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성 청사의 지하 3층에 위치한 비상통제구역, 이곳은 처음부터 특별히 보안을 요하는 중요회의를 위하여 설계된 장소였다.
완벽한 방음시설에 2중의 출입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경비병들이 좌우로 서서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다.
지금 이곳 소회의실에는 중국 군부의 실세인 리하오쑤(李昊蘇) 총 정치부 주임을 비롯한 모두 여덟 명의 당정군 고위인사가 참여하여 팽팽한 긴장감속에 벌써 한 시간째 회의 중이다.
이 자리에는 동북공정의 총본산인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을 직접 지휘하는 중국사회과학원의 허밍친(何應欽) 원장도 참여했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서둘러서 북경에서 출발하여 길림성 장춘으로 날아온 이유는 동북삼성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길림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최근 북한의 제1차 핵실험으로 일촉즉발의 위험수위까지 다다른 북미 간의 긴장도는 접경지역의 주민들을 극도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만약 북미 간의 핵전쟁이라도 발발한다면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길림성이 입게 될 피해는 불을 보듯 자명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북한의 핵실험을 바라보는 당국의 대응은 한마디로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북한의 눈치나 살피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지도부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주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는 실정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부랴부랴 중앙당 차원의 대책을 수립하고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리하오쑤(李昊蘇) 총 정치부 주임을 파견했다.
리 주임은 평소 북한과 동북삼성의 문제는 동북공정으로 풀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동북공정의 최고 책임자인 허밍친 원장을 이곳까지 대동했다.
리하오쑤와 허밍친을 제외하고도 이 자리에는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길림성을 움직이는 당정군의 핵심 인물들이 거의 다 참석했다.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동북공정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실무책임자들이다.
길림성의 4역이라는 우커핑(吳克平) 길림성 책임비서, 마초우준(馬草埈) 정치부장, 항리우(杭立武) 감찰부장, 인창칭(殷長靑) 선전부장을 위시하여 선마오성(申武盛) 16집단군 참모부장, 그리고 왕징(王卿) 장백산천지회 회장이다.
회의 시작부터 여기저기서 흥분된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회의실은 이들의 격앙된 목소리로 자못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길림성의 제1인자와 2인자가 연속적으로 발언했다.
“핵실험 강행 25분 전에야 노동당 중앙연락부를 통해서 그것도 전보로 우리 외교부에 통보를 했다고 하니 이것은 저들이 우리를 얕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아주 본 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16집단군 참모부장께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은데”
지목을 받은 선마오성 제16집단군 참모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탁자를 손가락으로 탁탁! 치면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지금 16집단군 고위 장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번만큼은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중조국경 최전방에 배치된 우리 16집단군과 64집단군의 병력을 추가로 증파해서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정제되지 않은 초강경 목소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이들은 중앙당의 실세인 리하오쑤 총 정치부 주임이 참석한 것을 계기로 그동안 축적된 접경지역의 긴장감을 한꺼번에 토해 낼 심산이다.
"이번에 조선은 우리 측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눈치 안 보고 제멋대로 행동하겠다는 선전포고입니다,
저 망니니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동북지역 전체가 핵전쟁 터로 변할 수도 있는 대단히 위중한 상황입니다,
인민들의 동요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조만간 당군정 연석회의를 소집해서 가장 강력한 불쾌감을 전달하는 수단을 모색해야 합니다."
"주석께 건의해서 조선으로 무상지원하는 원유 송유관을 전면 폐쇄하는 것은 물론, 일체의 원조를 중단하고,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즉각 소환해야 합니다."
이때 청나라 전통복장의 옷소매 속에 양팔을 집어넣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허밍친 원장이 이들의 발언에 가세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조선 권력집단이 너무나도 자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동북공정의 완성을 위해서도 이 시점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꺾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좋은 의견을 구하자고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홍일점인 사십 대 중반의 작달막한 키의 여성이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뜨면서 허밍친 원장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길림성의 권력서열 4위 인창칭(殷長靑) 선전부장으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주변의 인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하여 독거미라는 별명이 붙은 대단히 냉철한 여성이다.
“그 자주성의 핵심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그녀가 허밍친을 대면하기는 이번이 세 번째였지만 그녀야말로 허밍친 원장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동북공정의 최전선은 길림성인데도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글쟁이가 북경에 버티고 앉아서 동북공정의 최고 책임자 입네 하면서 지시하는 꼴이 도대체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길림성 내에서 이루어지는 고구려, 발해의 유적지 조사도 모두 자신의 소관업무였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변강사지연구중심이라는 이상한 조직이 생기면서 모두 북경으로 넘어가 버렸다.
흑룡강파건 장백산천지회건 모두 자기 손바닥 안에서 놀았는데 요즘은 그들조차도 자신을 우습게 알고 허밍친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허밍친은 노련하게도 마치 학생을 가르치듯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해 나갔다.
과연 그에게서는 역사학계 최고권위자로서의 품위가 넘쳐났다.
그는 번쩍거리는 대머리를 꼿꼿이 든 채 인창칭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마치 너 같은 애송이는 내 적수가 아니라는 태도다.
