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실장과 윤 비서관이 대북특사로서의 소임을 마치고 청와대로 귀환했을 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통령은 급한 마음에 최 실장이 건네주는 황색의 서류봉투를 직접 개봉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집무책상에 앉아서 소가죽 봉투의 접힌 부분에 달린 은색의 단추 두 개를 당기자 ‘딱’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봉투가 열렸다.
맞은편에 서있던 최 실장과 윤 비서관도 입술이 바짝 마르는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모습을 주시했다.
대통령이 왼손으로는 소가죽 서류봉투의 밑 부분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서류봉투에 꽉 끼는 크기의 파일을 힘을 주어서 빼내고 있었다.
최 실장이 도와줄 요량으로 대통령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대통령의 오른손으로 삐죽삐죽 빠져나온 파일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황금색의 파일이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이 천천히 파일을 펼쳐보았다.
맞은편에 서있던 두 사람은 대통령의 얼굴만 쳐다보면서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대통령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고 있었다.
옅은 미소였다.
다시 파일을 접은 후 책상의 가장 아래쪽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대북특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사실을 당분간 보안에 부쳐야겠습니다,
물론 이 파일의 존재에 대해서도요”
대북특사가 서울로 돌아간 바로 그날 초저녁 무렵이었다.
온 사방에 자신의 목을 옥죄일 올가미가 처져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른 채 박철은 백두산이 있는 삼지연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제가 선제공격을 개시하면 삼십만 인민해방군이 일시에 압록강을 건너오게 되어 있어!
대원수놈이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채 한 달도 버텨내기가 어려울 것이야,
까짓것 고구려가 조선 거면 어떻고 중국 거면 어떻단 말인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는 않을 테니 이번 기회에 나도 대원수가 한번 돼봐야 갔어! 크흐흐흐’
박철을 태운 지프차가 삼지연의 호젓한 숲 속 길로 접어들었다.
박철이 비밀스럽게 보위부의 안가로 사용 중인 소백수 초대소에는 북한군부의 고위급 인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보위부 요원들의 철통 같은 경호 속에 다섯 명의 군단장들이 시간차를 두고 들어오자 먼저 와있던 박철이 격한 포옹을 하면서 뜨거운 동지애를 과시했다.
드디어 박철을 중심으로 회합에 참여하기로 했던 인사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박철이 한 명 한 명을 주시하면서 오늘 결의하게 될 중요 용건을 단도직입식으로 꺼냈다.
“미제가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갔어!
중국 측의 닦달이 보통 심한 게 아니야!”
몇 조각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애써 옆으로 빗어 넘긴 모양새가 위태롭게만 보이던 자가 습관인 양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직도 간만 보려는 자들이 많아서 좀 더 설득을 해야 돼!
이대로 부딪치면 우리 세력이 약해서 안 돼!”
박철이 초조한 기색으로 다시 말했다.
“오늘 내가 대북특사로 온 뚱땡이 놈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어 그래!
북남 간의 휴전선을 이참에 허물어 버리자 뭐 그런 비슷한 애기를 했었단 말이야!
아직은 대원수가 남조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미제의 선제공격이 확실해지면 그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어,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방을 날려야 되지 않갔어?”
이들 가운데서 얼굴 생김새가 가장 거칠게 생긴 자가 두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치면서 고함치듯이 말했다.
“뭐야! 그 말은, 남조선이 우리 공화국을 흡수통일이라도 하겠다는 말 아니네,
이런 썅! 그걸 그냥 내버려 두었단 말이야!
그런 개떡 같은 소리에 우리 대원수는 뭐라고 반응했는데?”
박철이 주변을 살피면서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대원수의 답신서를 몰래 뜯어봤지 않았갔어!
그런데 딱 부러지게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고는 안 했지만 앞으로 잘해보자고 했으니 그 말이 그 말 아니 갔어?
남조선에서 전쟁배상금으로 받았던 백억 달러의 절반을 뚝 잘라서 챙겨주었는데 못해줄 것이 뭐가 있갔어? 그렇지 않네?”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군단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담배연기를 천장으로 쏘아 올렸다.
“그 정도면 사실상 동의한 거네,
미제의 공격이 목전에 다가오자 대∼ 원수 놈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던 거겠지!
그나저나 전쟁배상금으로 받은 오십억 달러는 대체 어디다 숨겨둔 거네?”
