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오후 다섯 시 정각이 되었다.
우린 커피타임을 가지며 각자가 작성한 일곱 부의 초안들을 돌려가며 검토하기 시작했다.
저녁도 거른 채 이어진 대표초안 찾기 작업은 세 시간 만에 어렵사리 마무리되었다.
나를 제외한 여섯 명 팀원들의 만장일치로 가장 합리성을 갖추었다는 대표초안이 선정되었다.
「따듯한 동포애에 호소하는 신뢰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초안이었다.
밤 열 시경, 나의 초안을 뼈대삼아 우리 팀원들의 지혜가 부가된 오십 쪽 분량의 정책보고서가 완료되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이사장님께 보고 드리기 위하여 다섯 부의 보고서를 지참한 채 곧장 이사장실로 뛰어 올라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사장실에서는 아직까지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낯선 사람이 내 시선을 끌었다.
내가 전해주는 정책보고서를 받아 든 이사장님이 이 사람을 소개했다.
“윤 팀장, 국정원에서 오신 곽 과장이시네. 앞으로 과장님의 요청이 있으면 잘 협조하도록 하게.”
내가 그에게로 다가가자 그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악수를 청했다.
선글라스를 그대로 쓴 채 악수하는 모습에서 고압적인 태도가 느껴져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곽 과장입니다. 앞으로 많은 협조 바랍니다.”
“예, 힘닿는 대로 성심껏 협조하겠습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모두는 자리에 앉았고 앞으로 나가서 정책보고서의 내용을 브리핑하라는 이사장님의 지시가 있었다.
“지금 현재의 상황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정 위원장이 한 달째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있는 대단히 위중한 상황입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중국은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해 온 동북공정의 제3단계를 시행하기 위해서 북한 군부와 모종의 비밀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때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곽 과장이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서 입술 중앙에 반듯이 갖다 붙였다.
무언가 질문이 있다는 의사표시였다.
“동북공정의 제3단계를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북아역사재단의 이사진 다수가 노학자들인데 여전히 다리를 꼰 채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대단히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일반적으로 동북공정하면 한중 사학자들의 한가로운 역사논쟁쯤으로 치부되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행하는 진짜 목적은 그들의 국가 안정과 영토문제 때문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제3단계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의 제1단계는 우리 고대사부터 근대사에 이르는 역사왜곡의 이론적인 작업입니다.
여기서 길게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중국은 이미 2003년 6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인 광명일보에 ‘고구려 족은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하나였으므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는 기고문을 실음으로써 제1단계는 사실상 마무리되었습니다.
동북공정의 제2단계부터는 실천단계입니다.
우리 고대사 유적지의 여러 현장들을 중국식으로 복원하는 유적지 조작 단계입니다.
유적지 조작을 마무리한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단계가 바로 제2단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고구려 유적지는 2004년 7월 이미 등재가 완료되었고, 발해 유적지 역시도 등재를 위한 유적지 정비를 거의 끝낸 실정으로 사실상 제2단계의 모든 작업도 끝이 났습니다.
동북공정의 제2단계는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실마저 현장에서 지우고 왜곡하는 단계인데 이것이 모두 끝이 났다는 말은 현재 중국에는 우리 민족의 흔적들이 모조리 지워진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를 말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을 때 함께 배석해 있던 연세 많은 이사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곽 과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겠다는 듯 꼰 다리를 풀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과장님이 질문하신 동북공정 제3단계의 거울은 바로 티베트입니다. 즉, 영토문제를 마무리하는 단계입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이었다면 이들이 지배했던 동북 3성을 비롯한 간도 땅 일대는 당연히 중국의 영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구려 영토였던 한강 이북마저도 역사적으로는 중국의 영토였으므로 수복해야 된다는 무서운 음모가 바로 동북공정의 제3단계입니다.”
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한 모금의 물로 목을 축였다. 수없이 해 본 브리핑이었지만 오늘의 브리핑은 그 내용이 내용인지라 오히려 내가 더 흥분했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한 후 서장자치구란 이름으로 중국으로 편입시킨 것은 십오 년 후인 1965년의 일이었습니다.
1986년부터 십 년간 진행된 서남공정으로 티베트의 역사는 온전히 중국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재는 칭짱철도의 개통으로 대규모의 한족을 이주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인구비율의 역전을 통해서도 향후 티베트가 독립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봉쇄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제 곽 과장은 마치 착한 학생처럼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며 나의 브리핑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만큼 그에게도 오늘의 브리핑은 충격적이었다.
