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도강 Sep 13. 2024

백두산의 포효

15회

다음날, 햇살마저 뽀송뽀송한 감촉이 느껴지는 화창한 아침이다.

백두산의 온갖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어서 일어나라고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우는 옆 침대칸에서 입은 옷 그대로 엎드려서 자고 있다.

몸에선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으로 봐서는 새벽이 되어서야 올라온 모양이다.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배 교수는 등산복차림으로 호텔 주변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고, 최 씨는 그 나름대로의 운동을 참으로 독특하게 다.

아마도 그 자신이 개발한 맨손 체조의 일종인 듯 연신 두 손을 올렸다 내렸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는 단순한 동작을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은하는 빨간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두 다리를 모았다 폈다 하늘을 향해서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귀여운 토끼가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던지 수줍은 얼굴이 되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은하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녀 바로 옆에 배 교수가 버티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이때 최 씨가 특유의 밉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먼저 인사말을 건넨다.      

“윤 선생, 온천물에 몸 좀 풀었어요? 물이 반질반질한 게 다른데 하고는 다르지 않아요?

창우는 아직 안 일어났나 봅니다.”      

넋을 놓고 은하를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 예 편히 주무셨습니까? 배 과장님은 늦게 들어온 것 같아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최 씨는 하던 운동을 이제는 그만 끝내려는지 옆의 나무벤치에 앉았다.

목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밥 먹을 때가 다됐는데, 깨워야 되지 않나?”      

주변을 혼자 거닐던 배 교수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거, 큰일이네. 드디어 백두산공정이 시작되었어!”      

배 교수는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난 갑자기 어제 일이 생각나서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트릴 뻔했다.

어제 그 산골마을에서 땅의 소리를 들어보라며 자신의 귀를 땅바닥에 갖다 대던 기이한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배 교수의 말이라면 항상 귀를 쫑긋거리던 최 씨가 이 말마저 듣고 말았다.      

“뭐가 큰일 났어? 공정이 어쨌다고?”   

“이 한심한 친구야. 동북공정의 마각이 백두산에서 그 이빨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제야 최 씨도 배 교수가 또 동북공정 이야기를 하나보다 생각했던지 이제는 아주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어이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그놈의 동북공정이 이번에는 또 이빨을 드러냈어? 거참 고얀 놈일세!”      

최 씨의 걸쭉한 입담에 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은하도 얼마나 웃었으면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배 교수도 어이가 없는지 멀건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이때 창우가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를 털면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두 눈은 아직도 붉게 충혈된 상태다.

필경 어젯밤 우리가 올라온 뒤에도 한참을 이 사장과 긴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양이다.

창우는 우리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고 식당에는 이 사장이 직접 산나물국으로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도 창우만큼은 아니지만 어젯밤 주독의 피로가 완연해 보였다.


 역시도 어제는 꽤 많은 술을 마셨지만 신기하게도 뜨거운 산나물국 몇 숟가락으로 주독이 모두 해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시원한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 사장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이 사장의 표정에서는 앞날에 대한 감당하기 힘든 걱정들이 서려있었다.

그러면서도 요 며칠은 안개 때문에 천지를 본 손님들이 없었지만 우리 보고는 화창하게 맑은 천지를 보게 될 라며 기분 좋은 덕담까지 해주었다.           


창우의 사륜구동 지프차는 백두산의 정상 천지를 향해서 출발했다.

잘 포장된 도로였지만 경사가 급하여 사륜구동이 아니면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앞으로 달려가는 차들도 모두 사륜구동의 SUV 차량들뿐이다.      

올라가는 동안 그저 산에 대한 경건한 마음만이 올라올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반쯤 열어놓은 차창을 통하여 불어오는 백두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내 심신을 이 거대한 산에 맡기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배 교수의 탄식은 계속되었다.      

“윤 선생, 백두산정계비도 만주사변 때 일본 놈들이 뽑아 없애버린 마당에 이제 토문강의 흔적마저 지워버린다면 그야말로 동위토문은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동쪽국경인 두만강을 고착화시키는 그야말로 동위두문이 되고 마는 것이에요,

대체 우리 땅 간도의 고토는 어떻게 회복한단 말입니까. 답답한 노릇입니다. 답답한 노릇이에요.”      

참으로 징그럽기까지 한 배 교수의 집착을 대하면서 난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볼 때는 기이한 행동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온통 그의 머릿속에서는 민족에 대한 걱정만으로 살아가는 진정성이 있었다.      


