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도강 Sep 19. 2024

백두산의 넋

19회

토요일의 오후시간, 주말이라서 그런지 길림성의 연길시장은 평소보다도 사람들로 북적인. 

야채상들의 좌판 사이로 장을 보러 온 사람들과 소리소리 지르는 상인들의 고함소리로 최 씨 부동산중개소 앞은 모처럼만의 활기로 넘쳐난다.      

  

그러나 주변의 활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열 평 남짓한 최 씨 부동산중개소는 낡은 부동산 간판만이 출입문 위에 초췌하게 붙어있다.

출입문의 왼쪽에는 ‘연변 조선인 향토연구소’라는 색깔 바랜 세로현판이 시월말의 늦가을 미풍에 흔들거렸다.      


오늘따라 콧수염이 더욱 촌스러워 보이는 최 씨가 양팔을 낀 채 자신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사무실 소파에는 중년의 사내 둘이 담배를 피우면서 장기를 두고 있고, 그 주위에는 두 명의 젊은이들이 목을 길게 내어 빼고서 장기판을 구경하고 있다.

   

이때 구경꾼 중 한 사내가 시계를 보기 위해 왼쪽 팔목을 걷어 올리자 산 모양의 파란색 문신이 드러났다.

그 사내가 옆의 다른 사내에게 눈짓하는 것을 신호로 신호를 받은 청년이 주변을 살피면서 안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간다.

배 교수가 기거하는 안쪽 내실의  ‘향토연구소’를 슬쩍 들여다보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후 배 교수가 출타를 하려는지 지팡이를 짚으며 중절모에 낡은 양복차림으로 나섰다.

그 순간 최 씨가 벌떡 일어나며 배 교수에게 묻는다.       

“어디 출타하시는가?”     

“응, 갑갑해서 말이야. 옛날에 살던 구룡촌마을까지 바람이나 쏘이고 오려고 하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렇게 골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가끔씩은 바람도 쏘이고 그래야지.

심심한데 나도 같이 가줄까?”     

“됐어, 자넨 가게 봐야지. 혼자 다녀옴세.”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씨의 호의를 뒤로한 채 뚜벅뚜벅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배 교수가 걸어갔다.     

배 교수의 뒷모습이 저만치 사라지자 장기판을 구경하던 두 사내도 사무실을 나섰다.

조금 전 배 교수의 내실을 염탐했던 사내가 휴대폰으로 연락을 시도하는 사이, 또 한 명은 은밀하게 배 교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지금 배 교수는 걸어서 두어 시간 거리인 연길시 외곽의 고향마을로 산책을 가는 중이다.

그는 가끔씩 드넓은 옥수수 밭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북조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천만다행으로  위원장이 의식을 회복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중국의 괴뢰정권이 들어설 뻔했다.

이것은 곧 동북공정의 제3단계로서 우리 민족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위원장이 회복된 후에도 북조선을 강하게 압박하여 기어이 기존의 계획을 밀어붙였던 중국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한국의 대북 지원으로 더 이상의 압박이 실효성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북송유관을 다시 가동함으로써 대북 압박 정책은 철회되었 예전의 유화정책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그래 같은 민족인 남과 북이 뭉친다면야 제깟것들이 어떻게 우리 민족을 당할 수가 있겠나!

중국의 음모를 물리치기 위해서도 어서 속히 통일이 돼야 돼,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우리 민족의 북방고토를 되찾아야 할터인데 ….’       

   

어느덧 눈앞으로 자신의 키보다도 큰 드넓은 옥수수 밭이 펼쳐졌다.

곧 수확을 앞둔 이모작의 옥수수는 갈색으로 잎이 말라있어 늦가을의 운치를 더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검정색 지프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더니 배 교수의 바로 옆에서 멈추어 섰다.

“거기 배 교수님 맞으시죠?”   

 

중절모 위로 비치는 오후의 따가운 햇살 때문에 잠시 눈을 찡그리던 배 교수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렇소만, 뉘, 뉘시오?”     

배 교수의 말과 동시에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십니다. 잠시 따라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다짜고짜 양팔을 하나씩 잡은 후 저항하는 배 교수를 지프차에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이때 배 교수의 지팡이가 길가에 떨어졌지만 지프는 그대로 출발했다.      

