지척에 두고 1887년 조청(朝靑) 간의 공식적인 제2차 국경회담인 정해담판이 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회색 천막 안에서는 넓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국의 협상대표들이 마주 앉았다.
건너편에는 원세개를 중심으로 청나라의 협상대표들이 자리를 잡았고, 이쪽 편에는 토문감계사 이중하를 중심으로 조선 측 대표들이 자리를 잡았다.
원세개의 탁자 위에는 서슬이 시퍼런 칼 한 자루가 칼집에서 빼어진 채 놓여있다.
탁자 위에서 발산하는 칼날의 살기로 인하여 회담장의 분위기는 자못 살벌하기만 하다.
그 광경 하나만으로도 회담에 임하는 청나라 대표들의 무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원세개가 이중하를 손가락질하면서 매몰차게 호통 치기 시작했다.
“2년 전의 을유회담이 네놈의 쇠심줄보다도 질기다는 그 고집불통으로 결렬되었다는 것이 정히 사실이더냐?”
이중하를 노려보며 마치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핏대를 세우던 원세개가 옆에 세워져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가리키며 또다시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네놈이 저 정계비 상의 토씨 하나를 핑계 삼아서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이 동쪽의 경계라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렷다!.”
이중하도 밀리지 않겠다는 태도로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의 눈빛은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가 서려있다.
“백두산정계비는 15년 전, 양국의 합의로 세운 국경비이거늘 이제 와서 귀측이 이를 부정한단 말이오?”
이 말에 분노한 원세개가 탁자를 두 손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네 이놈!, 토문강은 도문강으로서 두만강의 만주 식 이름이라고 내 진즉부터 일러주었거늘, 그런데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토록 생떼를 부린단 말이더냐?”
이중하도 원세개를 노려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작 생떼를 부리는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귀측인 것 같소이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 강이거늘 대국이 대국답지 않게 어찌 그런 생떼를 부린단 말입니까!”
이때 원세개가 치밀어 오른 화를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던지 탁자 위에 올려둔 그의 칼을 들어 이중하의 목에 들이대었다.
서슬 퍼런 광채가 장막 안을 한 바퀴 휘돌았다.
“이런 건방진 놈!. 우리가 너희 나라를 구해준 은혜를 잊었더란 말이더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평정해 주었던 그 공을 갚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날뛴다더니, 무얼 알고나 까불어야지!”
이중하는 오히려 두 눈을 더욱 부릅뜬 채 원세개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국토는 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소이다!”
이때 칼을 잡은 원세개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이놈! 정녕 죽고 싶더란 말이지. 오냐. 소원대로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단칼에 베어주마!”
그런데도 이중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오히려 비웃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웃음소리에 자제력을 잃어버린 원세개가 더 이상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이중하의 목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순간 이중하의 상투 뭉치가 탁자에 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이쯤 되자 원세개도 질렸다는 듯 칼을 탁자에 내려 꽃은 후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마치 백두산호랑이가 포효하듯이 이중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온 백두산천지를 뒤흔들었다.
‘우하하하하!, 우하하하하!,’
지축을 뒤흔드는 이중하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난 번쩍하고 눈을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뻑 비를 맞은 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동안 꽉 막혔던 머릿속의 혈류가 팽팽하게 순환되는 기분이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이제는 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달력을 보니 어느덧 마흔아홉 살의 내가 되어 있었다.
나의 자의식을 인식할 수 있는 내 몸의 주인으로서 다시금 되돌아온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을 쳐다보며 내 두 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때려보았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뺨에 얼얼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었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두 손을 들어 힘차게 만세를 불렀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 이 기쁜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악몽 같았던 긴 동토의 겨울에서 벗어나 이제 희망찬 봄볕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몸도 마음도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오자 어머니는 온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후배들의 주선으로 모교의 풍물패 동아리가 출동하여 흥겨운 놀이판을 벌여주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서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백색의 긴 끈을 단 상모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재주를 부리는 상모 잡이가 등장하자 흥을 주체하지 못한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서 한바탕의 춤판이 벌어졌다.
마루에 앉아서 이 모습을 구경하고 계시던 어머니를 동네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시고 나왔다.
어머니도 사양치 않으시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셨다.
나는 지금껏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신명 나게 춤을 추시는 광경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흥겨운 모습을 보자 어찌 된 일인지 나 역시도 사물놀이패의 장단에 맞춰서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의 신명이 우리 몸의 세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가 보다.
어느새 서 교수님과 재단의 양 이사장님도 우리와 함께 어깨춤을 추고 계셨다.
새 생명을 얻게 된 나를 축하하는 자리에 어느 누구보다도 신명 나게 춤을 추시던 양 이사장님이 나를 힘차게 껴안으며 말씀하셨다.
“윤 팀장, 이제 다시 재단으로 복귀해야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자네 자리는 지난 5년 동안 공석인 상태로 비워두었다네.”
난 이사장님의 호의에 감사드린다고 말하며 잠시 다녀온 뒤 정식으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두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녀를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 난 사전연락도 없이 북경공항에 내렸다.
서 교수님이 미리 창우에게 전화하여 행방을 알아둔 상태였으므로 은하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1월의 찬 공기가 매서운가운데 만리장성을 오르기 위하여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한국관광객들의 표정은 너나 할 것 없이 밝아보였다.
나는 마지막 순서로 케이블카에 올랐다.
단 두 명만 실은 케이블카가 고속으로 저 하늘 위 만리장성을 향해서 거침없이 내달렸다.
석양이 타오르면서 내가 쓰고 있던 짙은 선글라스 창으로 붉게 물든 석양이 빨려 들면서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이때 옆에 앉은 여인을 다짜고짜도 없이 와락 끌어안았다.
여인은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나의 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시자 비로소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손으로 내 선글라스를 벗기더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격하게 어루만지며 큰소리로 울었다.
내가 다시 힘차게 껴안았을 때 그렇게 우리를 태운 케이블카는 저 멀리 석양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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