이때, 나의 영원한 스승이신 서 교수님이 생각났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진통 끝에 출범하던 날, 내손을 꼭 잡으시고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시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우리의 각오를 제2의 나당전쟁에 임하는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난 지금까지 그분만큼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키고자 했던 그분의 고매한 인품 앞에선 언제나 숙연해졌고 그분처럼 살겠노라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순간, 서 교수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여기 백두산 자락에서 고토회복에 대한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또 다른 민족주의자를 대하고 다.

이 분의 하염없는 탄식을 바라보면서 서 교수님에게서 느꼈던 진정 어린 마음이 느껴졌다.

지금 배 교수는 은하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진실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한 분의 스승으로서 내 가슴을 울리고 있다.    

 

힘 좋은 사륜구동 지프차일지라도 높이 올라갈수록 숨이 차는지 헉헉거리는 차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맹렬하다.

나무들의 크기도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나무들의 흔적조차도 사라졌고 그 끝이 하얗게 말라가는 야생초들만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면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

이제 목적지에 다 다른 듯 완만한 자리 한편에 십여 대의 다른 지프차들 사이로 우리 차도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라 한다.

천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동안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 앞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최 씨가 추위를 이길 요량으로 양팔을 낀 채로 올라가며 말했다.      

“배 교수, 오늘 우리가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이 사장은 안개 때문에 요 며칠 천지를 본 사람들이 없었다고 했는데 천지가 안 보이면 어쩌지?

작년에도 우린 못 봤잖아? 오늘만큼은 우리가 운이 좋아서 쾌창하게 맑은 천지를 보아야 할 텐데.”      

   

최 씨가 천지를 목전에 두고 조급증을 내고 있었지만 배 교수는 오히려 느긋하게 말했다.      

“모든 게 다 백두산의 뜻인 게지. 백두산을 영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보여주시면 감사하게 보는 것이고, 보여주지 않으시면 하는 수 없는 게지.”       

과연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설레는 가슴으로 모두의 걸음이 빨라졌고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      


백두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모두는 벅찬 감동으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시퍼런 물이 백두산의 최고봉에 한가득이나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맑디맑은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최 씨의 말대로 정말 운이 좋았을까? 아니면 배 교수의 말대로 백두산의 뜻이었을까?

우린 물안개 한 점 없는 너무나도 깨끗한 천지를 보게 되는 행운을 잡았다.      


밝은 햇살을 반사시키며 온 천지를 금빛 은빛으로 물들이는 천지의 장관을 어떤 말로써 표현해야 할까?

 벅찬 감동에 잠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은하도 자신 앞에 펼쳐진 이 장엄한 순간의 감동을 만끽하려는 듯 휘날리는 머리칼을 그대로 둔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영롱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 짓는다.      


천지! 하늘의 연못이란 뜻으로 천 년 전 대규모의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호수다.

당시의 폭발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웅덩이의 깊이는 천 미터에 달하고, 터져나간 봉우리의 잔해들은 오늘날 동해 건너 일본에서까지 발견될 정도다.

당시 거란에 의해서 영토의 많은 부분을 빼앗긴 발해 유민들이 여기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하있었다.

지만 역설적이게도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발해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배 교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천지를 오른손으로 가리키며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보시오! 여기가 바로 우리 민족의 혼이 일어섰던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란 말입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반만년을 내려 뻗은 출발지가 바로 여기입니다.

저 천지가 담고 있는 물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담고 있어요.”      

세찬 바람 때문에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으므로 그는 큰 소리로 고함치듯이 말했다.


얼마나 추웠던지 입가에는 침샘 덩어리가 보기에도 흉하게 뭉쳐 있었지만 그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윤 선생! 여기 천지를 가로질러서 저쪽 반대편 6할은 북한령이고, 이쪽으로 그 나머지 4할이 중국 령입니다.

이 경계는 1962년 조중변계조약을 통해서 확정되었어요.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이 회담은 오늘날까지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데, 배 교수의 설명은 이러했다.    

1712년 조청 간의 국경회담으로 양국이 결정한 국경은 분명히 ‘동위토문, 서위압록’이다.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것이어서 물줄기가 송화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여기 동간도 땅 일대가 분명한 우리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당시 북한 당국은 이 부분을 망각한 채, 천지를 가로지르는 국경에 합의함으로써 우리 민족에 큰 죄를 짓고 말았다.