“39호실로 흘러 들어갔다면 혼자서 다 처먹겠다는 속셈이지 안 갔어!”
“우린 십 원 땡전도 구경 못해봤잖아?”
“그러니까 대∼ 원수 놈이지! 달리 대원수 갔어?”
이들이 폭소를 터트리며 정 위원장을 맘껏 조롱하고 있었을 때 박철이 이들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바짝 불러 모은 뒤 속삭이듯 말했다.
“때를 놓치면 우리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어!
그전에 우리가 먼저 선방을 날려야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단 말이야!
중국군부가 확실하게 우리의 뒷배가 되어 주갔다는데 주저할 것 없잖네?
이번 참에 군부를 전면에 내세우는 선군체제로 전환시켜 버리자고!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면 나머진 그냥 따라오게 돼있어!
두고 들 보라구! 대부분은 그냥 쎈놈 쪽에 달라붙게 돼 있으니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갔다는데 어느 누가 반대하갔어? 안 그래?”
그러자 박철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군단장이 자신은 박철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럼 대∼ 원수 놈은 어떻게 조치하는 것이 좋갔어?”
박철이 얼굴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무슨 큰 결심이나 한 듯이 말했다.
“후한을 남기면 안 돼야! 심장마비를 가장해서 보내버려야지!
그 집안의 내력이 심장 쪽에는 문제가 좀 많지 안 갔어?”
이때였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한 박철의 부관이 황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자신의 머리를 겨누는 권총을 감지하고는 머리 위로 양손을 올렸다.
어느새 안가를 둘러싼 십여 대의 지프차에서 권총을 빼어든 양복 입은 장정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안가 주위를 겹겹이 둘러싼 수십 명의 정찰총국 요원들이 십여 명의 보위부 요원들을 제압하는데 걸린 시각은 고작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밖의 어수선한 상황에 몇 차 레나 부관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박철이 화난 표정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부관! 부관 이 새끼 어디 갔어! 뭐가 이리도 시끄러운 거야!”
밖으로 몇 발작을 더 걸어 나온 박철이 자신을 겨누던 총구에서 새어 나오던 으스스한 찬 공기를 감지했다.
박철이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서 다시 안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박철을 겨냥하던 총구에서 총소리가 났다.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박철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일단의 정찰총국 요원들이 소백수 초대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초대소 안에 있던 군단장들이 권총을 빼어 들고 저항하려고 했지만 자신들을 향해서 무수히 많은 총구가 겨냥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차츰 전의를 상실했다.
밖에서 현장을 지휘하던 정찰총국 제 1과장이 귓속에 이어폰을 찬 모습으로 들어왔다.
오른손에 든 권총을 안가에 모여 있던 군단장들에게 일일이 겨누면서 소리쳤다,
“역도들을 체포하라시는 대원수님의 명령이 계셨습니다, 순순히 응하시라요!”
정 위원장의 명령이라는 말에 이들은 모두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권총을 내려놓았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거실 등에 반사된 머리 피부가 유난히도 반질거리던 대머리 군단장만큼은 이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서 권총을 겨눈 뒤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내부의 상황이 웬만큼 종결되자 뚜벅뚜벅 구두소리를 내면서 림광철 정찰총국장이 초대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잖아도 거만한 표정의 림광철이 걸음걸이마저 거만 기를 더하면서 패배자들을 노려봤다.
“군단장씩이나 되는 작자들이 땟놈한테 나라 팔아먹을 생각들이나 하고 고것도 모자라서 감히 대원수님을 상대로 말장난질을 해!
그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지는 안 갔지?”
섬뜩한 이 말은 박철 일당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1과장이 박철이 앉았던 소파 아래를 더듬거리면서 도청장치를 떼어냈다.
박철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군부의 사주를 받은 박철 일당이 일망타진됨으로써 정 위원장 중심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던 쿠데타 음모는 좌절되었다.
북한은 일체의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국가정보원의 보고를 통해서 최근 북한에서 역대급 규모의 군 숙청작업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황색파일 속에 담긴 정 위원장의 답신서에는 대통령의 제안을 심사숙고 하겠다면서도 내부 반발을 정리하기 위해서 당분간 공표하지 말 것을 제안했었다.