“짐작하시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조선의 군부가 아니라 정일 국방위원장입니다.
우리가 똑바로 직시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 조선의 자주성은 정일성 주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망한 지 이미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조선의 주석이 정일성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오늘날의 조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일 위원장이 그 자리에 앉고 싶어도 앉을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 조선의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통치기반을 정일성 주석의 유훈통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창칭도 지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가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팔로군 출신으로서 마오쩌뚱과 대장정을 함께 한 중국공산당 창건의 핵심 인사였다.
“그런데 정일성이라는 약발이 과연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정일의 아들 대와 그 손자 대에까지 이어질까요?”
“글쎄요,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정일 위원장이 없는 조선을 상상해 보고 그다음의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것은 곧 조선사회 전체가 정신적인 구심체를 상실한 채 급속한 공항상태로 빠져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조선의 군부는 우리에게 협력하여 저들의 살길을 모색하기에 바쁠 것입니다.
어차피 조선은 선군정치라는 미명하에 군부가 권력의 전면에 나서는 구조이기 때문에 정 위원장이 없는 조선을 우리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겠습니다."
허밍친을 향한 표독스러운 눈빛을 멈추지 않던 인창칭의 반격이 이어졌다.
"지금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하셨습니까?"
의기양양한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에 상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나치게 학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묘하게 분위기가 중앙과 지방의 대치전선으로 흘러가자 이번에는 우커핑(吳克平) 길림성 책임비서가 나섰다.
자칫 길림성의 책임자들이 북경에서 내려온 인사들과 대립하는 태도로 비쳐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급히 수습에 나섰다.
“우리 길림성은 동북삼성 중에서도 조선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위수지역이기 때문에 항상 조선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실정입니다.
몇 년 전부터 조선의 불편한 속내를 알면서도 중조 국경선에 공안 대신 인민해방군을 대거 투입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명분은 탈북자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어느 시기 급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조선 내부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조치였습니다.
이번에 조선의 핵실험으로 술렁이는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서도 당국의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점을 리하오쑤 주임께서 각별히 참고하여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길림성의 조무래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댈 때는 심기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책임비서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니 이제는 자신이 이곳에 내려온 목적을 분명히 밝혀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인민복 상의를 탁탁! 털면서 일어나더니 좌중을 천천히 살펴본 후 발언을 시작했다.
오늘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면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심산이었다.
“본인이 급히 북경으로부터 날아온 이유는 조선과 가장 가까운 이곳 길림성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중앙당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앙당의 입장을 말씀드리자면 현시점에서 중국은 한반도에서 여타의 위기적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반대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길림성의 최고 책임자들을 모신 자리에 허 원장과 함께 비선조직의 대표도 자리를 함께 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차후로는 변강사지중심의 정당성이나 허밍친 원장의 활동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부각해 주자 허밍친 원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옆자리의 감찰부장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것은 극비사항입니다만 정 위원장의 최근 건강상태는 최악입니다.
머지않아서 정 위원장의 유고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요.
이럴 땐 우리 중국이 가장 민첩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닥쳐올 앞날의 불안감 때문에 혼란스러운 조선의 군부를 적극 회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신속하게 친 중국정권을 수립하도록 조종해야 합니다.”
리하오쑤 주임은 우커핑(吳克平) 길림성 책임비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회의실의 분위기를 더욱 긴장상태로 몰아갔다.
“국가적인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의 종국적인 목표는 조선의 완전한 흡수합병입니다.
따라서 조선 인민은 물론이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국제관계를 철저하게 조종해야 합니다!”
그는 잠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실내에서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때였다. 아직까지 중앙당 상무위원의 발언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왕징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면서 끼어들었다.
모두들 의아한 눈빛으로 그의 이런 당돌한 태도를 주시했지만 주변의 시선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느긋한 표정이다.
동북삼성 일대를 주름잡는 삼합회의 두목답게 자신만의 독특한 중저음의 톤으로 발언했다.
“한국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요? 전쟁이라도 한판 벌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리하오쑤는 왕징의 느닷없는 돌출성 발언에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여유롭게 답변하기 시작했다.
“단언합니다만, 한국은 무시해도 좋습니다.
우리와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조선을 지키려는 의지가 그들에게는 없는 게 분명합니다.
또 그들의 내부사정으로 살펴볼 때 국론이 갈라져서 민첩하게 대처할 수도 없어요.
장담하건대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긴 싸움입니다!”
이제 리하오쑤는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하달하기 위해 우커핑을 지목하였다.
“우커핑 책임비서!”
“옛! 주임 동지.”
"핵실험 직전에 그것도 저들의 통보를 받고서야 정보를 접했다는 것은 우리의 수치가 분명하오!
이런 저급한 수준의 대조선 정보망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소!
중앙당 차원의 정보망과는 별개로 성 차원의 별도 정보망을 구축해 보시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조선의 내부사정을 오류 없이 파악하는 것이오,
최상의 정보보고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갈래의 정보를 취합하여 교차분석하는 과정이 시급하게 되었소”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커핑이 번들번들한 대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쩔쩔매자 리하오쑤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그리고 오늘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여덟 명이오.