다만, 동쪽의 국경을 중국 측의 주장대로 두만강으로 확정하는 대신 천지에서 두만강으로 흐르는 네 개의 지류 중 최상류의 지류를 경계로 삼았던 것은 그나마의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최 하류부터 석두수, 홍단수, 석을수, 홍토수 중 청일 간의 간도협약 때는 석을수를 경계로 삼았던 것을 최상류의 홍토수로 그 경계를 정함으로써 천지의 60퍼센트가량이 북한령이 되었다.    


어쨌든 중국은 간도협약으로 획정된 국경보다 뒤로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은 당시 중국 내 소수민족과 주변의 약소국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던 주은래의 덕을 본 것이라 한다.

이로 인해 주은래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로부터 국토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몰려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또다시 울분에 가까운 배 교수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북한이 해방 후에 잘만 했더라면 이 천지를 포함해서 동간도 땅의 일부인 연변만이라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단 말입니다.

왜 그 기회를 못 살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이야기는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귀가 번쩍 뜨였고, 배 교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해방 이전까지 간도 땅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있었단 말입니다.

당시 일본군을 쫓아내고 이 땅을 점령했던 군대는 소련군이었어요.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창인 때라 여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1948년 2월 소련 중공 북한이 평양에서 체결했던 문서가 있어요.

이 문서에 따르면 동북지방의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확정하고 이를 장차 북한에 귀속시킨다고 합의했단 말입니다.

북한은 애당 길림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4개현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

지만 최종적으로 합의를 보기로는 오늘날의 길림성 동부에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해당하는 3개현을 돌려받기로 3국이 합의를 봤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어버렸어요,

전쟁 후라도 돌려받았어야 했는데 합의까지 해놓고 왜 못 돌려받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당시 북한은 우리 민족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겁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면적이 한반도의 사분의 일이나 됩니다. 이 땅만이라도 그때 회복했어야 단 말입니다.”      


배 교수의 눈가에는 두꺼운 뿔테안경이 하얗게 서리가 맺히면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백두산이 양분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토인 간도 땅을 잃어버렸다.

천지를 가로질러 백두산이 양분된 우리 민족의 현실이 서글펐을 것이다.

잃어버린 간도 땅을 되찾아야 하는 민족적인 과업은 시급한데도 양분된 조국의 무기력한 현실이 서글펐을 것이다.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고토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집불통 민족사학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배 교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만세를 부르며 외치기 시작했다.

흡사 포효하는 백두산 호랑이의 모습과 같았다.      

백두산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다!. 간도땅의 주인우리 민족이다!.”      

어느새 최 씨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백두산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다!. 간도땅의 주인도 우리 민족이다!.”      

    

순간,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집중되었다.

제정신이 아닌 기이한 사람들의 행동쯤으로 치부하면서 일제히 수군거리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창우가 이러한 민망한 분위기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지 나와 은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창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와! 졌습니다, 졌어요! 오늘부로 우리 아버지한테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이건 뭐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윤 선생, 이제 내 마음을 좀 아시겠습니까?

은하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똑똑히 봤으니까 오빠 심정을 좀 이해해 줘라.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돼 갔나?

완전히 돌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 말이다.”      

   

흥분한 창우가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고 있었을 때, 은하는 말없이 반대방향으로 돌아서서 손가락으로 눈가 주위를 닦고 있다.

어깨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은하를 진정시켜 주고 싶었지만, 창우가 그런 여동생을 사정없이 윽박질렀다.      

“바보처럼 울기는 왜 울어!”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손수건으로 은하의 얼굴을 닦아준 뒤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자 우리는 사진이나 찍읍시다.

은하도 돌아 서서 윤 선생하고 다정하게 한번 서 봐.”        

창우는 미리 준비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우리더러 포즈를 취해 보라고 재촉한다.

덕분에 난 스스럼없이 오른손으로 은하의 허리를 살짝 잡은 자세로 포즈를 취했다.


창우는 언제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을까 싶게 다시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햐, 제법 자세가 나오는 게 어제오늘 맞춰본 자세가 아닙니다. 윤 선생! 

솔직히 고백해 봐요. 우리 은하하고 포옹 몇 번이나 해봤어요?”      

