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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Sep 03. 2024

북경선언

7회

12월 중순 대통령은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공식적으로는 작년 시 주석의 방한에 따른 답방형식이었지만 미국의 선제공격이 임박한 시점에서 굳이 이 시점을 선택했을 때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시월 말에 있었던 한미정상간의 전화통화에서 뉴프레지 대통령은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그야말로 천기누설을 해버렸다.

성탄절 폭죽놀이가 미 공군과 중국지상군의 합동 작전이 될 것임을 얼떨결에 털어놓았고 말았다.

사실 이 내용은 우리 정부 내에서도 극비로 다루었기 때문에 외부에는 일체 알려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다시 한번 더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고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를 대비한 다음 단계의 계책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대범하게도 삼일특공대는 대통령의 중국방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동북공정을 역이용하는 전략을 수립했는데 작전명은 ‘역린 비틀기’였다.

용의 가슴부위에 거꾸로 난 비늘을 일러 역린이라고 하고 이것을 건드리면 용은 극도로 광분하게 된다.

이때는 필시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를 노렸다가 정확하게 찌른다면 무적의 용일지라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물론 단시일 안에 결과를 만들어야 했던 작금의 한반도 상황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지만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었다.


한중정상회담의 일정을 촉박하게 잡은 탓도 있지만 중국 측의 의도된 홀대로 대통령은 지금 국빈자격이 아닌 실무방문의 형식으로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은 삼일특공대가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윤 비서관은 대통령의 통역을 빙자하여 방중기간 내내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킬 계획이다.

대통령이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기면서 윤 비서관에게 말했다.

“뉴프레지 대통령이 흘려준 미중합동작전에 대해서는 우리 삼일팀에서도 사전에 예견하고 있었어요,

여러분들의 놀라운 안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요?”


“대통령님! 현재 북중 접경지대에 배치된 중국지상군이 무려 30만에 육박하고 있고 병사들에게 기본적인 한국어까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백두산 일대에서는 10만의 병력과 수천 대의 탱크까지 동원한 혹한기 훈련을 매년 실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압록강 하류에서는 부교를 이용한 도하훈련까지 벌이고 있는데 북한을 자극하면서까지 이런 방식의 훈련을 지속해 왔던 것은 북한의 유사시를 염두에 둔 조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고구려를 대단히 위험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중국의 기본 입장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고구려라는 존재는 동북지방을 큰 혼돈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한 요인입니다,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출발한 것이 동북공정이었고, 그 끝은 고구려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생각합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에서는 유사시 중국군은 신속하게 평양아래 지역을 접수한 후 남포 원산 250Km 대치선에서 한미연합군과 대치하는 계획을 폭로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미국이 미중합동작전을 제의했다는 것은 중국의 동북 제4성 계획을 묵인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미국이 중국을 끌어들여야 했던 것은 지상 작전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자칫 더 큰 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는 셈법이 전혀 다른 중국과 러시아의 대응까지를 고려한 결정이라 판단됩니다,

중국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북한군부로 하여금 친 중국 괴뢰정부를 수립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엔 외국군의 동시철수를 주장하면서 중국군의 영구주둔을 모색하겠지만 말입니다,

중국이 오래전부터 고구려와 발해사는 물론이고 고조선사까지 왜곡하면서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킨 의도가 북한의 중국흡수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티베트를 대상으로 전개했던 서북공정의 거울이라 할 수 있는 동북공정의 최종 시나리오입니다 대통령님!”


“그래요, 진즉부터 중국의 의도를 간파한 정 위원장이 군부 내의 친 중국세력을 경계하고 있었고요,

우리 측 방북특사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정 위원장이 쳐놓은 덫에 보위부장 일당이 걸려들었던 것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중국은 천사백 년 전 수나라 때부터 고구려 영토를 노려왔습니다,

미국과 달리 이 지구상에서 우리의 영토에 관심이 많은 오직 두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음! 우리 민족의 운명이 이렇듯 바람 앞에 등잔불이 된 것은 모두 일본의 독도침략으로부터 벌어진 일입니다,

호시탐탐 우리 민족의 영토에 관심이 많은 두 나라는 당연히 성탄절폭죽놀이를 기다리면서 저들의 오랜 바람을 관철시키려고 들겠군요”

대통령이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주면서 가벼운 탄식소리를 냈다.


이미 미국과 일본은 선제공격의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고 중국은 이것을 그들의 오래된 계획을 실행하려는 유용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이 시점에서 선제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해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과녁을 흩트려서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하게끔 적군과 아군을 섞어야 한다.