“티베트의 이러한 현실이 우리 민족이 앞으로 겪게 될 동북공정의 최종 거울입니다.
현재 중국은 제16집단군과 제64집단군을 북-중 국경 최전방에 증파해서 사태의 악화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차하면 북한 지도부의 요청에 의해서라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괴뢰정권 수립을 위한 본격적인 절차에 돌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국은 지금 친 중국 성향의 북한 군부 세력으로 하여금 중국의 괴뢰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후 ‘동북 제4성’이라는 이름으로 완전 편입하는 것이 동북공정의 최종 목적지가 되겠습니다만 그 방법은 점진적인 방법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십오 평 남짓한 이사장 실에는 한 톨의 공기마저도 남아있기 힘들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껏 여유로움에 넘치던 곽 과장마저도 송이송이 맺힌 이마의 땀을 닦을 요량으로 드디어 선글라스를 벗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빛은 상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할 만큼 날카로웠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만큼은 많이 달라졌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동북아역사재단을 학술토론이나 하는 한가로운 집단쯤으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비상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쪽은 국정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재단이다.
“지금 이 단계에서 중국이 시도하는 것은 민족의 자주성이 결여된 중국의 허수아비 정권을 만들겠다는 의도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미국이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할 당시에도 미국의 묵인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도 미국의 묵인 하에 저들의 비밀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 시점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를 비롯한 대포동미사실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중국이 책임지고 폐기하기로 이미 약속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대가로 미국은 중국의 음모를 알면서도 묵인해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여기까지의 설명만으로도 대견스럽다는 듯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경청하고 계시던 서 교수님이 한마디 던졌다.
“윤 팀장, 이쯤에서 대책으로 넘어가시지?”
“예 교수님! 정책보고서의 제목은 ‘따듯한 동포애에 호소하는 신뢰의 메시지’입니다.
현 상황에서 중국의 의도를 분쇄할 수 있는 방안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적적으로 정 위원장이 의식을 회복하여 이 상황을 평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북한 전역에서 중국의 괴뢰정권 음모를 규탄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국제여론을 움직이는 경우입니다.
유엔차원에서 중국을 규탄하는 상황이 조성된다면 미국도 발을 빼게 될 것이고, 중국도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들의 계획을 추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가위 보름달처럼 넉넉한 인상의 양 이사장님이 곽 과장을 바라보며 국정원의 의견을 물었다.
“과장님께서는 방금 발표한 우리 윤 팀장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저도 보고서의 내용에 동의합니다.
북한 민중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국경 최전방에 배치된 제16집단군과 제64집단군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건 미국과 유엔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심각한 표정으로 안경을 벗은 채 반백의 머리를 뒤로 넘기던 다른 이사 한분이 다시 곽 과장에게 물었다.
“북한에서 군중시위가 발생한다면 북한 군부의 동향은 어떨 것 같습니까? 저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발포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대목에서는 곽 과장으로서도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던지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가 주위를 닦은 후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단정적으로 예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인 것은 틀림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느 누구라서 이보다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브리핑의 마지막 정리를 못해서 난감해하는 나의 처지를 대신하여 서 교수님이 다시 나서 주셨다.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다만 우리로선 그런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정책보고서의 내용대로 우리 동포들 간 상호 신뢰가 광범위하게 일어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선군정치의 달콤함에 길들여져 있던 소수의 군부세력을 제외하고는 북쪽의 군인들 역시도 우리 민족의 중국 병합을 결단코 용인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북녘의 동포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여 고달픈 삶을 살고 있지만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민족적인 자존심이 대단히 드높은 사람들입니다.”
서 교수님의 도움 말씀에 힘입어 난 브리핑의 결론부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관건은 우리 동포들 간 신뢰입니다.
제아무리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꼬드기더라도 어차피 중국은 이민족일 뿐, 기왕에 의지하려면 같은 민족인 우리 한국에 의지하고 싶다.
그래서 한국과의 통일을 원한다, 뭐 이런 형태의 주장을 하면서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신뢰를 신속하게 전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합니다,
이상으로 정책보고서의 브리핑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브리핑을 마치며 의도적으로 곽 과장을 응시했을 때, 그는 지금부터의 일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지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며칠 후 연구실로 출근하자 오늘자 조간신문의 1면 기사가 내 시선을 끌었다.
어제 임진각에서는 몇몇 보수단체들이 시끌벅적하게 대북 전단지 살포 행사를 가졌던 모양이다.