이로써 민 대통령이 정 위원장의 친서에 대하여 함구하고자 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나 이전의 전례들에 비추어보면 일망타진된 박철 일당이 받은 처분은 꽤 관대한 편이었다.
정 위원장의 권력 초창기에는 이 정도의 죄목에 대해서는 십중팔구 공개처형이 틀림없었겠지만 사십 대 중반의 정 위원장은 확실히 여유가 넘쳤다.
가급적이면 처형대신 무기교화형으로 처벌하고자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이 더 가혹한 처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을분위기가 완연해진 시월로 들어서자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들이 더욱 엄혹해졌다.
괌에서 출격한 전략폭격기들이 종전보다도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목격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한반도상공을 날아다녔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아침 뉴스의 도입부는 미군의 평양 선제공격이 임박했다는 관련기사로 시작되었지만 의외로 서울과 평양은 마치 남의 일인 양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폭풍전야의 고요일 뿐,
지금 당장이라도 죽음의 백조가 한반도의 평화를 깨뜨리는 광란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엄중한 상황이었다.
청와대 신청사의 3층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의 집무책상을 사이에 두고 윤 비서관과 최 실장이 대통령과 마주 보고 서 있었고 모두는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다.
2년 전 대통령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제왕적 권력의 상징처럼 불통의 공간이었던 청와대본관 건물을 과감하게 헐어냈다.
그 자리에 광화문정부청사 규모의 청와대 신청사를 건립했다.
16층 규모의 빌딩을 건축하면서도 외관은 기존의 청와대 본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청와대의 상징성만큼은 변함없이 존속됐다.
3층에 위치한 대통령집무실을 중심으로 청와대의 모든 참모 기능들이 빼곡하게 배치됨으로써 백악관을 능가하는 효율적인 소통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윤 비서관이 말하는 동안 대통령도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윤 비서관의 얼굴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우리의 예상대로 정 위원장도 내심으로는 중국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박철 일당의 숙청으로 북한체제를 친 중국화 하려는 작업은 이제 불가능해졌습니다”
머리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최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저의 부주의가 보위부장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죄인이라도 되는 냥 의기소침해하는 최 실장을 향해서 대통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 당시 최 실장이 적당히 흘려준 정보 때문에 중국군부와 결탁된 반통일세력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실장님의 현명한 처신으로 이제 우리 남북한은 통일을 향한 첫발을 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박철 일당에게 이번일은 작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저들의 거사를 미루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들은 자생적인 동북공정의 조력자들입니다,
실제로 고구려 멸망기에도 적지 않은 수의 당나라 조력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토착왜구 세력들이 적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히려 대통령과 윤 비서관으로부터 칭찬에 가까운 말들이 이어지자 민망하다는 듯 머쓱한 표정으로 최 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참! 이 사람의 신중치 못한 행동이 오히려 이렇게 칭찬받는 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대통령님! 남북간의 최근 사정들이 알려지게 된다면 우리 쪽의 사정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최 실장의 방금 이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다.
대통령이 들릴 듯 말 듯한 가벼운 한숨소리를 내면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면서 대통령이 말했다.
“야당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것이겠죠?”
대통령을 따라서 함께 창가 쪽으로 이동한 최 실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극심한 국론분열 사태까지도 각오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윤 비서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다.
“저희 팀에서 각계각층의 여론동향을 체크해 본 바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한반도실행계획의 제1단계는 남북한의 전면적인 여행자유화조치일 뿐 그 이상은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동안 꽉 막혔던 통행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으로서 이것은 정치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천만 이산가족의 소망을 들어주는 인륜의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북미 간의 스몰딜이 체결된 2년 전부터 개성공단과 금강산, 개성관광이 활발하게 재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다만 이번 참에 통행, 통신, 통관의 삼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개성공단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공단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내경제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통로가 될 수 있어 이번 조치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남과 북이 시행하고자 하는 것은 급격한 통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중국과 대만이 시행하고 있었던 자유왕래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으로 통일의 첫걸음은 시작되겠지만 어쨌든 그 시작은 심리적으로 편안한 방식이기 때문에 남북 모두에서 거부반응이 적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통행의 자유만으로도 흡수통일의 우려를 감내해야 하는 북한이 오히려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윤 비서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최 실장의 얼굴이 차츰 밝아졌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마는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입니다,
미국의 반대가 자명한 가운데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마저 작정을 하고 남북한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고 나선다면 우리의 입지가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윤 비서관이 최 실장의 우려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동북공정을 포기하지 않는 한 중국은 결단코 남북한의 통일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미국과 일본 중국이라는 3국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누가 봐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우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관자 정도로는 돌려세워야 합니다만…”
이때 대통령이 피곤한 듯 안경을 벗어 눈자위를 매만졌다.