   

배 교수의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검은 눈가리개를 배 교수의 눈 부위에 묶으며 말했다.     

“소란 피우지 않고 얌전히만 가신다면 굳이 손까지는 묶지 않겠습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그, 그럽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그것만이라도 말해 줄 수 없겠소?”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한숨 주무십시오. 먼 길을 가야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청년은 그의 주머니 속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배 교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배 교수가 그의 손목에서 천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산 모양의 파란색 문신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행기를 탄 듯이 어질어질하더니 그대로 졸음이 밀려왔다.

손수건에 수면을 유도하는 마취성분이 있었던지 정신을 차리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몸은 무거워지고 눈까풀이 저절로 감기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은하가 품에 안겨서 울기도 했고 창우가 누군가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을 깨긴 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그런데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어쩐지 익숙한 길인 것 같다.

옆에 앉은 청년이 차창을 반쯤 열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결에 풀냄새며 흙냄새며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 길은 틀림없이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다.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우리의 영산 백두산!      

   

몇 시간을 잤는지, 얼마나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꽤 추운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벌써 밤이 된 모양이다.

드디어 물소리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공기가 깨끗해지면서 뽀송뽀송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때 옆자리의 청년이 양손을 뒤로하라고 한다.      

“이렇게 묶어야만 제가 혼나지 않습니다. 대신 느슨하게 묶었으니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고맙네.”     

“모쪼록 오늘 고분고분하게 행동하셔서 신체를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공안들도 우리가 하는 일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지프차가 정차한 후에도 곧바로 내리지 않았다.

최근에 중국 아이들이 즐겨 듣는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나는 이어폰을 배 교수의 두 귀에 씌워준 후에야 차에서 내리게 했다.

육중한 철문 소리가 나더니 청년들이 배 교수의 양팔을 하나씩 부여잡고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실 특유의 쾌쾌한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청년들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배 교수를 앉히더니 양손을 풀어준 후 눈의 안대와 시끄러운 이어폰도 벗겨주었다.

그제야 배 교수는 이제 좀 살겠다는 표정으로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다시 내어뱉는다.     

   

그의 머리 위 천장에는 작은 백열등 하나만 켜져 있어 불빛은 배 교수의 주위만 밝힐 뿐 여전히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와 함께 중년 사내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앞쪽으로부터 들려왔다.     

“오신다고 수고 많았습니다.”     

   

희미한 불빛을 의지하여 앞쪽을 응시하니 중절모자부터 양복 상하위에 구두까지 온통 흰색으로 치장한 자가 5미터쯤 전방에서 자신을 노려보며 앉아있었다.

양 옆에는 검정색 정장 차림의 청년들이 좌우에 버티고 서 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린 장백산천지회 단원들입니다”     

여기로 끌려오면서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자의 입으로 직접 천지회라고 말했을 때 배 교수는 오금을 저리며 새파랗게 질려갔다.


천지회는 동북삼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중화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주의 성향의 무자비한 폭력단체다.

지방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웬만한 폭행이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질러도 공안들조차도 묵인해 주는 실정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폭력이나 일삼는 삼합회조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오늘 선생에게 특별히 우리 조직을 소개해드리죠.

우리 천지회의 시초는 만주족의 성지인 장백산을 사수하기 위하여 340년 전에 만든 비밀 결사대였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잠시 해산되었다가 1962년 중조변계조약으로 다시 결성되었어요.

선생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청일 간에 맺었던 간도협약 때는 백두산의 두 번째 지류인 석을수를 그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장백산의 천지 대부분이 우리 중국령이었거든.      

그런데 멍청한 주은래가 일성의 비열하고도 간계한 계략에 넘어가서 최상류인 홍토수를 새로운 경계로 삼지 않았겠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장백산 천지의 육 할을 조선에 빼앗기는 통탄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소.

우리의 목적은 멍청한 주은래가 맺었던 굴욕적인 조약을 파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신령스러운 장백산을 온전하게 되찾는 것이오.

우리 단원들은 이 위대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치열한 장백산 공정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배 교수를 노려봤다.

이때 그들 중 한 명이 배 교수 앞에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놓아주고 다시 물러났다.