관련사진과 함께 여기저기 익숙한 문구들이 눈에 띄자 드디어 국정원의 대북공작이 개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 애국청년단 명의로 된 ‘조선동포들에게 호소함’이라는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과로로 잠시 병환 중인 때를 틈타 중국이 저들의 괴뢰정권을 수립하려고 한다,
이완용 같은 국방위원회의 노망 든 늙다리들이 우리 민족을 중국에 팔아넘기려는 반민족적인 범죄를 획책하고 있다.
조선의 애국동포들이여!,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저 반민족적이고 야만적인 조중비밀 회담을 쳐부수기 위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나자!.
이 엄숙한 구국의 대업에 동참하여 백척간두의 위급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작금의 나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차라리 북과 남이 하나 되어 우리 민족의 통일대업을 이룩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애국동포들이여! 어찌 우리 동포의 손길이 이민족의 그것보다 일억만 배 따듯하지 않겠는가!」
마치 북한 내부의 선동인 냥 ‘조선 애국청년단’이라는 가공의 단체를 내세운 것이 특이했지만 우리의 정책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 분명했다.
사흘 전 정책브리핑을 통해서 공개된 문건이 지금 대북전단지로 변신하여 북한 전역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또다시 보름 가량이 흘렀다.
팀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같이한 후 도시의 바쁜 일상을 내려다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매일 엄청난 량의 대북 전단지를 날려 보내고 있다는데 지금쯤이면 북쪽에서도 중국과의 비밀 회담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반응이 무척 궁금했다.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정보에는 한계가 뚜렷하여 내심 국정원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때 내 책상 위 업무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 됐다.
“예, 3팀장 윤준노입니다.”
“곽 과장입니다. 오늘 시간이 되시면 한번 봤으면 합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세시쯤 어떻습니까?.
아 참 오늘 날씨가 좋으니까 웬만하면 운동 삼아서 걸어서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모든 것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공원에서 보자고 했을까?
재단에서 파고다공원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정도의 거리이다.
시월의 가을 공기는 더없이 맑고 쾌적했다.
가로수를 따라서 잘 정비된 길가에는 길게 줄지어 선 코스모스들이 가을바람에 하늘거렸다.
그중에서 노란색 코스모스 한줄기를 꺾어 코에 갖다 되자 불현듯 해맑게 웃는 은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은하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날 은하가 내게 긴급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긴박하게 돌아가던 평양 소식을 우린 정말 까마득히 모른 채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우리 국토의 절반을 고스란히 중국에 헌납할 뻔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무언가 이상했다.
2년 전 연변을 떠나오던 날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어느 사찰에 끌려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꼭 누군가로부터 미행을 당하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덜컥 겁이 났다.
차라리 걸음을 빨리하여 공원을 향해서 거의 뛰다시피 내달렸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건너편 나무벤치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곽 과장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라도 되는 양 그는 오늘도 짙은 선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신문으로 입을 가린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귓속에 무선 이어폰이 숨겨져 있는지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윤 팀장님, 뒤돌아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화합시다. 미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사실이었다고 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쪽 나무 뒤에서 지켜보는 자가 있으니 모르는 척하고 자연스럽게 제 옆으로 와서 앉으시죠.”
제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해도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이제는 아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어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야 했다.
“윤 팀장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 차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인데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요원이 저자의 뒤를 밟으며 왔습니다.
혹시나 하여 말씀드립니다만 당분간 우리 안가에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 말까지 더듬거렸다.
“저, 저 같은 연구원 샌님이 뭐 중요한 인물이라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쪽 첩보에 의하면 중국의 어느 삼합회 조직에서 윤 팀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당분간 우리 안가에서 지내는 걸로 합시다.”
프로요원답게 곽 과장은 가끔씩만 정면을 응시하며 나와 대화하는 것에 집중하는 척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의 침착한 행동 덕분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최근에 우리 쪽의 공작으로 날려 보낸 대북 전단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우리로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저 나무 뒤에 숨어있는 자를 추궁하면 단서가 나올 것도 같은데 그래도 당분간 체포하지 않고 지켜볼 작정입니다.
지금은 배후를 밝히는 게 중요하니까요.”
나를 미행했던 자를 또다시 은밀하게 미행하던 곽 과장의 부하 요원이 실시간으로 곽 과장에게 보고했다.
조금 전 또 한 명이 합류하여 두 명의 정체불명 자가 지금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곽 과장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불현듯 2년 전 연변을 떠나오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등신 불상이 모셔진 사찰에 납치되어 갔을 때 끝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연신 줄담배를 피우던 자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누구라도 우리의 일을 방해하려 든다면 우린 반드시 그 자를 응징하게 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당신을 죽임으로써 한국 정부에 경고의 상징으로 삼을 것이니 신체를 보전하고 싶거든 내 말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자들의 단체가 장백산천지회라고 했던 것 같고 은하까지 연계시켜서 내게 협박했었다.