어느새 벽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고 창문밖 저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대통령이 말했다.
“그들이 동북공정을 멈추지 않겠다면 한반도에 대한 방관자로 돌려세우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요,
그래요! 그놈의 동북공정을 멈추게 하는 것이 이 싸움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군요,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별 셋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일제강점기, 간도 땅에 살던 우리 동포들은 남쪽고향과 북쪽고향 그리고 간도 땅을 더해서 별 셋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한 덩어리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별 하나! 별 둘! 별 셋! 그래요 까짓것 직접 가서 한번 부딪쳐봅시다!”
황색파일 속에 담긴 숙제를 풀기 위한 이들 세 사람 간의 전략회의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시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는 죽음의 백조뿐만 아니라 미 본토에서 직접 출격한 B‒2 스피릿 스텔스 폭격기까지 가세하여 십여 분 간이나 노골적으로 북한영공을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시무시한 전략폭격기들이 핵무기를 잔뜩 실고 와서 보란 듯이 북한영공을 침범했으니 전쟁을 개시하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해로는 니미츠호가, 서해로는 레이건호와 루스벨트호가 동시에 다가왔다.
한 척도 아닌 세 척의 항공모함이 한꺼번에 다가와서는 이 지구상에서 평양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며 무력시위를 전개했다.
이쯤 되자 무쇠로 만든 강심장이라고 큰소리쳤던 정 위원장조차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세계는 이 같은 상황을 북미전쟁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으로 평가했고, 한반도를 향해서 째깍째깍 다가오는 전쟁의 화신을 이제는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아침부터 늦가을비가 침통스럽게도 내리는 가운데 대통령은 경제수석으로부터 통상적인 업무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때 다급한 표정으로 비서실장과 안보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구슬 같은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가면서 거구의 최 실장이 평소보다도 큰 소리로 보고했다.
“대통령님 큰일 났습니다!
미 국방부 전략부문 엘리자베스 코드레이 부차관보가 어젯밤 은밀히 방한했습니다,
지금 평택기지에서 주한미군의 비전투원 철수작전인 NEO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대통령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뭐요! 기어이 NEO작전이 시작됐단 말이지요?”
대책 없이 흘러내리는 얼굴의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최 실장이 말했다.
“지금 이 시각 대피 1순위 자들인 미군가족과 군무원들 대사관직원들이 평택기지와 전국 18개 집결지로 속속 집결하여 미 수송기에 탑승하고 있습니다!”
이때 대통령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그들 모두가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1순위 대피자들은 미 공군의 수송기로 이송되기 때문에 모이는 대로 곧바로 떠날 수가 있습니다만 문제는 2,3순위 대피자들입니다,
미국시민권자와 그 직계가족들을 모두 합하면 이십만 명에 육박합니다,
그들은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열차 편으로 부산까지 이동하게 되고, 부산항에서 수송선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들이 모두 수송선에 승선하게 되면 NEO작전이 종료되는데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일주일정도로 예상됩니다”
두툼한 금테 안경 속에 가려져 있던 대통령의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급격하게 스트레스가 몰려왔다는 반증이지만 이번에는 안경을 벗지 않고 마냥 버티고 있었다.
그 정도의 여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음 일주일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고작 일주일이라는 애기죠?”
초조한 표정으로 서있던 비서실장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우리가 수송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요?”
비서실장이 불쑥 던진 이 말에 최 실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통령과 비서실장을 번갈아 바라본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미군 자체의 운송수단도 있기 때문에 지연효과가 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삼일 정도는 지연시킬 수 있겠지만 이로 인하여 한미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있어 신중하게 판단할 사항입니다”
대통령이 양 손바닥으로 집무책상을 내리친 후 단호하게 말했다.
“안보실장은 지금 즉시 미 안보보좌관에게 전화해서 진의를 파악해 보세요!