이 말에 은하가 내 뒤에 숨으며 부끄럽게 웃어 보였고, 나도 뒤통수가 가려운 표정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제 천지폭포 앞에서 포옹한 것을 들켜버린 어린아이처럼 우린 그렇게 순진한 표정이 되었다.

창우는 연신 싱글벙글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 다양한 포즈를 주문했고, 은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내가 유도하는 포즈의 자세를 잘 따라주었다.     

  

아버지도 사진을 찍어 드리자는 은하의 말에 창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지 십오 분쯤 뒤에 내려오라는 말을 남긴 채 곧장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바위에 가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천지가 한눈에도 잘 보이는 호젓한 곳에서 우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앉았다.

이때 사랑스러운 은하의 향기가 천지의 세찬 바람을 타고 내게로 밀려왔다.

이 향기에 취하여 내 몸은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다.

도대체 이 냄새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 여인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은하의 향기는 언제나 나를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천지를 바라보던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눈가에선 또다시 이슬이 맺혀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어제 천지폭포 앞에서 포옹할 때 보았던 바로 그 눈물이었다.

눈물의 의미는 이 행복한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는 은하의 간절한 마음이리라.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줄 때 그녀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더욱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는 것으로 난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고자 했다.      

비록 이 천지는 절반으로 갈리어서 우리 민족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지만 은하와 나의 사랑은 영원토록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창우와의 약속시간에 맞추어 천지를 내려갔다.

추운 날씨로 얼굴색이 짙분홍빛으로 변해버린 은하를 서둘러서 차에 태운 후 저 아래 펼쳐진 백두산의 장관을 감상하기 위하여 언덕배기의 끝자락에 올라섰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양팔을 활짝 펼쳐 백두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차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배 교수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잠시 소천지에 들렀다 가!”      

운전석 위의 백미러로 배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창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천지에서 그만큼 하셨으면 됐지 소천지까지 가서 또 무슨 해괴한 행동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그냥 바로 내려가서 식사나 하고 출발해요.”      

   

배 교수도 창우와는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시야를 차창 밖으로 돌린 채 무표정한 소리로 대꾸했다.  

“밥이야 한 끼 굶어도 되고 좀 늦게 먹으면 어떠냐?

내 소천지에서 물 한 컵 먹고 싶어서 그러니 들렀다 가!.”      

아버지의 막무가내 식 태도에 창우도 체념한 듯 백두산을 다 내려올 즈음, 결국 소천지 쪽으로 차를 돌렸다.

매표소 입구의 적당한 자리에 주차한 후 일행은 걸어서 소천지를 향했다.


숲길을 따라 이십 분 정도 걸어가자, 제법 못이 나타났다.

소천지라면 작은 천지를 말하는 것일 터,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는 물길로 아래에 만들어진 차갑고 맑은 천지의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배 교수는 이 천지의 물을 마심으로써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배 교수를 필두로 우린 천지에서 내려온 소천지의 물을 한 바가지씩 마셨다.

시원한 물맛도 물맛이지만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셨다는 생각에 그 뒷맛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소천지 옆 암석에 파인 작은 동굴에는 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최 씨가 소천지에서 담아 온 물 한 컵을 올려놓고 한참 동안이나 뭔가를 열심히 빌었다.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은하가 하는 말이다.      

“아저씨! 우리나라가 통일돼 달라고 빌었습니까?”      

무릎을 꿇고서 어찌나 정성 들여 빌고 있던지 일어서며 돌아서는 최 씨에게  은하가 농담을 건넸다.    

“통일은 무슨?, 내가 통일되게 해 달라고 빌면 통일이 되나?

우리 하나밖에 없는 딸년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고 빌었지.”      

최 씨의 이 말은 우리 모두를 잠시 숙연하게 만들었다.

항상 허허실실!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 한 구석에는 불우한 딸의 처지를 헤아리는 애틋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는 사이 배 교수와 최 씨는 차에서부터 들고 온 플라스틱 말통에 소천지의 물을 담았다.

최 씨는 무거운 물통을 들고 가면서도 길가에 돌무덤이 보이자 작은 돌 하나를 정성 들여 올려놓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 물통을 들고 가는 최 씨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내가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것도 고행이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그는 모든 만물에는 한울님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재돼 있어 언제 어디서나 항시 기도한다고 했다.     