나를 미행했던 자가 그들의 조직원이라면 당시 그 자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이미 흘러내린 식은땀과 합세하여 오한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윤 팀장님. 대북 전단지가 북한 전역의 구석구석으로 전파된 지도 벌써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함경도 일대에서 북한 군부를 비난하는 소자보가 몇 장 나붙었다는 첩보만 있었지 이렇다 할 동요는 아직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시적인 오한이었지만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나니 폭풍 후의 고요처럼 정서적으로는 한결 편안해졌다.
곽 과장의 이 말은 사실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금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 그야말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름 전 정책보고서를 마무리할 당시에도 우리 팀이 내린 결론은 긍정보다는 부정 쪽에 가까웠다.
십 년간 지속 돼온 햇볕정책은 공식적으로 폐기된 상태로 일체의 대북 식량지원이 중단되었고 금강산 관광 등 대북경협사업마저도 원점에서 재검토가 거론되는 실정이다.
곽 과장의 질문에 난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뢰의 문제입니다. 이민족보다도 같은 동포의 가슴팍이 훨씬 따듯하다는 그 신뢰가 문제겠지요.”
이 대목에서는 적잖이 비유가 상했던지 곽 과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오십 미터 전방의 수양버들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정체불명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동포인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 뭐 그런 뜻입니까?”
곽 과장의 짜증에 가까운 반응이 오히려 그동안 억눌려왔던 나의 민족적인 감성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최악이라면서요?
백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는 외신 보도도 있던데 관련 정보가 사실입니까?”
“…”
“그런데 최근 우리 쪽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연속적으로 사상 최대의 풍작을 맞이해서 전국의 쌀 보관창고들에는 삼 년 치의 묵은쌀 때문에 금년에 수확하는 햅쌀을 보관할 여유가 없는 실정입니다.
농민단체에서는 더 이상의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서도 대북 식량지원을 재개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연일 정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또 정부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대책들 가운데는 오래된 묵은쌀을 소, 돼지의 사료용으로 사용하자는 방안도 포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물론 우리 정부로서도 할 말은 있겠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UN의 대북제재 결의가 있었고, 그 일환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식량지원이 전면 중단된 상황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정작 굶주려서 죽는 사람들은 핵 실험과는 무관한 북한의 일반 국민이라는 사실을 지금 우리 정부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달러를 주자는 것도 아니고, 소 돼지에게라도 주지 않으면 썩혀서 버려야 되는 오래된 묵은쌀을 지원하자는 것인데 그마저도 안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북한 동포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곽 과장의 짙은 선글라스 속에서는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의 쓴웃음이 한참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을 배신하고 중국의 품속으로 의탁하겠다? 윤 팀장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반만년을 함께 살아온 같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곽 과장의 말에 난 잠시 말문을 닫았다.
자신의 생각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그의 아집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과장님, 이제 겨우 보름입니다. 좀 더 지켜보시죠?
과장님 말씀대로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북녘의 동포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삼국을 통일한 것은 민족적인 관점에서는 분명 온당한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가 본색을 드러내고 우리 민족을 집어삼키려고 했을 때 모두들 들고일어났지요.
우리 민족이 위급에 빠진 상황에서는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기층 민중들이 신라 편에 서서 당나라를 상대로 목숨 걸고 싸웠지 않았습니까?
곧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방금 나의 말속에서 평소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지 선글라스 속에 숨겨진 그의 눈빛에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한가득이나 그려졌다.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다.
오늘 저녁부터 곧장 안가에서 기거하자는 곽 과장의 재촉이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도무지 내키지 않아 정중히 사양했다.
그 대신 당분간 재단 건물의 지하 1층 기숙실에 기거하면서 국정원 요원들의 실시간 보호를 받는 타협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주말 내내 기숙실에서 감방 같은 생활을 하느라 기분이 많이 다운된 월요일 아침이다.
기분 탓이었을까? 불현듯 내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 팀 연구원들과 티타임을 가지기에 앞서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백두산 야생녹차가 담긴 대나무 통을 꺼냈다.
배 교수가 선물한 백두산 야생녹차를 나 혼자서만 우려먹는다는 것이 어쩐지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어 백두산의 정기를 팀원들과 공유하고 싶어졌다.
백두산의 기운이 느껴지는 야생녹차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을 때 곽 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윤 팀장! 아마 오후 석간부터는 보도가 되겠습니다만 정 위원장이 깨어났습니다.”