만약 오늘의 회합 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그 출처를 반드시 밝혀내서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오. 모두들 아시겠소?”
리하오쑤의 질책은 참석자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의 보안유지가 실패로 끝난다면 그 뒷감당을 각오하라는 엄포였다.
리하오쑤와 허밍친을 제외한 여섯 명의 참석자들은 회의실을 나가면서 모두 맥이 빠진 모습들이다.
애당초 북경에서 내려온 리하오쑤 주임의 의도는 접경지역의 책임자들에게 한가한 브리핑이나 받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무려 두 시간 가까이를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댔으니 얼마나 한심하게 비쳤을까.
모두가 출근한 아침시간, 창우는 목이 타는지 연신 물을 들이켰다.
어젯밤 자신의 아파트에서 마신 술이 문제였다.
40도짜리 백두산들쭉술 큰 병 하나를 혼자서 다 비웠다지만 웬만해서는 이렇게까지 속이 쓰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은하의 배필감으로 점찍어둔 윤 선생을 초대하여 밤늦게까지 술잔을 주고받았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맥주까지 몇 병을 섞었더니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책상 위의 직통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한다.
보안이나 당과 관련된 사업이 있을 때만 울리는 비상전화였기 때문에 그는 긴장된 자세로 수화기를 들었다.
“예, 대외무역사업부 조선담당 과장 배창우입니다.”
“나 감찰부장이네. 자네 지금 당장 이리로 뛰어 와!”
“예, 지금 즉시 찾아뵙겠습니다.”
길림성의 공산당 서열 3위인 감찰부장의 긴급호출이었으므로 그는 잠시도 머뭇거릴 새 없이 공항을 향하여 차를 몰았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청사에서 400킬로나 떨어진 장춘에 있는 길림성의 정무청사를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로도 족히 오십 분이나 걸리는 장거리였다.
장춘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쏜살같이 정무청사에 도착한 창우는 방금 출발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7층에 위치한 감찰부장실까지 계단으로 무작정 뛰어올라 갔다.
창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서실장이 그의 몰골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짜증 난다는 눈빛으로 창우를 노려보더니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턱짓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창우는 마치 죄인처럼 슬금슬금 옆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섯 평 남짓의 대기실에는 검정색 소파와 테이블 외 화분이 몇 개 놓여있을 뿐이다.
그는 창가에 서서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늦가을의 찬바람을 맞으며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말렸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일까?
지난번에도 아버지 문제로 감찰부장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나마 당으로부터 주의처분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기에 망정이니 하마터면 출당조치를 당할 뻔했다.
금년에만 벌써 두 번째로 불려 왔으니 창우의 심장은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소파에 앉아 있기도 거북하여 그는 연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옆방의 비서실에서 나는 소리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창우가 정무청사에 당도한 지도 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땀에 젖은 얼굴이며 와이셔츠가 어느 사이에 깨끗이 말라있다.
담배 한 대를 더 피운 후에야 비서실장이 창우를 감찰부장실로 안내해 들어갔다.
“많이 기다렸나? 솔직히 말하면 난 자네가 연길에서 근무 중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지 뭔가.
정무청사에서 함께 근무하는 걸로 착각을 해서 회의 전에 보자고 했던 것인데 미안하게 됐네.”
“괜찮습니다,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이때 단정한 용모의 비서 아가씨가 차를 내어왔다.
감찰부장은 차를 권하면서도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배 과장! 자네의 투철한 당성은 내가 잘 알고 있지.
아마 자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당에 입당했을 거야.
그때부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쭉 지켜봐 왔으니 당에 대한 충성도는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자네가 당을 위해서 큰일을 한번 해주었으면 해서 내 이렇게 보자고 했네."
창우는 이 말뜻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책임추궁을 하려고 호출한 게 아닌 것은 확실했다.
“당원으로서 국가와 당을 위해서 지켜야 하는 비밀 준수 의무를 기억하고 있겠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자네가 무덤으로 들어가는 그 시간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점 명심하고 들어주게.
잘 알겠지만 발설하는 순간 자네는 당의 준엄한 문책을 받게 될 걸세”
감찰부장의 매서운 눈빛을 보는 순간 창우의 표정이 바짝 얼어붙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부터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사흘 전 우린 조선에서 핵실험을 하기 이십오 분 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
“벌써 몇 년이 지난 이야기네만, 사실상 조선 내의 첩보망이 일망타진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어.
우리 쪽 국경지역 국가안전국 책임자가 조선 정보당국에 삼십만 달러에 매수된 사건이 있었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구축해 놓은 첩보망이 하루 밤 새 완전히 와해돼 버렸어,
그 후로는 완전한 먹통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
“……”
감찰부장은 의도적으로 창우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때문에 창우는 몹시 피곤했지만 그저 감찰부장의 눈동자만 바라볼 뿐이다.