NEO작전이 사실이라면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인 철수작전은 물론이고 대북군사작전에도 일체 협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세요!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의 선제공격을 강력하게 규탄할 것이며, 어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반드시 막아내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세요!
저들이 알아먹을 수 있도록 큰 톤으로 항의하면서 말입니다!”
“네!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대통령은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돌아서 나가는 안보실장을 다시 불러 세워서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최 실장! 여차하면 우리가 북한과 한편을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해 주어야 합니다!
내 말 알겠죠? 우리에겐 내일의 한미관계보다 오늘의 한반도평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새 최 실장의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손수건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섰다.
최 실장도 체념한 듯 흘러내리는 땀을 더 이상은 막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의 선제공격을 막아내겠다는 대통령님의 의지를 꼭 전달하겠습니다!”
그제야 대통령도 태산같이 무거워 보이던 금테 안경을 벗어 벌겋게 충혈된 눈자위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안보실장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러 간 사이 대통령은 창 너머 펼쳐진 잔디정원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워싱턴의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나요?”
비서실장이 집무실의 벽에 걸려있던 벽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보다 열세 시간이 늦으니까 아침 아홉 시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초조한 기색으로 벽시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안 되겠어요! 내가 직접 뉴프레지 대통령과 통화해야겠어요,
이 실장! 백악관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통화할 수 있도록 협의를 해보세요!”
비서실장이 이번에도 벽시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늘밤 열 시경이면 워싱턴은 아침 아홉 시가 될 테니까 그 시각에 통화가 될 수 있도록 백악관과 협의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이제는 우리도 강경하게 나가야 합니다!
선제공격이 시작되면 한미동맹에 의해서 우리가 저들 편에 설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우린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북한을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시켜서 백악관이 그 위험까지를 계산하도록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대통령님! 뉴프레지 대통령은 셈법이 분명한 정치인이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이익보다도 손실이 크다면 주저할 수 있습니다”
“암요! 백 퍼센트 손해 보는 장사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어야지요!
뉴프레지가 현명한 장사꾼이라면 발을 뺄 수밖에 없도록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구정물을 뿌려야 합니다!
그것도 마구마구 뿌려대야 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지금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 사이 미 안보보좌관과 통화를 마친 최 실장이 거의 초주검 상태로 돌아왔다.
오십 분 넘게 진행된 통화에서 우리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확인한 튼볼 보좌관은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목청을 높였다고 한다.
백악관이 처음으로 한국리스크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제 나머지는 대통령의 몫이었다.
오늘 밤중으로 뉴프레지와 통화하고 싶었던 대통령은 허탈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비서실장을 보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뭐가 잘못되었나요? 표정이 왜 그래요?”
그렇잖아도 흑색에 가깝던 비서실장의 얼굴이 더욱 어두운 색으로 변색되었다.
손수건으로 눈가 주위를 닦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뉴프레지 대통령의 일정이 바빠서 통화조차도 힘들다고 하더니 큰 소리로 항의하여 겨우 내일 아침 시간대로 잡혔습니다,
저들이 이제는 우리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니 큰일입니다 대통령님!”
대통령이 최 실장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최 실장도 양복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 부위를 닦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백악관의…”
갑자기 최 실장의 목소리에서 쉰 소리가 났다.
튼볼과의 통화 중 높였던 목청 탓에 일시적으로 부담이 왔던 모양인데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백악관의 행보로 볼 때 내부적으로는 모종의 결정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내일 아침이라고 했지요? 뉴프레지와 통화해 보면 저들의 속셈을 알 수 있겠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내야 합니다! 우리 땅에서 전쟁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자정이 되어서야 최근 청와대 신청사 내로 이전해 온 관저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할 뿐 새벽녘이 될 때까지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대통령은 관저의 거실에 앉아서 새벽부터 연신 커피만 마셔댔다.
뉴프레지 대통령과의 예상 통화내용을 점검하면서 그를 설득할 수 있는 문맥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인명피해…
그중에서도 막대한 미군의 인명피해…
철수…’
이를 보다 못한 영부인이 손수 샌드위치를 만들어와 가만히 대통령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곧 큰 전쟁이 날 것 같다고 국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만은 막으셔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역할은 우리 국민들을 보호하는 거니까 전쟁만은 막아내셔야 합니다!”