“아 그래요? 의사결정이 가능할 정도로 의식이 회복된 건가요?”
“우리 쪽에서도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한 주일이 지났다.
이번에도 곽 과장의 요청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에 만났던 그 나무벤치로 다가갔을 때 곽 과장은 무선 이어폰으로 긴박하게 보고 받으며 지시했다.
“한 명뿐이라고? 나머지 한 명이 더 나타날 때까지 일단 기다려봐.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저쪽 수양버들 뒤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을 정체불명 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곽 과장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은땀은 고사하고 제법 여유까지 부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곽 과장이 미리 준비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게도 건네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윤 팀장, 오늘은 저 자를 잡아들여서 취조해 볼 생각입니다.
나머지 놈이 나타나면 곧바로 체포할 겁니다.
중국에서 보내온 우리 쪽 정보에 의하면 삼합회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삼합회라면 조직폭력배를 말하는 겁니까?”
난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차마 곽 과장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연변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어떤 위험을 예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윤 팀장이 궁금해할 만한 저쪽의 최근 소식이 있습니다.”
북쪽의 최신정보라는 말에 일순간 커피를 숭늉 마시듯이 마셔버렸다.
무심결에 커피의 온도를 망각해 버린 것인데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 위원장이 업무에 복귀해서 첫 번째로 취한 조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난 그의 선글라스를 또렷이 쳐다봤고 그의 선글라스 속에 내 얼굴이 통째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 중국과의 비밀협상에 관계됐던 국방위원회 소속 고위 장성들이 모두 다섯 명으로 밝혀졌는데 정 위원장의 지시로 전원 체포됐습니다.
조만간 있을 즉결심판에 대비하여 모처에 감금 중이라고 합니다.”
즉결심판이라면? 곽 과장은 수양버들 뒤에 숨어있는 정체불명 자를 향해서 오른손으로 방아쇠 당기는 시늉을 했다.
왼손으로는 신문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곽 과장이 무슨 행위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팡 팡 팡! 전원이 총살형에 처해질 것이고, 그들의 식솔들은 모조리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겠죠.”
곽 과장은 또다시 무선 이어폰으로 긴박한 보고를 받았다.
“드디어 한 놈이 더 합류했단 말이지. 그럼 됐어 즉각 체포해!”
곽 과장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십 미터 전방의 수양버들 뒤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두 명의 요원이 권총을 겨냥하면서 정체불명 자들을 향해서 한발 한발 다가섰다.
갑자기 벌어진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한가롭기만 하던 공원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인솔교사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뛰어가다 넘어지면서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가롭게 장기를 두던 노인들과 건강보조식품 선전원의 주위에 몰려있던 구경꾼들이 갑자기 발생한 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정문 쪽으로 우르르 도망치고 있다.
그런데 이자들도 그리 호락호락하게는 체포될 수 없다는 듯 서슬이 시퍼런 회칼을 꺼내 들고 저항할 자세를 취했다.
이때 요원중 한 명이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다시 어깨춤의 권총집으로 집어넣었다.
권총을 집어넣은 요원은 자신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칼끝을 흔들며 위협하는 자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가벼운 미소를 띤다.
그 순간, 단 일합의 전광석화 같은 앞발차기 한방으로 이 자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서 숨 쉴 틈도 없이 이단옆차기와 몇 차례의 발길질로 완벽하게 제압해 버렸다.
뒷걸음질 치던 또 다른 자는 권총으로 이마의 정면을 겨냥하는 요원의 기세에 눌렸던지 스스로 칼을 내려놓고 투항했다.
여기까지의 장면을 냉철한 표정으로 지켜본 곽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박수를 쳤다.
“수고했어! 독종들 같으니까 취조할 때는 사정들 봐주지 말고, 배후가 누군지? 모두 몇 명이나 국내에 잠입했는지? 신속하게 알아내도록!”
지시를 마친 곽 과장은 이런 상황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평이한 일인 냥 먹다만 샌드위치를 천연덕스럽게도 먹어치웠다.
“그런데 윤 팀장!, 정 위원장 말입니다, 도대체 정 위원장을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
“자주성입니다!”
“자주성이라…”
“물론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의심의 여지없는 왕정독재가 분명합니다만 그들이 지향하는 정신적인 뿌리는 분명히 고구려입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광활한 북방영토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민족적인 자부심!
오늘날의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정신적인 기반인 고구려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그는 내가 하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웠다.
그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짙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여기는 북경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근처의 고급 주택가.