배 교수는 얼마나 목이 탔던지 생수를 단 번에 거의 반 병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간간히 지하실 위의 작은 창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만이 적막감을 깨우고 있을 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자의 낮은 음성이 다시 들렸다.     

배 교수 당신무엇 때문에 우리들의 공정을 방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이요?”     

배 교수는 이제야 이자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2년 전 향토연구소의 분기 토론회 때 몽둥이찜질을 가했던 패거리들이 바로 이 단체였지 않은가!

그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면서 심지어는 폭력과 경고를 일삼던 조직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짐작했다.      

배 교수는 그의 검정색 뿔테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 다시 안경을 썼다.

어차피 주눅이 들은 채로 앉아있어 보았자 이자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풀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는 오기가 발동하면서 왕 회장이란 자를 향해서 쏘아붙였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당신들이 바로 백두산 공정을 추진하는 핵심 세력이겠습니다.

내 짐작대로라면 여기는 백두산의 서문 아니면 남문 쪽이 되겠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여러분들이 운영하는 호텔의 지하실이겠습니다 그려.

그런데 대체 내가 여러분들이 하는 사업을 어떻게 방해했다는 겁니까? 그 연유나 한번 들어봅시다?”     

   

“지금 우린 당신 아들을 찾고 있소. 배창우를 말이오.

이 친구한테 뭘 좀 물어보려고 우리 단원들을 보냈더니만 그새 줄행랑을 치고 말았더란 말이오.

당신 아들 창우는 지금 어디에 있소?”     

   

배 교수는 이 험악한 자들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고 있다는 말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들 걱정에 사지가 떨려오면서 조금 전의 당당했던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도대체 왜들 이러시오? 우리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배 교수의 이 말에 왕 회장은 콧방귀까지 뀌어가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흥,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시겠다고? 그렇다면 내 말해주리다.

지금 조선에는 그동안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해 왔던 우리 쪽 군부세력이 뿌리째 뽑혀버렸소.

영감,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당신 아들이 조선 관리한테서 전해 들은 중조 비밀회담 소식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에 고변을 했단 말이지.

그래서 한국의 국정원에서 공작하여 이것을 폭로하는 전단지를 보름 동안이나 조선 상공에 뿌려 댔거든.

그러니 정 위원장이 깨어났을 때 어떻게 됐겠어?”     


말을 마친 왕 회장은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어둠 때문에 배 교수는 왕 회장 일행을 바라수는 없었지만, 배 교수 머리 위의 희미한 조명 탓에 왼쪽 벽면이 스크린이 되었다.

권총을 든 왕 회장의 그림자가 실감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동감 있게 상영되었다.     

“탕!, 탕!, 탕!”     

   

마치 지하실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커다란 총소리가 연이어 세 번 울렸다.

배 교수는 흠칫하며 그 자세 그대로 경직돼 버렸는다행히 실탄이 들어있지 않은 공포탄이었다.

이때 배 교수가 앉은 나무의자 아래로 힘없이 한가닥의 물줄기가 새어 나왔다. 

배 교수가 총소리에 놀라 그만 오줌을 싼 것이다.      

그렇잖아도 장시간 소변을 보지 못해서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밀폐된 공간에서의 총소리에 놀라 순간적으로 전립선에 힘주는 것을 놓쳐버렸다.


배 교수는 수치심에 오들오들 떨었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 회장이 방금 피우던 시거로 새 시거에 다시 불을 붙였다.

한순간도 손에서 시거를 놓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한 애연가임을 알 수 있다.      

“우리로부터 온갖 지원을 다 받으면서 단 한 번도 머리 숙이지 않는 저 몰염치한 자주성을 꺾어버리기 위해 우리가 언제부터 준비한 공정이었는데…”     

여기까지를 말한 왕 회장은 주먹으로 자기 앞에 놓인 탁자를 ‘쾅’하고 내리쳤다.      

“우리를 의식하여 아직까지 죽이진 않았다지만 하루아침에 그 뿌리가 뽑혀버렸단 말이야.

영감!, 이만하면 당신 아들이 우리 손에 죽어줄 죄로 충분하지 않겠소?”     