백두산기운이 녹아든 소천지 물 한 그릇을 모시고 새벽마다 정성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힘들게 물을 받아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천지에서 서식하는 유일한 어종이라는 산천어를 횟감 삼아 소천지 인근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곧장 연길로 향했다.

창우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올 때처럼 중간에 간간이 들리는 일도 없이 논스톱으로 비포장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배 교수는 언제나처럼 하염없는 표정으로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최 씨는 그의 전용침대칸에서 올 때와 같이 아예 대놓고 코를 골고 있다.      

은하는 나의 무료함을 달래 줄 생각으로 어제 틀었던 그 컨츄리 송 테이프를 다시 틀었다.


백두산을 출발한 후 단 한 번의 정차도 없이 내리 세 시간을 내달렸다.

그제야 창우는 길가 상점 앞마당에서 차를 세운 후 담배를 사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나도 차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인근의 또 다른 가게 앞에서는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한 무리의 조선처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직영하는 가게라고 하는데 그 가격이 대단히 비싸다는 은하의 말에 들어가 볼 엄두는 못 내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때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물건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구경이나 한 번 해보라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절하기도 민망해서 은하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본 북한 아가씨들이 인삼, 우황청심환, 술, 공예품 따위를 보여주면서 물건을 사달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졸랐다.      

순간 나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바로 창우가 말하던 외화벌이 아가씨들이 아닌가. 북한에서도 당성이 철저한 인텔리들만이 파견된다는 미모의 아가씨들이다.

지만 이곳에서는 물건하나를 팔기 위해서 혈안이 된 그저 측은한 생각이 드는 아가씨들로만 보였다.


단순히 구경삼아 들어왔지만 도저히 빈손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대체로 가격이 비쌌지만 그래도 그중 우황청심환이 만만할 것 같아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계산대에 서있던 아가씨는 가격을 말해주기 전에 북한산 우황청심환의 효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섯 알이 든 포장세트 하나를 뜯더니 거기서 한 알을 꺼내 반으로 쪼개어 은하와 내게 먹어보라고 한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그 후 가격을 말해 주었는데 여섯 알 한 세트에 우리 돈으로 무려 이십만 원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은하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잡아끌며 그냥 나가자고 보챘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이미 포장을 뜯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게 되었다며 떼를 쓰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난 한 세트를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새것으로 가지고 오면서 깍듯이 고맙다고 인사했다.      


돌아서며 생각하니 기왕에 사는 것이라면 한 세트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았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도 생각이 났고 서 교수님의 얼굴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트를 더 달라고 했더니 아가씨가 아주 반색을 하면서 여러 번 고맙다고 거듭 인사했다.

그녀는 조금 전에 포장을 뜯어 다섯 알만 남은 청심환도 가지런히 포장한 후에 덤으로 얹어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능하면 중국 돈보다는 한국 돈으로 계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말에 중국 돈은 위폐가 많다는 창우의 이야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하여 잠시 구경만 한다는 것이 사십만 원이나 지출하는 대형쇼핑을 하고 말았다.

상점을 나오려는데 수공예품으로 만든 머리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은하의 머리에 꽂으면 예쁠 것 같아 그것을 하나 더 사서 은하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다.

작은 머리핀 하나였지만 은하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차에 오른 후, 다섯 알이 든 우황청심환 세트를 배 교수와 함께 드시라며 최 씨에게 선물로 전했다.

예상치 못한 귀한 선물을 받아 든 최 씨가 호들갑을 떨면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는 와중에도 배 교수는 북한 직영가게에서 비싼 값으로 물건을 산 내 행동에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차는 다시 출발했다. 

한 동안 침묵하던 배 교수가 천지에서 하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던지 다시 포문을 열었다.

창우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꺼내려하자 잔뜩 인상부터 찌푸리더니 차를 더욱 험하게 몰기 시작했다.     

   

“윤 선생 보시오!,

이천 년간 팔레스타인들이 지배해 온 땅에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할 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뭐였는지 아시오?

이천 년 전에는 자신들의 땅이었다는 것이지. 구약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냈지 않았겠소.      

그리고 일본만 하더라도 끈질기게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면서도 고작 러일전쟁 직전 불법적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것을 근거로 삼고 있을 뿐이오.

명백히 독도는 한국 땅이고, 또한 우리가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간도 땅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 주장너무나도 확실한 역사적인 연고권과 국제법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단 말이오.