중국의 살아있는 권력실세들만 모여서 산다는 청(靑) 시대 양식의 고급 저택들이 즐비한 거리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적막감이 감돌았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늦은 저녁시간, 이 저택의 거실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핵심 실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저택을 둘러싸다시피 철통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에서 모여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가히 짐작이 된다.
그들은 몇 시간 전부터 이곳에 모여서 작금의 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실상 중국을 움직이는 실세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결정되면 우선 행동으로 옮기고 추후 중앙 상무위원회의 추인을 받으면 될 일이다.
오늘 참석자 중에는 중국 공산당의 중앙 상무위원이 세 명이나 된다.
“지금 당장 손을 쓰지 않는다면 감금되어 있는 우리 동지들이 위험합니다.
정 위원장이 다른 조치를 취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중국군 중에서도 가장 핵심 요직인 북경군구 사령관 직을 맡고 있는 당성즈(唐生智) 상장의 말이다.
그의 어깨 위에는 황금빛 별 세 개가 천정의 샨데리아 조명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당 사령관에 이어서 곧바로 리하오쑤(李昊蘇) 총 정치부 주임이 나섰다.
“조선의 동지들을 구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당 사령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기왕에 시작된 중조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이 더욱 시급합니다.
정 위원장이 깨어났으니 협상의 대상이 군부에서 정 위원장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때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이 저택의 주인이 허 원장을 바라보며 말한다.
긴박한 회의 중에도 오랜 세월 단련된 듯한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동북공정을 직접 관장하는 허 원장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유일한 청나라 전통복장 차림으로 양팔은 소매 속에 넣은 채 아주 느린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발만 했더라면 영락없는 청나라 고위관리의 모습이다.
일행이 모두 고개를 들어 그를 주목하자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조선정권의 독특한 자주성은 우리 입장에서는 대단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요인입니다.
중국의 국가 안정과 이익을 위해 이번 기회에 이 위험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저 지긋지긋한 고구려의 자주성을 도려낸 이후에야 우리가 조선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지는 여러분들께서 결정하여 주십시오.
저는 조선을 중국의 자치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허밍친 원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인사가 벌떡 일어났다.
강경파 중의 한 명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장쥔닝(張軍儜)이었다.
그는 당 중앙정치위원회 상무위원을 겸직하며 중국 공산당을 총 감독하는 그야말로 막강 권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인민복을 입은 모습이나 넓적한 얼굴 모습이 생전의 마오쩌둥을 빼어 닮았다.
그는 선채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펀주(汾酒)를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오늘 이들이 마시는 펀주(汾酒)는 1400년의 양조 역사를 가진 샨시성(山西省) 싱화춘(杏花村)의 양조장에서 만든다는 유명한 술이다.
그 도수가 무려 50도 가까이나 되는 독주지만 이들은 이런 술에 익숙한 듯 거침없이 마시면서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지금 즉시 가장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기진 수단 중에서 조선으로 연결된 송유관을 잠그는 조치가 좋겠습니다.
파이프라인을 수리한다는 명분으로 원유의 지원을 전면 중지한 후 저쪽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강경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맞습니다, 우리가 원유 공급을 중단해 버리면 제깟 것들이 며칠이나 버티겠습니까?
원유뿐만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일체의 수출입을 중단해 버리고 목줄을 더욱 조여야 합니다.
저들의 목숨 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를 이번참에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필경은 며칠 못 가서 두 손을 들고 나올게 자명합니다.”
참석자들의 강경 발언들에 힘을 얻었던지 리하오쑤 주임이 다시 나섰다.
“저들의 원유나 식량 등 생필품 사정으로 볼 때 금수조치의 효과는 채 보름을 버티지 못하고 나타날 것이 확실합니다.
저들이 손을 들게 되면 기왕에 진행하던 중조 협상을 더욱 신속하게 마무리지어야겠지요.
이번 기회에 정 위원장의 1인 지배체제를 무력화시키고 감금되어 있는 우리 동지들을 중심으로 선군집단지도체제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국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는 효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발언을 마친 리 주임이 중앙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른 이들의 시선도 오늘 모임의 좌장 격인 이 저택의 주인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대리석 테이블 위의 술잔을 오른손으로 이리저리 돌리는가 쉽더니 단번에 펀주를 들이켠 후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모임의 주빈인지라 아무래도 그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발언보다 한층 권위가 있었다.
말문을 열었을 때 여전히 그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여유롭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취해야 할 조치들이 모두 정해진 것 같습니다. 결론이 거의 다 나왔어요.”