아무 말 없이 영부인의 나지막한 호소를 듣기만 하던 대통령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잘 알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 국민들이 나에게 부여한 막중한 임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꼭 그렇게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드디어 워싱턴 시간으로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졌다.
대통령 집무실의 벽시계가 아침 여덟 시를 갓 넘겼을 때 양국 정상 간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민 대통령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뉴프레지 대통령님! 정말로 선제공격을 단행하실 겁니까?”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화끈하게 물어보니 상대도 화끈하게 화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방법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아요,
대화만 해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됐어요,
2년 전의 스몰딜 합의 때도 사실 난 북한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대통령의 눈물겨운 중재 노력도 있고 해서 눈 한번 질검감고 믿어본 것인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모조리 폐기했다던 장거리 운반수단들이 멀쩡하게 나타났어요!
이제는 북한지도자가 하는 말은 그 어떤 말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단 말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따분한 짓 그만하려고 합니다,
더 이상 중재 같은 것은 통하지 않으니까 한국대통령도 날 설득할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뉴프레지 대통령님! 지금 뭔가 잘못 판단하시는 겁니다,
문제를 일으킨 쪽은 오히려 일본이었습니다!"
“됐습니다! 다 지난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기로 하고, 지구상 최고의 불량국가가 가지고 노는 위험한 물건을 우리가 제거해서 한반도를 안전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는 거예요,
동결이니 어쩌니 하면서 사실상 북핵을 묵인해 준 스몰딜 따위는 이제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리고 CVID 방식으로 말끔하게 해결해 보일 테니까 한국대통령이 많이 협조해 주세요!”
뉴프레지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한국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조롱했지만 민 대통령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약소국의 대통령이었던 까닭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초강대국을 설득해야만 했다.
“대통령님! 내가 아는 한 코피작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공격받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즉각 반격할 것인데 그 대상은 평택 미군기지와 주일미군기지가 유력한 타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방전이 벌어지다 보면 한국민들뿐만 아니라 미군 측의 엄청난 인명피해도 불가피합니다,
즉각 중지하셔야 합니다!”
“하하하, 누가 코피작전을 한다고 합니까?
어디 동네 아이들 뒷골목 싸움질도 아니고 우리는 그런 시시한 작전은 안 합니다,
처음부터 초토화 작전으로 바로 갑니다!
딱 두 시간이면 평양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거예요,
한국대통령께서는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한 두어 시간 하와이나 괌으로 여행 오셔서 한숨 푹 주무시다 가세요?
그러면 모든 작전은 종료됐을 겁니다”
거의 막말에 가까운 미국 대통령의 거친 언사에 민 대통령도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분명히 경고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이 전쟁을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약소국 대통령으로부터 버젓이 경고한다는 말까지 듣게 된 뉴프레지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버렸다.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감히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경고를 하시다니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뭔가 크게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시상황에서는 한국군의 지휘통제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혹시 잊고 계셨다면 차후로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입장은 이제 번복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한국대통령께서도 굳건한 양국동맹의 틀 속에서 적극 협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민 대통령도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기서 물러서게 된다면 한반도가 감당해야 될 참혹한 핵전쟁의 참상은 불을 보듯 뻔했다.
“오히려 뉴프레지 대통령께서 크게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한미동맹이라면 그런 동맹은 추오도 유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입니다,
기어이 선제공격을 단행하시겠다면 우리 정부로서는 부득이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겠습니다!”
이쯤 되자 전화기를 움켜쥔 뉴프레지의 오른손이 심하게 요동치면서 뒷목부위에서 불쑥 핏대가 솟아올랐다.
순간의 흥분을 자제하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뉴프레지가 수화기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이것은 자제력을 잃어버린 초강대국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였다.
뉴프레지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자 민 대통령도 무겁게만 느껴졌던 전화기를 내려놓고 허탈한 표정으로 허리를 의자 뒤로 바짝 누였다.
두 정상은 최소한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채 서로를 끝 간 데 없이 밀어붙였고 결국 넘지 말았어야 할 금지선이었던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거론하고 말았다.
이제 전쟁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임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도 분명하게 밝혀졌다.
적어도 북한과 전쟁하는 미국은 한국의 동맹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서는 서로 적성국이 될 수도 있음을 미국대통령에게 선포했다.
미국이 적이라면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동맹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생경한 구도는 자칫 국론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구도였다.