“작년에는 제16집단군 포병여단에 소속된 인민해방군 병사가 새벽에 국경을 넘어온 조선군인 다섯 명에게 몽둥이로 살해된 사건이 있었어,
이때 우리 인민해방군이 발칵 뒤집혔지.
베이징 주재 조선대사를 소환해서 강력하게 항의하고 해방군 병사를 살해한 조선군인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었단 말이야.
그런데 저쪽에서 거부하면서 중조 간의 관계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악화 됐던 것이 사실이야.
이런 사정으로 우리 쪽의 정보라인을 새롭게 구축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네,
그러니 사흘 전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발생했고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란 말일세“
창우는 지금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겉으로는 대단히 놀라는 척 억지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찰부장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서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하달하실 지시사항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
감찰부장이 창우를 전체적으로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자네가 수시로 그쪽을 드나드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그쪽 관료들 중에는 터놓고 지내는 지인들도 꽤 있다지?”
이제야 창우는 감찰부장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조선의 친구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첩보망을 구축하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창우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친구들과는 오랫동안 교역 실무를 관장하면서 신의를 바탕으로 맺어진 사이다.
창우는 추호라도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었다.
십중팔구 그 결말은 총살형 아니면 아오지탄광행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찰부장은 창우의 이런 의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자네가 그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비록 자네는 조선족 출신이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지 않은가?
그래서 당이 자네를 믿고 하달하는 명령인 만큼 국가와 당을 위해서 결코 사양하는 일은 없으리라 믿네만!”
이런 아찔한 상황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창우의 동물적인 육감이 위력을 발휘했다.
지금 이 순간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당이나 직장에서 쌓아온 그의 업적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은 자명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친구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감찰부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부장님! 당원으로서 주어진 소명은 최선을 다해야겠으나 저는 적임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역사업차 수시로 조선을 드나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무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사적으로 편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처지입니다.
그쪽 사람들의 경계심이 워낙 심하다 보니 저와는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지도 않습니다.
이런 저의 처지를 생각할 때 이토록 중요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적임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해하여 주십시오!”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된 듯한 창우의 의중을 노련한 감찰부장이 모를 리 없었다.
별안간 감찰부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자그마한 체구를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창우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배신감이 농축된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자네! 지난달에도 당으로부터 주의처분을 받았었지? 자네 아버지 건으로 말이야.
지금 당에서는 자네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것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무조건 당의 지시에 따르도록 해!.
필요하면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네.
내 말 알아듣겠나?”
지금 감찰부장은 창우의 개인적인 의견 따윈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명령했고
창우는 지금 그 자신에게 어떤 선택권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건성으로 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부장이 창우를 노려보면서 다시 말했다.
“목표는 코드 완, 정 위원장일세.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수시로 나에게 직접 보고해 주게. 내 말 알겠나?”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저쪽에서의 제 처지로 볼 때 그 정도의 정보를 접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더라도 혹여 정보거리라도 접하게 되면 부장님께 곧장 보고 드리겠습니다.”
창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감찰부장이 표시가 나도록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의 눈빛은 창우를 믿지 못하는 눈치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창우만 한 적임자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항리우(杭立武) 감찰부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그는 흥분된 상태에서도 한편으로는 창우를 달래는 노련함도 보였다.
“물론 당에서 하는 일이니 그렇게 엉성하게야 하겠나?
자네 말고도 여러 명의 정보원을 활용할 계획이니까 너무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자, 그리고 이건”
그는 탁자서랍을 열더니 두툼한 편지봉투를 꺼내며 앞으로 내밀었다. 어림잡아도 상당한 액수의 돈이었다.
“이건 자네 활동비로 주는 것이니 부담 없이 쓰도록 해.”
이 상황에서 창우의 동물적인 육감이 다시 한번 더 위력을 발휘했다.
자칫 우물쭈물하다가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뒷감당이 어려운 상황으로 내어 몰릴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부장님, 국가와 당을 위한 일입니다! 공작금이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당에서 베풀어준 은혜를 보아서도 소소한 자금은 제 사비로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 돈은 지금 받을 수가 없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창우의 이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찰부장이 모를 리 없었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는 더 이상의 시험은 의미가 없었다.
적의를 지닌 사람처럼 창우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감찰부장이 굵은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창우역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오늘은 6박 7일간의 연변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연길공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아침 일찍 배 교수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계획이다.
그런 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은하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서 여행 가방을 정리했다.
이때 은하로부터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며 아버지의 사무실로 들러달라는 연락이 왔다.
백산호텔의 정문을 나서는데 문득 중국의 작은 거인 등소평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마치 인자한 시골 아저씨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중화제국의 무서운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연변으로 출장 오기 전, 서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 교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윤 군, 역사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한 시도 망각해서는 안되네.
티베트나 위구르를 떠올려 보게!
자신들의 역사를 중화제국에 모두 빼앗겨버린 채 이젠 그들의 정신마저도 중국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일세.
한 번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다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는 법일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다시 한번 그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중화제국주의의 마각은 우리 민족의 북방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장차는 한반도의 북부에까지 뻗치려 한다.