문제는 힘이에요! 우리 민족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을 앞당겨야 합니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동포 간에 서로 신뢰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돈 몇 푼 있다고 가난한 우리 중국 동포를 2등 동포 취급하는 그런 못난 천민자본주의 근성을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배고파서 탈북해 온 우리 동포를 오히려 동남아 노동자보다도 천시하는 그런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지 않고서 어떻게 한국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겠어요!”       


마치 연설하듯이 오른손을 들어 열정적으로 말하는 그의 말투 하나하나에는 그만이 가지는 어떤 독특한 힘이 서려있었다.

이제는 아예 자신의 안경까지 벗더니 그것을 오른손으로 흔들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 손동작이 어찌나 절도가 있고 목소리에 힘이 넘치던지 나도 모르게 그의 연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흥분의 도가 세어지더니 자기도취에 휩싸이는 듯 말의 악센트가 강해졌다.

그의 흥분상태로 봐서는 또다시 무슨 사고를 낼 것만 같아 우린 조마조마 마음으로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멀리 바라보면 앞날이 열리는 법이거늘, 우리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 민족이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하거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소련이 저렇게 산산이 분해되어 2등 국가로 전락할 줄 누가 알았겠소?

유고슬라비아는 또 어떻게 분해되었소? 모두가 민족 별로 갈기갈기 갈라섰지 않았어요?

지금의 중국은 강력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년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우리는 연변에 조선족 자치국가의 설립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리하여 남과 북 그리고 여기 동간도를 합친 대한반도의 통일을 추진하게 될 겁니다!

간도 찾기 운동은 중국의 동북공정 음모에 대항하는 우리 민족의 소리 없는 전쟁이란 말이오!”      


배 교수의 말이 여기에 까지 이르자, 갑자기 '끼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 급정차했다. 

창우가 뒤를 돌아보더니 맹수가 포효할 때 발산하던 그 눈빛으로 배 교수를 노려보면서 소리 질렀다.       

“아버지 미쳤어요?”      

벽력 같은 소리로 고함을 친 창우는 차에서 내리면서 차문을 발로 차버리며 닫았다.

그리고 저쪽 편으로 한참을 걸어가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침대칸에 누워있던 최 씨는 앞 좌석에 머리를 부딪치며 바닥에 떨어졌고 연신 '아이고, 아야~ ' 소리를 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은하도 많이 놀랐던지 얼굴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은하는 최 씨가 걱정되었던지 괜찮으시냐며 최 씨를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듯했다. 

배 교수는 ‘나쁜 놈의 새끼’라는 험한 말을 되뇌면서 최 씨와 함께 차에서 내려 창우와는 반대편으로 걸어가서 담배를 꺼냈다.      

은하가 창우에게 다가가기에 나도 무심결에 그의 옆으로 다가갔고 은하가 어렵게 입을 뗐다.      

“오빠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도 계시는데, 꼭 그래야만 했어요?

왜들 그러시는지, 정말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오빠, 진정하고 계세요. 아버지한테 가볼 테니…”      

   

은하는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아버지에게로 뛰어갔다.

창우는 먼 산만 바라본 채 내게 말했다.      

“윤 선생, 미안합니다. 내가 성미가 좀 급해서 실례를 범했어요”      

“…”      

“거 참, 우리 아버지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니 큰 걱정입니다.

여긴 한국이 아니라 엄연히 중국인데도 말입니다.

도대체 말을 가려서 하는 법이 없으니 보통일이 아닙니다.

방금 아버지가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아십니까?,

중국이라는 대용(大龍)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말이란 말입니다.”      

창우는 이 상황을 용이라는 영물을 등장시켜서 설명했다.

자고이래로 용은 왕이라는 절대 권력에 비유되는 상상의 동물로 비쳐왔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다는 것은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의미했다.


창우의 눈은 피곤과 절망이 뒤범벅이 된 채 벌겋게 충혈었다.      

“내가 명색이 중국공산당의 당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고민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중국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제국주의가 자리 잡고 있어요.

일면 관대한 척 보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대단히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인구의 92퍼센트를 차지하한족들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국토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55개의 소수민족이지요.

중국의 역사 속에서 한족(漢族)이 전국토를 통일하여 광범위하게 전 중국을 통치한 역사는 사실 알고 보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소수민족과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융화 단결은 오늘날 중국의 생존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서장자치구의 서남공정이나 신장자치구의 서북공정 그리고 조선족 자치주의 동북공정은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 중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된 티베트와 위구르, 조선족을 특별 관리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장기프로젝트란 말입니다.