   

공포와 수치의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 배 교수의 몰골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이제는 아예 소처럼 뜨거운 오줌을 콸콸 쏟아내자 회장이 가소롭다는 듯 잠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감!, 당신은 동북삼성이 조선반도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심기를 끊임없이 건드렸었지.

그 근거로 삼는 것이 장백산 정계비에 기록돼 있었다던 동위토문 서위압록의 비석 문구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야.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봐 온  당신은 교수답게 곱게 논문이나 발표하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어요.

강연회를 연다, 어쩐다 하면서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행위를 한답시고 난리법석도 아니었지.

우리 입장에서는 당신의 그런 분열 반동적인 행위를 마냥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었지.

그래서 우리가 당시 힘을  써서 당신을 대학에서 쫓아냈지,

후로도 지속적으로 당신을 타이르고 경고했지만 끝내 당신은 우리말을 듣지 않았어요.”     


또다시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왕 회장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수신된 한통의 문자 메시지를 읽었다.

“좋소!, 당신 아들은 아마도 조선으로 도망친 것 같은데 이쯤에서 이 문제는 마무리 짓도록 하겠소.

단, 아들놈 대신 당신이 죽어주어야만 되겠소이다.

잘난 아들을 대신하여 그 아비가 십자가에 매달린다면 이 또한 값진 일이 아니겠소?

영감! 따지고 보면 당신 아들의 행위는 사실 단순한 실수 한 번으로 벌어진 일이었소.      

하지만 당신은 뼛속까지도 분열 반동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아들놈보다도 훨씬 위험한 인물이외다.

당신의 그 질긴 고구려 민족의식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위태롭게 생겼으니 어찌하겠소?,

우리나라가 향후 천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당신 같은 위험한 분열주의자는 우리 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오.”  


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앉았던 철제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넘어졌다.

그가 두세 발짝 앞으로 나서자 그를 좌우에서 호위하던 무리들도 동시에 앞으로 다가왔다.

왕 회장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주변은 역겨운 시거 냄새가 진동했다.


왕 회장이 손가락을 곧게 뻗어서 아까보다 더욱 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영감!, 당신과  위원장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그것은 말이오. 둘 다 너무 뻣뻣하다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 땅에서 나는 쌀로 밥을 지어먹고 우리 땅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면서도 겸손하기는커녕 우리 땅을 조선 땅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우겨 되고 있소.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겠소?      

 위원장, 그자도 마찬가지란 말이오.

현재 조선에서 사용 중인 원유의 90퍼센트를 우리가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식량이나 생필품도 우리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목숨 줄을 우리가 틀어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런데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더 달라고 부탁할 때도 머리 꼿꼿하게 쳐들고 큰소리치면서 더 내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소.

우리는 이것이 고구려의 자주성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그 자주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던 참에 당신 아들놈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소.

 이제, 당신 아들놈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당신을 죽임으로써 우리 중화제국이 받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보상받아야 되겠소이다.”      


회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물론 우리 사업을 방해한 죗값으로 처단해야 할 자가 한 명 더 있지,

한국에 있는 놈 말이오. 선생, 부디 안녕히 가시오.

다음 생에서는 다시는 이런 악연으로 만나지 았으면 합니다.

중국인의 넓은 배포로 웬만하면 인정을 베풀 터이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배 교수는 이제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방을 향해 빙긋이 한번 미소 짓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배포가 크다 하니 내 딱 두 가지만 부탁하는 바이오.

첫째는 내 가족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죽음은 나 혼자면 족하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배 교수 머리 위에 매달린 등불 때문에 여전히 벽면은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처럼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중국인은 배포가 크다 하니 두 번째의 약속 또한 꼭 지켜주기를 바라오.

나를 죽이거든 내 몸뚱이를 화장한 후에 백골이나마 백두산 천지에 뿌려주시오. 부탁하리다!”     

이번에는 깊은 침묵만이 흐를 뿐, 어둠 속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때 배 교수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백두산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절규하듯 외쳤다.     

전방의 어둠 속에서는 방음장치 장착을 끝낸 방음 총이 자세를 취하며 서서히 배 교수의 오른쪽 심장으로 조준되었다.

이번에도 벽면에서 총구의 그림자가 영화처럼 반사되었다.


고불고불 피어오르는 시거연기로 인해서 마치 감동적인 라스트신의 명장면이 만들어졌다.     