이것은 한가로운 역사논쟁이 아니라 한중간의 살벌한 영토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이기는 민족은 잃어버린 옛 영토마저 회복할 수 있겠지만 패배하는 민족은 오늘날의 실효적인 지배 영토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 옛날 고구려는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여 그 많던 북방 영토를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천삼백 년이 지난 우리 후손들이 또다시 어리석게 대처한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마저 잃게 될 것이고 영원히 민족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지금까지 온화하게 생각되던 등소평 영감의 얼굴이 결코 온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등소평의 미소 뒤에 숨어있는 중화제국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 역량을 한 군데로 모아 남과 북이 온전하게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 민족의 통일만이, 그것도 우리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만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은하가 문밖까지 나와서 택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은하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올려준 뒤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는 배 교수와 최 씨가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 선생,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그동안 정도 참 많이 들었는데 이거 섭섭해서 어쩝니까? 여기로 어서 앉아요.”
배 교수는 덤덤히 앉아 있을 뿐 별말이 없었으나 붙임성 좋은 최 씨가 반갑게 맞이했다.
시골 고향의 어느 친척 아저씨 같은 그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교수님과 아저씨께 신세 많이 지고 떠나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국은 시원하게 끓인 북엇국이었다.
어제 단동과 삼합을 다녀온 후 밤늦게까지 창우아파트에서 과음했던 나를 위해서 은하가 속풀이로 준비한 모양이다.
식사 후 배 교수는 오늘도 소천지에서 담아 온 물로 우려낸 백두산 야생녹차를 한잔씩 따라 주었다.
“오늘 가신다고요? 어떻게 오신 목적은 달성하셨는지요?”
“예, 교수님께서 여러 가지의 귀중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던 부분들에 대한 가르침이 컸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가 부끄럽지요,
아무 데서나 생각 없이 불쑥불쑥 내뱉는 내 말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소?”
엊그제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창우와의 다툼을 염두에 둔 듯 어깨가 축 쳐진 표정으로 말했다.
“북조선의 핵실험으로 우리 민족에 미칠 국제정세가 결코 간단치 않을 겁니다,
윤 선생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시거든 하실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리라 믿어요.”
배 교수의 얼굴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민족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선 대쪽 같은 선비의 얼이 묻어났다.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외세의 무수한 침입을 잘 이겨내었듯이 이번에도 그리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윤 선생이 존경한다는 학자 분이 서 교수님이라고 했죠?
연변에 오실 일이 있으면 날 한번 꼭 만나고 가시라고 말씀 좀 전해주시오.
그런 분과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오.”
이제야 배 교수의 얼굴에 가득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그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예 교수님,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서 교수님과 교수님은 생각이 같으신 분들이시니 서로 만나시면 하실 말씀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은하가 들어와 단정한 반무릎 자세로 앉은 채 가만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선생! 작금의 민족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통일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통일은 먼저 남과 북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배 교수의 얼굴에선 어느새 어두운 기색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황소같이 부릅뜬 그의 큰 눈동자에선 예전처럼 광채가 뿜어났다.
“선생, 언제까지라도 이 차의 향기를 잊지 마세요. 백두산의 정신입니다.
우리 민족의 중심은 서울이 아니에요. 협소한 반도사관을 하루속히 떨쳐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중심은 백두산이에요!
백두산을 중심으로 이 드넓은 간도 땅이 모두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어요.
그럼요. 우리 민족의 북방 고토를 되찾아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북방 역사를 지켜내야 합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동북공정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는 중국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우리 민족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동간도일대의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고, 또 나머지 소수민족에게 독립의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중국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한 뇌관이 바로 한반도 통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필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영구분단 내지는 북조선의 흡수를 도모하려는 것이지요.
중국으로서도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중국의 동북공정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통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통일은 한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선생!, 연변 구석에 처박혀있는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하는 말이라고 흘러들으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말을 마친 배 교수의 눈가에서는 또다시 이슬방울들이 맺혔다.
국내성에서 보았던 그 눈물, 백두산 천지에서 보았던 그 눈물을 나는 지금 또다시 보고 있었다.
배 교수는 미리 준비한 나무통과 물병하나가 담긴 보자기를 나에게 건넸다.
“선생, 백두산에서 따온 녹차 잎과 소천지에서 담아 온 물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이 담긴 물건이에요.
한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원들과 함께 나누어 드세요.
이걸 드시고 힘들을 내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머지않은 가까운 날에 통일의 기회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한국 사람들이 조금만 더 양보하고 인내해 주세요.
그래야만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중국을 이길 수 있어요. 부탁합니다, 윤 선생!.”
배 교수의 간절한 당부 말이 이어지는 동안 최 씨는 나와 은하를 번갈아 쳐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우리들 사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최 씨가 우리 사이를 어떻게든 배 교수에게 인정받게 해주고 싶었던지,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은하를 부르며 내 옆의 빈자리에 앉아 같이 차를 마시자고 했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앉으려는 순간, 배 교수는 바쁠 텐데 그만 일어나라고 일침을 놓았다.
또다시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방금까지의 우호적인 태도와는 또 다른 배 교수의 완곡한 반대의사 표시였다.