1959년 3월, 티베트의 수도 라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지 않았겠어요.  만약에 대만이 독립을 선언한다면 미국과의 전쟁이 두려워서 중국이 주저한다고 보십니까?

천만에요! 핵전쟁이라도 불사할 겁니다.

한 개의 소수민족을 봐주게 되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55개의 소수민족이 모두 분열돼 나갈게 분명한데, 중국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지금 용의 역린을 건드린 겁니다.

아버지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조선족이 다 죽을 수 있어요!

나이를 드시면서 왜 저리도 철이 없어지는지 정말이지 괴롭습니다.”      

   

담배가 다 떨어졌는지 창우는 그의 오른손으로 담뱃갑을 찌그러뜨렸다.

내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한 대 더 건네주자 담배를 잡은 그의 오른손이 떨렸불을 붙여주는 내 손도 덩달아 떨려왔다.

담배 한 모금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더니 이내 길게 내어뿜는다.      

“미안합니다. 선생 앞에서 내가 너무 소란을 떨었어요.

그러나 난 선생이 남 같지가 않아요. 우리 은하를 잘 보살펴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한 식구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선생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해할 수 있죠?

내가 우리 아버지를 단속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당신을 미워해서 하는 이야기로만 알아들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교수님께서도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부자지간이지 않습니까? 두 분이 자주 말씀하시면서 하나하나 풀어나가도록 하시죠.”      

   

창우는 내가 마음에 든다며 어깨를 두드린 후 이제 그만 출발하자며 다시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배 교수도 최 씨도 창우와는 시선을 교차하지 않으려는지 차창 밖만 멍하니 쳐다보며 어두운 표정들을 하고 있다.      

이때 은하가 아버지를 돌아보며 눈짓으로 뭔가를 채근했고, 배 교수는 그제야 마지못한 얼굴을 하면서 시선을 중앙으로 모았다.

그리고 맥이 풀려버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아까는 내 말 중에 실언이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배 교수가 느릿하게 하는 동안 그 모습이 어찌나 안 됐던지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찡한 그 무엇이 전해왔다.


은하가 창우를 바라보며 채근하듯이 말했다.      

“오빠! 인제 마음을 좀 풀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사과하시고 있지 않습니까?”      

애타는 심정으로 은하가 사정하듯이 말하자 창우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운전석의 백미러로 배 교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런 말씀 자꾸 하고 다니시면 아버지뿐만 아니라 연변의 우리 조선족들도 무사하지 못할 수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더 이상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차후로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앞으로 아버지는 제 장례식 때나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시겠죠?”      


배 교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 안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살벌하면서도 적막한 분위기로 가득했고, 감히 어느 누구도 미동하지 못한 채 장석처럼 굳어 있었다.

차가 출발하면서 은하가 조수석의 차창을 반쯤 열고나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차 안에 산소가 공급되기 시작하자 긴장이 풀리면서 동맥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개가 힘없이 쳐지면서 나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찻소리, 바람소리, 팽팽하게 감도는 차 안의 긴장감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선잠이었지만, 그래도 잠이라는 마법은 시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국도에 진입했는지 차는 부드럽게 달리는 느낌이 들었고, 또 얼마 후 연길시내에 들어왔는지 주변의 사람소리들이 차창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지만 비몽사몽 간에도 눈은 떠지지 않았다.

은하가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 눈을 떠보니 배 교수의 사무실 앞이었다.

들어가셔서 편히 쉬시라는 내 인사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배 교수는 휑하니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최 씨는 소천지에서 떠온 물통을 힘겹게 들고 가면서도 잘 가라며 내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창우는 우릴 태운 채 백산호텔로 향했다.

차가 이동하는 십여 분의 시간 동안에도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백산호텔 앞에서 차는 정차했고 우린 모두 차에서 내렸다.

창우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오늘 일은 미안하게 됐으니 마음 쓰지 말라고 했는데, 그의 표정에선 무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창우가 먼저 차에 오른 뒤에도 은하는 또다시 금방이라도 눈물샘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후에야 차에 올랐다.

사라져 가는 그들을 힘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은하가 나에게 미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손을 흔드는 은하의 모습이 저만치 사라져 간다.

이전 14화 백두산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