“간도 땅의 주인도… ”     

“탕!”      

전방의 어둠 속에서 불꽃이 한 번 번쩍 는가 싶더니 배 교수가 의자에서 튀어 오르면서 바닥에 꼬꾸라졌다.


단 한방으로 총탄이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했고, 배 교수는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심장에서 흥건하게 뿜어져 나오는 핏자국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우리 민족이다!’를 천천히 되뇌더니 이내 목뼈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천금만금 무겁게만 느껴지던 그의 검정색 뿔테 안경은 바닥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안경이 벗겨진 후 드러난 배 교수의 큰 눈동자는 마치 백두산 호랑이가 어둠 속을 노려보듯 매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밤늦도록 배 교수가 돌아오지 않자 최 씨와 은하는 배 교수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은하도 아버지를 따라 여러 차례 산책을 나선 기억이 있었던 터라 평소 배 교수의 산책로를 따라서 랜턴을 비추며 걸어갔다.     

옥수수 밭고랑 사이로 한참을 걸어가던 은하가 부러진 옥수수 대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평소 아버지가 분신처럼 의지하던 지팡이가 아닌가.

은하는 순간 피가 머리로 몰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며 큰 소리로 최 씨를 불렀다.

급히 뛰어 온 최 씨도 친구의 지팡이임을 확인하고는 이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은하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온 정신을 집중하여 오빠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지만 창우의 휴대폰은 전원이 꺼져있어 이번에는 아파트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새언니가 그렇잖아도 지금 오빠의 행방을 알 수 없다며 반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따라 오빠를 찾는 전화가 여러 군데서 걸려와 오빠의 근무 부서로 직접 전화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과장님이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모처의 연락을 받고 어디론가 급히 나간 후 여태 아무런 연락이 없어 자신들도 애타게 찾고 있다고 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최 씨와 은하는 주체할 수 없는 불길한 생각들 때문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이른 아침, 창우의 아파트 거실에서는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동이 틀 무렵에야 전화기 앞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창우 부인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누구세요?, 혹시 철이 아빠? 철이 아빠죠? 여보!”     

“뚝 뚝 뚝~”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창우 부인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창우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여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던지 창우 부인은 숨죽여 울기 시작했고 이 소리에 잠을 깬 외동아들 철이도 엄마의 품속으로 달려와 같이 울기 시작했다.     


이 시각, 배 교수의 집에서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은하가 수화기를 집어 들자마자 그 옆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최 씨도 요란한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은하가 더듬거리며 천천히 말했다.     

여, 여보세요?”       

   

잠시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수화기에서 웬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많이 긴장된 상태였다.     

“저어... 거기가 배 교수님 댁이 맞습니까?”     

“예, 우리 아버지십니다.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시죠?”     

“…”      

“제발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제발요?”     

    

전화를 한 사람은 마오와 함께  교수를 납치해 갔던 장백산 천지회의 청년단원 창이었다.

그는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배 교수의 대쪽 같은 인품에 매료되어 평소 배 교수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공중전화기 부스 앞에서 이를 지켜보던 은하의 고교 동창 마오의 표정도 자못 심각하다.     

공중으로 길게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만큼이나 마오의 한숨소리가 길게 새어 나왔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 잘 들어주세요!

통보드릴 사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제 당신 오빠는 면책을 받았으니 지금부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일상으로 복귀해도 좋습니다.”     

은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황상 이 자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례지만 댁은?”     

   

그는 즉시 은하의 질문을 가로막고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질문은 곤란합니다. 배창우 씨에게 연락하여 리말을 전해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겁니다.”     

은하의 가슴은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순간의 쉼도 없이 방망이질 중이다.

두 가지의 통보사안중 하나는 그래도 천만다행스러운 소식이었다.

지만 두 번째의 소식은 왠지 불길한 소식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이 자들은 누구일까? 아버지, 제발 살아만 있어 주세요.     

   

“두 번째의 통보 사안은 당신 아버지 배 교수 소식입니다”     

이 말에 은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어떻게 되셨나요?”     

그 목소리는 그야말로 울부짖음이었다.     

“교수님의 지팡이를 찾으셨습니까?”     