동북공정은 동북공정이고, 은하와 내 문제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로써 아직까지는 추호도 허락할 의사가 없다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마저 배 교수는 그 자신의 장벽을 허물 뜻이 없었다.
최 씨가 비행기 시간도 아직 남았는데 좀 더 있다가 일어나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배 교수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배 교수와 최 씨를 향해서 큰절을 올렸다.
그들도 앉은자리에서 함께 맞절을 한 후 사무실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 주었다.
택시에 오를 때까지도 배 교수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은하가 안 돼 보였던지 최 씨가 눈짓으로 함께 타라고 했다.
이를 묵인하려는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는지 배 교수는 사무실 안으로 말없이 들어가 버렸다.
택시 안에서 은하는 그녀의 낡은 가방을 열었다.
예쁜 뚜껑이 달린 손바닥만 한 녹차 잔을 꺼내더니 아버지가 싸준 보자기 속에 가지런히 함께 싸며 말했다.
“선생님, 이 잔은 제가 북경에서부터 간직하던 잔입니다.
이 잔으로 차를 드시면서 은하생각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마다 저도 선생님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은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가에는 일주일 전처럼 아직도 코스모스가 한가로이 흔들리고 있다.
연길공항에서 은하를 만난 후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었으므로 택시 안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린 코스모스 흩날리는 공항 길을 따라서 다정히 손을 맞잡은 채 얼마간을 그렇게 걸었다.
배 교수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지만, 사실은 어젯밤 우린 창우 집에서 결혼을 약속했었다.
일주일 전 이 길을 걸을 때는 막 싹트기 시작하던 풋사랑이었지만, 지금 돌아가는 이 길은 그 사랑이 꽃을 피워 코스모스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은하는 앞으로 뭐 하면서 지낼 거야?”
화려한 코스모스 군락지에 마음을 빼앗긴 채 걸으며 은하가 내 물음에 답했다.
“아버지는 당분간 당신 하시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시지만, 오빠가 싫어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시는 일에 제가 개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저 아버지 식사나 신경 쓰면서 수발정도만 들어줄 생각입니다.
대신 새언니가 조카 형철이하고 형철이 친구들 공부를 봐주는 과외를 권하기에 그럴까 생각 중입니다.”
오늘 배 교수의 태도로 봐서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남과 북의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서 그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게는 도무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은하와 함께 걷고 있는 내 발걸음이 하염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늦가을에 접어든 길가의 코스모스들도 절반은 꽃씨를 머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난 어릴 때부터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군락지를 유난히도 좋아했었다.
초등학교시절에는 해마다 가을 이맘때면 코스모스 꽃씨를 봉지 가득 받아 두었다가, 이듬해 봄이면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코스모스 씨를 뿌리며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자연스럽게 코스모스 꽃길이 조성된 줄을 알았겠지만, 한동안 우리 마을은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즐거움을 함께 누렸다.
아마도 그때부터 난 동시를 짓기 시작하며 가을이라는 계절을 사랑했던 것 같다.
요즘도 가을이면 습작시를 긁적이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버릇이 있는데, 이 버릇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길을 걷다 말고 은하의 어깨에 가만히 내 두 손을 올린 후 은하의 눈을 자세히 응시했다.
은하도 미소 머금은 두 눈으로 내 눈을 또렷이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풋풋한 향기가 길가의 활짝 핀 코스모스 향기와 더불어 내 뇌리 속으로 전달되었다.
“얼마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빠가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내면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우린 결혼하는 거야.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도 어머니한테 은하 이야기를 해서 은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게.”
은하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며 얼굴을 가슴속에 파묻었다.
“그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난 이제 선생님 생각만 하면서 살겠습니다.”
오늘도 은하는 언제나처럼 청바지차림이고 북한직영가게에서 사 준 머리핀으로 목 부위까지 머리를 단정히 감싸고 있었다.
길가의 노란색 코스모스 꽃을 하나 꺾어 은하의 머리핀 위에 꽂아주었다.
머리에 꽂아 준 꽃이 길가에 떨어지자, 은하는 그것을 다시 주워서 향기를 맡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정해둔 일정도 없이 마냥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하기도 하겠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은하를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마흔 넘은 아들이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지내는 것이 못내 속상하셨던 어머니이셨기에 기뻐하실 모습이 두 눈에 선했다.
어머니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정안수를 떠놓으시고 기도하신다.
소원은 오직 하나뿐, 아들이 참한 규수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소망이다.
어서 은하를 한국으로 데려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야겠는데 배 교수의 저 단단한 벽이 답답할 따름이다.
어느새 공항청사에 다다랐고 우린 가까운 광장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처음 공항에 내리던 날 하염없이 은하를 기다리던 바로 그 자리다.
출국수속을 밟으려면 한 시간 전에는 들어가야 하니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십여분이다.
연변에 도착하던 날 은하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있던 그 자리에서 이제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 잠깐 동안의 이별을 아쉬워하게 되었다.
천생연분이란 이런 걸 두고서 하는 말인가?