주변을 잠시 둘러보며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다른 이들도 함께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는 잔을 높이 들었다.
“자 동지들! 이제 우리가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동북공정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잠시 자세를 가다듬던 이 저택의 주인이 다시 소리 높여 외치자 다른 이들도 따라서 외쳤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그로부터 사흘 후, 중국은 전격적으로 북한으로 연결되는 원유 송유관의 밸브를 잠가버렸다.
명분은 노후화된 파이프라인의 교체를 위해서라지만 이 조치는 누가 보더라도 북한을 고사시키려는 행위였다.
또한 2006년 10월 북한의 제1차 핵실험 후 결의된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를 준수한다는 명분의 조치들이 전격적으로 취해졌다.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품들의 화물검색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식량과 생필품의 북한 유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북한정권의 붕괴를 유도하는 중국의 이러한 강경조치에 우리 정부로서도 적잖이 당황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단 한 톨의 쌀도 지원할 수 없다는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했던 우리 정부였다.
이런 마당에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전향적인 변화가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대북 지원정책을 내어놓을 수는 없었다.
무조건적인 지원은 전임 정부 때처럼 또다시 퍼주기 논란에 휩싸일 수 있어 부담스럽고, 조건부 지원은 북한이 굴욕적이라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사실상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퇴근 무렵, 이사장님의 호출을 받고 재단 3층의 이사장실로 들어섰다.
미리 와서 이사장님을 만나고 있던 곽 과장이 나와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말 대신 대뜸 하는 말이다.
“윤 팀장,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이 말에서 그간의 사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향후 입장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도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중국 측에 원유 송유관을 왜 잠갔느냐, 식량지원을 왜 중단했느냐고 항의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 속사정을 따져 물었더니 정히 북한이 안돼 보이면 한국이 원유며 식량을 대신 지원하면 되지 않느냐며 핀잔 섞인 딴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조 비밀협상 건에 대해서도 북한 군부의 요청으로 협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시인하면서도 정 위원장의 유고시 있을 수 있는 대량 탈북사태에 대비한 대책 마련이었다고 시치미를 떼더란 말입니다,
우리 위성 정보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거의 모든 시설들이 가동을 멈추었고 평양조차도 암흑천지입니다.
식량사정은 더욱 시급한데 곧 아사자들이 속출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치안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정말이지 큰일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북한 원유의 90퍼센트, 생활필수품인 소비재의 80퍼센트, 식량의 45퍼센트를 중국이 공급하고 있는 실정에서 갑자기 올 스톱시켰다는 것은 북한을 고사시키겠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절망적인 곽 과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사장님은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만 응시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 앞에 그는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숨죽여 울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막는다는 차원에서 최소한의 원유와 식량만을 제공해 왔었다.
북한으로서는 겨우 30퍼센트의 산업시설만이 힘겹게 가동 중이었기 때문에 비축유와 재고 식량이 바닥나는 것은 그야말로 삽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난 치솟는 울분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곽 과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국내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정부차원의 지원이 곤란하다면 방법은 단 하나! 대북 민간지원이라도 허용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부터라도 당장 육로를 개방해서 식량과 의약품 같은 긴급구호 물품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중국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 같은 상황입니다.
‘똑똑히 보아라! 한국은 너희들이 죽든지 살든지 아무런 관심도 없다. 진정으로 너희들을 위해주고 지켜주는 국가는 오직 우리 중국뿐이다,
그러니 힘들 거든 우리 중국의 어깨에 더욱 기대어라. 우리가 너희들을 보호해 주겠다.’
지금 중국이 보내고 있는 이 같은 메시지는 동북공정의 최종적인 마무리 수순 밟기입니다.
최악의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우리가 행동으로 나서야 합니다.
남과 북은 하나라는 따듯한 신뢰의 메시지를 북녘의 우리 동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사장님도 전폭적인 공감을 표시하며 내 손을 그의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윤 팀장, 자네 말이 전적으로 옳네.
정부가 할 수 없다면 우리 민간이라도 나서야지, 암 그렇고말고! 이 정도의 조치는 우리 정부에서도 동의할 거라고 믿네.
곽 과장께서도 국정원장님께 잘 좀 보고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왼손으로는 내 손을, 오른손으로 또다시 곽 과장의 손을 힘껏 잡았다.
오직 대북 강경책만을 밀어붙이던 우리 정부였지만 북녘의 동포들이 집단적인 아사 위기에 처하게 되자 들끓는 국내외의 여론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계부처의 장차관들과 실무자들이 수시로 만나 장장 사흘간이나 열띤 격론이 지속됐다.