“네, 찾았어요. 구룡촌마을 옥수수 밭에서 찾았습니다.”     

“…”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발, 제발 말씀해 주세요! 우리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곳을 다시 잘 찾아보면 교수님이 계실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은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최 씨도 배 교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던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기절하여 쓰러진 은하를 발견한 최 씨가 급히 부엌으로 뛰어갔다.

찬물 한 바가지를 떠 와서는 수건을 적셔 은하의 얼굴을 닦아주자 그제야 은하가 정신을 차렸다.

은하는 눈을 뜨자마자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새언니, 아직 오빠 소식은 없습니까?”     

은하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았던 창우 부인도 불길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또 왜 그러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가씨까지 그러세요?”     

   

이때 은하는 차츰 냉정을 찾아갔다. 오빠도 없는 마당에 자신마저 정신줄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언니, 방금 어떤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빠는 이제 면책받았으니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무래도….

나 지금 아버지 찾으러 가야 하니까 오빠 연락되면 빨리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수화기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은하는 최 씨와 함께 택시를 불러 타고 구룡촌마을의 그 옥수수 밭으로 달려갔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은하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최 씨도 덩달아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닦아냈다.      

   

지팡이를 찾았던 그 옥수수 밭 안쪽을 한참 동안 뒤지자 옥수수가 엉클어진 곳에서 사람의 흔적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가슴 부위혈흔이 낭자한 총상을 입고 아버지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막상 차가운 주검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대면하자 은하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배 교수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던 최 씨를 타이르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택시기사였다.

은하를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기사의 재촉을 받고서야 최 씨는 의식을 잃은 은하를 부축하여 운전석의 옆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기사와 함께 차갑게 식어버린 배 교수의 시신을 뒷자리로 옮긴 후 연길시내의 병원으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병원 응급실에서 영양제 수액주사를 맞고 있던 은하가 깨어났다.

창우 부인은 은하의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올리며 측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마터면 아가씨까지 큰일 날 뻔했어요. 아가씨까지 맥을 놓으면 어쩝니까?

아가씨! 착한 우리 아가씨! 이 슬픔을 꿋꿋하게 이겨내야 해요.

아버님이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계시잖아요.”     

따듯한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던 새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은하도 아버지의 죽음이 생각났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로한 채 일어나려고 애써보았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요?”     

“아가씨, 오빠가 어요! 공안이 아버님을 부검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 그 문제로 같이 협의하고 있어요.”   

  

병원응급실 바로 옆 건물의 지하실에 비치된 영안실, 서랍장같이 생긴 냉동 보관실 앞에서 최 씨가 벌써 두 시간째 통곡 중이다.      

“배 교수 이 사람아, 날 두고 혼자만 가면 어쩌누,

대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이 매정한 사람아!, 나도 데려가야지, 나도 데려가야지!.”     

   

이때 공안 두 명이 들어와 배 교수의 부검을 위해 냉동고에서 사체를 꺼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창우가 아버지의 손가락에서 뭔가를 발견했던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다며 잠시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구했다.      

공안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창우는 급히 배 교수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던 쪽지를 빼내어 그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쪽지는 보일 듯, 말 듯하게 배 교수의 손가락에 고무 밴드로 묶여 있었다.


최 씨는 배 교수의 얼굴을 연신 만지작거리면서 통곡하고 있었던 터라 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창우, 이놈아!. 아버지의 이 한 맺힌 눈을 똑똑히 봐라, 이놈아!

얼마나 원통했으면 이렇게 눈을 부릅뜬 채로 돌아가셨겠나. 응?

이 불효 막심한 놈아!. 그동안 아버지 속 무던히도 썩여드린 네놈이 아버지 눈을 감겨드려야 하지 않겠어? 어서 이놈아!”     

최 씨의 이 말에 창우도 말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두 손으로 매섭게 부릅뜬 아버지의 눈을 감겨 주었다.     

“아버지, 이 못난 지식을 용서하세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저 만치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공안들이 다가와 이제 그만 검안실로 옮겨야 한다며 재촉했다.

한 명이 완력으로 창우와 최 씨를 제지하는 사이 또 한 명이 사체가 누워있는 침대를 밀면서 옆방의 검안실로 들어갔다.     