은하의 채취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은하가 나의 천생연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한동안 은하의 향기를 맡지 못할 것 같아 은하 모르게 그녀의 향기를 긴 숨으로 음미해 보았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어.”
“선생님 출국장으로 들어가시는 것까지는 보고 가겠습니다.”
은하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작별의 아쉬움 때문인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항 안으로 따라 들어오면서 내 손을 잡은 은하의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출국장을 통과하며 은하를 돌아다본 순간, 슬픈 표정의 한 여인이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슬픈 모습으로 손을 흔들던 은하의 애처로운 영상이 자꾸 떠올라 가슴 한가운데가 짠하게 시려온다.
이런 불편한 마음 탓이었을까?
왠지 건너편에서 내 쪽을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들이 있어 온통 신경이 거슬렸다.
공안인 듯 검정색 정장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와 흰색 이어폰을 꽂은 두 사내가 매서운 표정으로 연신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여권과 비자를 건네주었다.
컴퓨터에 이름을 입력하던 심사원이 한 번 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리고 슬며시 심사대 밑으로 손이 갔다. 아마도 무슨 비상 호출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그 순간 나를 힐끔거리던 사내들이 신속히 내 쪽으로 다가와 잠시 확인할 게 있다고 하면서 다짜고짜 내 양팔을 하나씩 움켜잡았다.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공항청사의 지하주차장이었다.
나는 강력하게 저항해 보았지만 두 사내의 완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가 '끼익~' 하는 요란한 타이어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도착했다.
나를 강제로 뒷좌석에 태우더니 내 가방을 앞자리의 조수석에 집어던지는 것을 신호로 검정색 승용차는 어디론가 급히 출발했다.
“이것 보시오! 난 지금 비행기를 타야 한단 말이오.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뭡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차에 타서도 두 사내는 나의 양팔을 힘껏 잡고 있어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차는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삼십 분가량을 더 달리고서야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한 사찰 앞에 도착했다.
왼쪽에 앉아있던 사내가 먼저 내린 후 자신의 왼손을 차문에 걸친 채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그 사내의 왼 손목에는 산 모양의 파란색 문신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청년은 짙은 선글라스로 자신의 신원을 숨기고 있었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련된 미남형의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와 큰 키, 생각이 날듯 말 듯하면서도 좀 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보았을까?
두 사내가 양팔을 부여잡은 채 데리고 간 곳은 대웅전이었다.
그곳에는 흰색 중절모자에 상하위조차도 모두 흰색 정장차림의 중년신사가 불상을 바라보면서 앉아있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 입구에 벗어놓은 구두도 흰색이었던 것 같다.
양팔을 자신의 가슴으로 낀 채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모양새가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 자의 무릎 앞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 처음에는 향이 타고 있구나 생각했지만 냄새가 고약하여 자세히 보니 향을 담은 그릇에서 시거담배가 타고 있었다.
이 자는 지금 무례하게도 대웅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드넓은 대웅전 안은 다소 어두워 보였다.
이 자가 담배만 피우지 않는다면 진한 향냄새와 달랑 양초 두 개만 켜놓은 대웅전의 분위기는 불상에 엎드려서 기도하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분위기이다.
불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에서 보았던 여느 불상들과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극도의 우울한 감정이 느껴지는 흔치 않은 불상이었다.
느릿하지만 중저음의 중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 선생, 오신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불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세에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양팔을 잡고 있던 두 사내가 나를 이 자의 삼사 미터쯤 후방에 앉힌 후 양쪽 옆으로 물러나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뉘신지요?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붙들려 왔습니다.”
“선생, 저 불상이 바로 등신불이오.”
“……”
등신불이라는 말에 갑자기 전율이 몰려오면서 충격적인 눈으로 자세히 바라봤다.
이 중년의 신사는 끝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지 고정된 자세로 불상만 바라봤다.
그의 말 사이에 '땡그랑~ 땡그랑~' 하는 풍경소리가 마치 장단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가 위안이 되어 불안했던 내 마음도 어느새 많이 진정되었다.
“저 등신불상은 산 사람이 자청해서 자신의 몸에 금물을 붓게 하여 불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원초적인 고행을 위해서 스스로 불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저 표정을 한번 보세요?
정말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인위적으로 만든 조각품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기운이 느껴지지 않느냐 말입니다.
저 등신불상의 실제 인물이 신라 사람이었다 합니다.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이 근방에서는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어요.
저 등신불상에게 기도하면 어떤 소원도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어쩐지 불상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깊은 슬픔이 느껴졌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장 원초적인 고행을 위해서 자신의 살아있는 육신을 펄펄 끊는 금물로 뒤집어썼다는 말속에서 슬픈 표정의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선생, 오늘 떠나신다고요?”
이 말뜻은 나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었다.
“네,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공항에 있었습니다.”
“선생, 너무 걱정 마시오! 선생을 해칠 의사는 없으니까. 단지 경고를 하기 위해서 잠시 모시고 왔습니다.”
해칠 생각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안도의 마음이 들었지만 경고라는 말에 또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 등신불상 말입니다. 우리 중국인들은 저렇게 못합니다.