어떤 때는 실무자들만 만났고 또 어떤 때는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만났는데 그만큼 이 문제는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마침내 사흘 째 되던 날, 대통령이 배석한 NSC 회의에서 각 부처 간의 이견이 조율되고 합의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0월 20일 월요일 점심 무렵, NSC 회의를 마친 후 통일부 장관이 직접 회의 결과를 브리핑했다.
내일부터 정부는 민간차원의 대북 지원을 한정적으로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허용되는 물품은 식량 의약품 등 생활필수품에 한정되었다.
지원기간도 단 보름 동안만 허용하기로 하고, 그 량도 품목별로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정부의 발표가 있자 야당과 시민단체에서는 지나치게 속 좁은 지원책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반면에 우익단체와 여당 일각에서는 다 죽어가는 정 위원장 체제를 무엇 때문에 살려주느냐며 연일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실정이다.
계속되는 정치권의 공방에도 불구하고 TV에서는 북한 주민 돕기 특별생방송이 시작되어 북한 돕기 열풍을 일으켰다.
각 신문사와 방송사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국민들이 길게 줄을 지어 IMF 사태 당시의 금 모으기 행사 못지않은 뜨거운 열기로 대북지원에 동참했다.
각 기업체들도 경쟁적으로 의약품과 생활필수품을 컨테이너에 실어서 북한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각 임진각에서는 문산, 파주까지 이어지는 트럭의 행렬이 끝도 없이 길게 줄지어 섰다.
농협창고에 보관 중이던 3년 치의 묵은쌀을 전경련이 매입하여 북한으로 실어 보내는 트럭의 행렬이다.
애당초 농민단체에서는 이참에 쌀값의 안정도 도모할 겸 최소 50만 톤을 지원하자고 주장했지만 보수단체를 의식한 정부의 입장은 10만 톤에서 단 한 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우리 측의 조치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청진항과 남포항을 개방하여 해상으로도 우리 측의 지원물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지원물품들이 직접 주민들에게 전달되는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북한의 이 같은 조치는 중국을 자극하려는 고도의 계산된 행위였지만 소극적인 지원만 고집하는 우리 정부를 의식한 측면도 있었다.
민간차원의 대북지원이 시작된 지 일주일 동안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쌀 옥수수 콩의 제한 량인 10만 톤이 북한으로 반입되었다.
옷가지며 약품이며 비료며 시멘트도 이미 정부의 제한 량에 근접하고 있었다.
정부는 당분간 북한주민들이 식량난을 이겨낼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량이 전달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지나치게 속 좁은 정책이 분명했다.
집단적인 아사위기는 가까스로 넘겼다지만 정작 그다음의 중요한 문제는 북한의 연료 사정이었다.
정부에서는 지원 가능한 물품 대상에서 석유 등 연료를 제외시켰기 때문에 북한의 연료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평양의 지하철마저도 전면적으로 멈춰 서고 말았다.
중국도 우리 정부로서도 이 같은 사정을 모르지 않았지만 북한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북한은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아쉬운 소리 한마디 없이 신기하게도 그럭저럭 잘 견뎌냈다.
시골에서는 부쩍 늘어난 소달구지들이 자동차를 대신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평양을 비롯한 도시의 거리는 가끔씩 지나가는 목탄차 외에는 온통 자전거의 행렬들로 넘쳐났다.
비록 그들의 삶은 10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지라도 중국의 기대와는 달리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있었다.
다시 북경이다.
5미터도 더 되어 보이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고풍스러운 저택의 정원을 거닐며 이 저택의 주인이 허 원장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다.
“허 원장!, 이쯤에서 본래대로 되돌려놔야 되겠습니다,
더 진행하다가는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겠어요,”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공연히 중국에 대한 적대감만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 위원장이 살아있는 한은 어렵겠습니다, 지금으로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최상의 선택일 것 같습니다.
감금된 군부 5인방도 정치범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 말에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던 이 저택의 주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를 의식한 조치로 보아집니다, 정 위원장이 우리와의 관계 복원까지도 내다보고 있으니⋯
내일부터는 대북 송유를 재개해야겠어요! 수출입통관절차도 간소화시키고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진건가요!”
“아닙니다!, 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잠시 둘러서 갈 뿐이지 결코 우리가 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북공정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요, 조만간 정 위원장을 북경으로 초대해야겠어요!, 이번에는 선물도 많이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이 저택의 주인이 얌전하게 두 손을 뒷짐진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허밍친 원장도 하늘을 쳐다보며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동북공정에 대한 비장감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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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