은하가 누워있는 응급실로 돌아온 창우는 웬만큼 의식을 회복한 은하를 데리고 병원 앞마당의 나무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주머니 속에서 쪽지를 꺼낸 창우가 은하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게 아버지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었어.”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교수님의 유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더 이상은 가족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고, 둘은 사체를 화장하되 백두산 천지에 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의 유언은 보장되었으나, 둘째는 보장되지 않아서 부득이 교수님의 죽음을 길가에 내버려 두게 되어 죄송합니다.

평소 고매한 성품의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 이같이 쪽지를 남기니 가족들께서 조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내게 그런 전화를 했었구나!”     

은하는 이른 아침에 걸려왔던 전화 이야기를 오빠에게 들려주었다.

창우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장백산천지회라는 극우세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도.   

자신 대신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는 자책스런 눈물이 또다시 쉼 없이 흘러내렸다.            


창우는 어제 아침 출근하자마자 북쪽의 고위관리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신변이 위험하니 일단 자신들의 안가로 급히 대피하라는 연락이었고, 그래서 일체의 연락을 끊은 채 꼭꼭 숨어있었다.

사실 창우는 윤 팀장이 연길을 다녀간 2년 전부터 천지회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길림성 감찰부장으로부터 대북 첩보망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 진행을 독촉받았지만 차마 북쪽의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 이런저런 핑계로 실제로는 그 일을 진행시키지 않았다.

천지회는 이런 창우를 한국과 북한의 2중 첩자로 오해하기 시작했고, 만약 자신들의 일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는 거친 협박을 계속했다.     

   

창우는 들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학의 저명한 역사학자를 비롯하여 당, 군, 공안, 고위 관리들을 끼고서, 백두산의 서문과 남문에서 호텔사업을 영위하는 그야말로 권력과 돈과 폭력조직까지 융합된 엄청난 극우세력이다.

이들은 가끔씩 합성사진을 조작하여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이 발견됐다는 언론플레이를 펼치곤 하는데 이 또한 천지가 중국령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고도의 계산된 행위였다.      

이들의 마수를 벗어나 동북삼성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이들에 의해서 희생되었을 경우에도 딱히 하소연할 데가 없는 실정이었다.

차마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이런 사정 때문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빠른 시일 내 은하와 맺어주겠다던 2년 전 윤 팀장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원 지하실의 장례식장에서는 상복을 입은 창우와 은하가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다.

저쪽 구석자리에서 검정색 양복 차림으로 엄마 품에서 잠자고 있는 어린 형철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인근의 동포들이 모두 문상을 나왔는지 넓은  안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문상객들로 붐볐다.     

순두부집아주머니를 비롯하여 연길시장에서 장사하는 부인네들이 문상객의 음식상을 나르느라 분주하다.


연변 조선인 향토연구소 회원 수십 명이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이십 대 중반의 혈기 넘치는 배 교수 제자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향토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핵심인사들이 제자 그룹들인데 그중에서도 지금 성주와 함께 앉아있는 기수와 태 이 세 사람이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끄는 핵심이다.     

   

그들은 어제 오후 비보를 전해 듣자마자 그 즉시로 달려와 뜬눈으로 꼬박 밤을 지새웠다.

성주는 어제부터 얼마나 울었던지 아직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상태다.

기수가 적개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지회 그 간나 새끼들 짓이 맞제?”     

성주가 팔짱을 낀 채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태가 소주 한잔을 그대로 들이킨 후 말했다.        

“우린 매번 이렇게 당해야만 하나?”     


성주도 잔을 한 입에 털어 넣은 후 작지만 침착소리로 말했다.     

“2년 전 분기 토론회 때 그놈들한테 실컷 몽둥이찜질 당한 후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나는구먼.

인동초 이야기 말이야.

밟으면 밟히고, 바람이 불면 엎드리고, 모진 겨울 동안 그 잎이 모두 말라버리지만 이듬해 봄에는 또다시 새싹을 피운다고 말씀하셨지.      

최후의 승자는 끝까지 살아남는 인동초가 될 것이라던 교수님의 그 말씀을 난 잊을 수가 없어.

그 봄날에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서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간도 땅을 되찾는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야. 

저들이 밟겠다면 우리가 밟혀 주세나.