따라서 설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독도전쟁 이후 한미 양국의 갈등상을 지켜봐 왔던 대통령의 참모들은 이심전심으로 대통령과 같은 마음이었다.
특히 국방부장관과 국가안보실장은 대통령의 든든한 조력자를 자처했다.
최 실장이 통화를 마친 대통령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잘하셨습니다 대통령님!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을 분명하게 잘 전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똑 부러지게 말씀을 해주어야 미국 측에서도 오해 없이 한국리스크를 계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방부 장관도 단호한 어투로 대통령에게 말했다.
“우리 땅 독도를 지켜주려다가 발생한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전쟁만큼은 우리가 막아주어야 합니다!
미군철수까지 거론했으니 백악관에서도 전쟁을 섣불리는 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내를 차분히 바라봤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발언을 전달했으니 백악관으로서도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동맹국의 대통령이 이토록 반대하는 전쟁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클 테니 말입니다,
뉴프레지는 철저한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이죠”
최 실장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안경대를 매만지면서 다시 말했다.
“대통령님의 말씀처럼 저들은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봐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 보이신 강력한 반전 의지가 백악관을 상당 부분 흔들어 놓았을 테니 말입니다”
NSC회의를 소집하기에 앞서 안보 관련 핵심 참모들은 대통령과 생각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민 대통령이 뉴프레지 대통령과의 통화에 안보 관련 장관과 핵심참모를 배석시킨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뉴프레지 대통령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이보세요 한국대통령! 지금 미합중국 대통령을 상대로 협박하시는 겁니까!
한국대통령이 미군철수를 거론했을 때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내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죠?”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가 몇 시간 만에 다시 전화해서는 또다시 몇 시간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민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뉴프레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 이미 할 말은 다했으니 더 이상은 자극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수화기에서는 초강대국 미국대통령의 흥분된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한미동맹을 파기하겠다고요?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요?
한국대통령은 마치 남과 북이 서로 뭉쳐서 세계최강 미군을 상대로 전쟁이라고 하겠다는 결기를 보이시는데요,
내가 볼 때 한국대통령이 뭔가 큰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미동맹을 한국대통령 마음대로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본데 과연 한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내 생각엔 오히려 한국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것 같은데요”
수화기를 잡은 약소국 대통령의 오른 손목 실핏줄이 곧 터져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상기된 얼굴은 목 부위까지 흑색으로 변해버렸다.
약소국의 대통령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초강대국 대통령의 도 넘은 발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국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가 나 뉴프레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 비극이군요!
로널드 레이건호가 일본해에서 철수했을 때 그날부터 난 밤잠을 설치고 있어요,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인지 아십니까?”
이후 두 정상 간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민 대통령이었다.
“정히 그러실 수가 없다면!”
뉴프레지 대통령을 흥분시켰던 민 대통령의 그 말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체념했다는 듯 더 이상은 반응하지 않았다.
“전쟁이 개시된다면 그동안 미국이 개입했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막대한 미군의 인명피해도 따져봐야 합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 전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북한을 설득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미군의 인명피해까지 생각해 주시니 대단히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그 문제는 우리가 따로 대책을 마련해 두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는 NEO작전도 끝나가는 실정이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군요!”
“대통령님께 다시 한번 더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금년 말까지라도 제게 시간을 주신다면”
다분히 다혈질에 가까운 뉴프레지가 이번에도 민 대통령의 다음 말을 끊고 나섰다.
“알았어요 알았어! 전번 스몰딜 합의 때처럼 정말로 집요하시군요,
정히 그러시다면 내가 한국대통령에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까지만 시간을 드리죠,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우리 손자한테 내가 큰 소리를 쳤었거든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북한지도자의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말입니다,
그 안에 로켓맨을 설득해서 내 앞에 무릎을 꿇리세요!
그렇지 않으면 꽝! 미국대통령 뉴프레지의 화염과 분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뉴프레지가 그의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의외의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여유롭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 참고로 난 미친 사람이에요!