산 사람이 자청해서 등신불상이 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 당신 민족은 우리 중국인에게는 없는 지독한 구석이 있어요”
“고구려가 그랬어요! 우리 중국 입장에서 바라본 고구려라는 존재는 정말로 징글징글한 족속이었어요.
고분고분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대가리 빳빳하게 쳐들고 싸우려고만 들었으니 야만족도 그런 야만족이 없었지요.”
다소 듣기가 불편했지만 이 시점에서 속히 이들의 용무를 끝내게 하여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선생! 우린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이 우리나라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조직이라면서요?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 우린 우리의 일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선생을 모신 겁니다.”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한두 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맞은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저 고통스러운 표정의 등신불상이 지금의 내 마음과 잘 어울렸다.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십여분은 지난 것 같은데 도대체 이 절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면 이들이 모두 통제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선이 핵실험을 강행했어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저들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우리의 경고를 무시했으니 앞으로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될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한국이 필요이상으로 개입하게 된다면 대단히 우려스러운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선생! 당신들이 간도라고 부르는 우리나라 동북삼성지역의 영토문제에 필요 이상의 간섭을 중단하시오!
그리고 조선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관심에 대해서도 아예 관심을 끄도록 하시오!
그런데 제아무리 협박을 당하는 입장이라지만 명색이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원으로서 이 대목에서는 마냥 침묵할 수 없었다.
“한국과 북한이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씀 같습니다.
우린 반만년 동안 같은 민족으로서 지내왔고, 분단된 지는 아직 칠십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느닷없는 돌출성 발언에 그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느릿한 말투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생은 조선과 한국은 국제법적으로도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겁니까?"
이 시점에서 남북한을 별개의 주권국가라고 강조하는 이 자의 의도를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북한의 급변사태를 가정하여 사전에 우리의 연고권을 차단하기 위한 저들의 술수가 내포돼 있었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같은 동포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언젠가 반드시 통일되어야 하는 같은 동포란 말입니다.”
“선생! 우리나라에는 오십오 개의 소수민족이 있어요, 그 가운데는 조선족도 엄연히 포함되어 있지요.
조선족 자치주의 공식적인 언어와 문자도 당연히 당신들과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우리 중국의 변방에 존재했던 지방정권이었어요.
선생, 다시 한번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당신들이 간도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영토문제에 간섭을 중단하시오!”
여기서 더 이상 대들었다가는 이 자의 불편한 심기상태로 봐서는 무슨 해코지를 당할 것만 같아 더 이상의 대응은 위험했다.
“당신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여기서 보고 들었던 사실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우리 단원들이 늘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누구라도 우리나라의 동북공정을 방해하려 든다면 그 자가 누구든, 어떤 세력이던, 우린 반드시 그 자를 응징하게 될 것이오!
선생! 가족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법이오.
여기 남아있는 당신의 소중한 여인을 생각해서라도 자중 또 자중해야 할 것이오.
우리 장백산천지회는 결단코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아, 드디어 그의 입에서 자신들의 본색을 밝히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마에서는 한두 방울씩 맺히기 시작하던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 전까지는 제법 반론을 제기하는 객기까지 부렸지만 어느 사이에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저들의 용무가 끝나자 두 사내에 의해서 또다시 양팔이 잡힌 채 곧장 대웅전 밖으로 끌려 나왔다.
끌려 나오면서 신라 사람이었다는 고통스러운 표정의 등신불상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불상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안타깝게 내려다봤다.
다시 공항으로 되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석양이 내려앉은 저녁시간이었다.
왼쪽손목에 산모양의 파란색 문신을 새긴 청년이 일사천리로 출국수속을 마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시간이 변경된 새로운 인천행 티켓을 건네며 본의 아니게 실례가 많았다며 사과했다.
무표정한 겉모습과는 달리 선글라스 속의 선한 인상을 숨기고 있던 그 청년에게 내가 물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요?, 암만 생각해 봐도 낯이 익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럴 리가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끝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왠지 이 청년에게서 낯익은 감정이 느껴진다.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일그러져 있던 등신불상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쉽사리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은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별안간 몇 시간 전에 헤어졌던 은하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면서 불안은 더욱 큰 불안을 증폭시키는 심리로 작동되었다.
나를 태운 비행기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동안 그 불길한 생각 때문인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두 손의 힘줄이 끊어질 정도로 의자를 바짝 쥐었다. 얼마나 힘껏 쥐었던지 양손에서는 진땀이 날 지경이다. 물밀듯 몰려오는 공포감을 이기기 위하여 두 눈을 힘껏 감았지만 공포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악몽 같았던 순간이 지나가고 비행기가 수평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륙하는 동안 긴장되었던 나의 모든 감각기관들이 서서히 안도감을 되찾으며 다시 평정심을 회복했다.
상공을 한 바퀴 돌고 있는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서 내려다본 연변의 시가지는 이제 막 가로등이 켜지면서 마치 정들었던 나의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고토이기도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은하가 살고 있는 땅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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