그렇더라도 결코 굴복하지는 말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면서 말일세.

그것이 교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아닐까 싶어.”     

   

이때 최 씨가 이들의 자리로 건너오더니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라도 우리 배 교수한테 해가 될까 봐 난 한마디도 안 했는데, 결국 이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어.”        

이번에는 성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최 씨가 나지막하게 다시 말했다.     

“우리 배 교수 해코지 한 놈들이 천지횐가 뭔가 하는 그놈들 짓이 맞제? 그렇제?”     

   

성주가 최 씨의 입에다가 그의 오른손 검지를 갖다 대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쉿, 최 사장님!. 앞으로도 그 이야기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들의 정체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저들의 행패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죠?”     

   

성주가 최 씨에게 입조심을 시키고자 하는 뜻은 최 씨는 성품 하나는 더없이 선량한 사람이지만 워낙이 떠벌이는 천성 이어서다. 

행여라도 저들을 더욱 자극하는 말들이 가공되어서 자칫 우리 동포사회에 미칠 화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은 스승을 죽인 살인자를 알고 있었지만 살인자를 고발할 수 없는,

남의 나라에서 숨소리마저 죽이며 살아가야 되는 그들의 처지가 서글퍼서 말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창우는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의 유언을 집행하기로 했다.

사체를 화장한 후 그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사각 나무통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가 은하에게 스카프로 쓰라며 선물해 준 예쁜 연분홍색 보자기에 은하가 직접 유골함을 싸게 했다.         


지금 창우의 7인승 4륜 구동 지프차는 먼지 펄펄 날리며 백두산으로 향하는 비포장도로를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창우 옆 자리는 은하가 아버지의 유골함을 정성스럽게 안고 있고,

뒷자리에는 창우 부인과 그녀의 아들 형철이, 그리고 그 옆에는 성주가 말없이 앉아있다.

맨 뒷자리는 언제나처럼 최 씨가 차창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며 외롭게 앉아있고, 다소 비좁아 보이는 그 옆자리에 기수와 태도 불편한 듯 끼어 앉았다.     


연길시내를 빠져나온 지 두어 시간이 되었을 때 창우는 인적 없는 숲길 가에서 차를 멈추었다.

옆에는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드넓은 나무 그늘을 형성하고 있는 오래된 정자나무 한그루 있었다.

창우가 왜 이곳에서 정차를 했는지 은하와 최 씨는 그 이유를 아는 듯했다.

최 씨가 은하로부터 유골함을 받아 들고 정자나무 옆 땅바닥에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최 씨가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의 오른쪽 귀를 바닥에 붙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배 교수 이 사람아! 이 땅의 숨결이 나도 느껴져.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도 느껴진단 말이야”     

그러면서 유골함을 끌어안은 채 다시 말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도 제각기 손수건을 꺼내 들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해질 무렵, 저녁노을이 서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 모두는 천지에 올랐다.

천지 아래는 거대한 구름이 용의 모습으로 꿈틀대는 형상이었다.

창우가 먼저 한주먹의 유골을 천지에 뿌려주자 백색의 가루들이 천지의 한가운데를 향하여 날아갔다.

다음은 그의 딸이, 그다음은 며느리가, 또 그다음은 그의 손자가, 그리고 그의 가장 절친했던 고향 친구가 두 손으로 백색가루를 힘껏 뿌려주었다.

맨 마지막 순서로 그의 제자들이 무릎을 꿇은 채 한 주먹씩을 차례대로 천지에 내려놓았다.      

   

최 씨의 넋두리가 계속되었다.      

이제부터 우리 배 교수가 백두산 천지의 넋이 되어서 우리 민족을 보살펴주시구려.

배 교수가 천지를 지키게 되었으니 우리 민족이 얼마나 든든하겠소.”     

이때, 갑자기 최 씨가 기이한 행동을 시작했다.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외쳤다.     

백두산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다!, 간도땅도 우리 땅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창우의 아들 형철도 신이 나서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백두산은 우리 산이다!, 간도땅도 우리 땅이다!”    

 

모두는 멍하니 서서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불현듯 천지의 한가운데로부터 ‘윙~’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백두산 호랑이가 포효하는 웅장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전 18화 일어나라! 고구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