한국대통령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이니까 내가 한국대통령에게 고급 정보를 하나 드리죠,
일전에 시진핑을 만났을 때 나한테 고구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이번 작전은 아마도 미중합동작전이 될 거예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이미 양해가 이루어진 것이니 그렇게 될 겁니다,
미군의 공습과 동시에 중국지상군이 진격해 들어가서 북핵시설을 접수하게 될 거예요,
많은 희생이 발생하는 지상전은 우릴 대신하여 중국군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우릴 너무 걱정 안 해주셔도 됩니다,
대단히 유감입니다만 미국은 북한의 핵과 ICBM의 페기에만 관심이 있지 중국이 북한을 저들의 동북 제4성으로 흡수한다고 해도 별관심이 없습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팔이 아파서 더 이상은 통화를 못하겠어요,
나의 절친 일본수상이 아까부터 어서 끊으라고 아우성이에요,
캠프데이비드에서 함께 라운딩을 하기로 했거든요,
내가 한국대통령에게 허락한 시간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까지입니다,
아 그리고 방금 생각났는데 작전명은 크리스마스 폭죽놀이가 될 거예요, 멋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 잘 해결해 보세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인들이 나 뉴프레지의 화염과 분노를 즐기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땡큐!”
수화기를 내려놓는 민 대통령의 오른손이 후들거렸다.
뉴프레지의 진의가 확인되었고 디데이의 날짜까지 밝혀졌으니 더 이상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었다.
뉴프레지의 분노를 푸는 방법은 북한의 무조건적인 핵페기선언 정도를 말하는 것일 테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틈을 이용해서 북한점령을 시도하겠다는 중국의 계략이 드러났다.
이것을 미중이 서로 양해했다면 북한의 중국흡수가 기정사실화 된다는 것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내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내야 한다.
당일 저녁, 청와대 신청사의 지하벙크에서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됐다.
최근의 안보정세에 대한 최 실장의 브리핑이 끝나자 참석자 모두는 대통령의 발언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오늘 두 차례에 걸쳐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언성을 높여가면서 미국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프레지 대통령은 다가오는 성탄절이브까지 북한의 굴복을 요구했는데 조건 없는 핵폐기선언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선제공격을 감행할 것인데 중국지상군과의 합동작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총리를 비롯한 참석자들 대부분은 미중합동작전이 될 것이라는 난생처음 접하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대통령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심지어는 중국군의 북한점령도 용인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북한이 세계최강 미국의 공중폭격과 북중접경지대에 배치된 삼십만의 중국군을 상대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이 대목에서는 대통령도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한 모금의 물을 마신 후에야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결과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북핵시설의 신속한 접수라는 미명하에 전개되는 중국군의 작전목표는 북한영토의 중국편입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미국의 양해와 전 세계의 방조 속에서 북한을 영원히 중국에 빼앗기는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비열하게도 중국은 미국이 일으키게 될 북미전쟁에 기대어 동북공정을 종결지으려 합니다!”
윤 비서관의 예견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자 사실은 대통령도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동북공정을 한중간의 한가로운 역사논쟁쯤으로 인식하던 NSC위원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로 다가왔다.
“북한이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한반도에서 치르게 되는 전쟁입니다!
그것도 우리 땅 독도를 지켜주려다가 휘말리게 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린 아직도 이 참혹한 전쟁에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독도가 우리 민족의 영토였듯이 북한 또한 엄연히 우리 민족의 영토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평의 북한 영토도 우리는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지난 오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은 이러한 위기들을 무수히 이겨냈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땅 독도를 지켜냈듯이 이번에도 미국과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절반을 온전히 지켜낼 것입니다,
남북한이 똘똘 뭉쳐서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사수할 수 있습니다!"
어느덧 대통령의 발언은 결의에 찬 연설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질 때만 하더라도 모두들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혹여 라도 한미동맹이라는 오래된 관습에 사로잡혀서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전쟁을 앞두고서 내부분열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총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참석한 장관과 참모들이 일제히 일어나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NSC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이 박수를 치는 행위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모습이었다.
이제 대통령의 생각은 공식적인 한국정부의 생각이 되었다.
미중일연합군과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우리 민족의 절반을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천명되었다.
이렇듯 위기상황에서 대통령이 보여주는 언행 하나하나는 우리 정부 내에서 강력한 응집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독도 전쟁 때 보여준 대통령의 리더십이 원인이 되었다.
미중합동군사작전에 대한 내용은 전략적 차원에서 1급 대외비로 구분되었지만 북한을 저들의 동북 제4성으로 흡수하려는 중국의 계략이 드러난 마당에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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