남북한의 전면적인 여행자유화 조치와 교황의 평양방문으로 기대만큼의 효과가 나타날지는 지켜볼 일이다.


또 다른 해법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시켜서 중국지상군의 진격을 포기시켜야 한다.

중국이 미중연합작전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미국은 그들만의 전쟁수행에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관건은 동북공정을 저지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저들의 가장 아픈 곳을 깊숙이 찔러야 한다.

동북공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어서 작금의 한반도 문제에 협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관자 정도로는 돌려세워야 한다.      


대통령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공식 영빈관인 조어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제 막 여장을 푼 대통령 일행에게 여독을 풀 잠깐의 휴식조차 생략하는 홀대의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다.

시 주석의 일정표에 맞추어야 한다는 부장조리의 닦달에 예정보다도 한 시간이나 일찍 조어대를 나서 곧장 인민대회당으로 이동하는 수모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분히 형식적인 환영식과 만찬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시 주석은 대통령에게 애써 눈길을 외면하는 무례로 일관했다.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시종일관 잔뜩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오늘의 회담이 만만치 않음을 알리는 한 편의 예고편과 같았다.


불편하고 따분하게만 진행되던 만찬이 끝나자 곧바로 시 주석과의 단독정상회담에 들어갔다.

“최근 남북한은 통일헌법의 제정 논의에 착수했습니다,

평화통일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역사적인 시점에서 귀 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회담은 시 주석 특유의 여유 넘치는 미소와 부드러운 화법으로 느긋하게 시작되었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습니다, 대찬성입니다!

단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중국의 국가이익이 침해받는 영역이 있어 그것을 우려하고 있을 뿐입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주한미군과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은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통일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주한미군의 철수부터 선행돼야 합니다!”


시 주석의 표정과 목소리가 비우호적인 어감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대통령도 어느새 경직되기 시작했다.

양국의 지도자는 마치 서로 상대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처음부터 작정하고 강공으로 주고받았다.


이때 윤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눈빛 신호를 보냈다.

시 주석이 주도하는 빠른 템포에서 이탈하여 대화의 속도를 한 발작 늦추자는 싸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로 임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조금의 빈틈이라도 허용할 경우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주변세력 간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조정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에 도움이 된다면 주변지역의 안정에도 기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시 주석이 뜨끔했다.

자신들의 의도를 들킨 사람처럼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국의 황제가 약소국의 일개 왕을 다그치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도 미군의 주둔이 필요할 만큼 우리 중국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시 주석이 호통 치듯 말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은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기세로 대응했다.

“통일한반도는 안보든 경제든 외교든 중국의 제반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선린우호의 정책을 지향할 것입니다,

80년간 지속된 한미 군사동맹도 통일을 준비하는 한반도의 변화된 환경에 발맞추어서 점진적으로 조정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깊은 우려를 감안하여 주한미군은 현 위치에서 더 이상 북상할 수 없도록 조치하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의 통일정부가 지향하게 될 외교정책은 미중사이의 철저한 균형자 외교로서 엄정중립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말하는 동안 정상회담에 임하는 시 주석의 무례한 태도가 도를 넘고 있었다.

양손을 깍지 낀 채 턱을 받치는가 싶더니 대통령과는 아예 시선을 회피했다.

주변국의 왕이 직접 알현하여 대국의 우려를 풀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이 동북공정을 품고 있던 시 주석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시 주석 아니 시 황제의 삐딱한 자세와 화난 얼굴표정에서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괜스레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자초하지 않겠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지난 반만년동안 우리 중국과 한반도는 형제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지내왔어요,

한반도는 앞으로도 우리와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의 고통이 동반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 간에 통일을 추진한다고 하니 물어보는 말 입니다만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전력은 어떻게 조치할 계획입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사실 이 질문은 회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영악한 시 주석이 빈틈을 주지 않고 돌직구를 날렸다.

어쩌면 중국보다는 미국이 더 궁금해할 답변이기도 했다.


또다시 윤 비서관과 눈빛을 교감한 대통령이 삼일특공대의 제안대로 거침없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답변이라면 이번 기회에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주석님! ICBM급의 장거리탄도미사일은 미국의 절대적인 우려도 있고 해서 향후 미국과 좀 더 논의를 해볼 사안입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독도침략에서 보았듯이 일본의 도발을 억제하는 차원에서도 그 외의 무력자산은 안전하게 운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 주석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자 유리판에 찻잔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을 정도였다.

“통일 이후에도 핵자산을 보유하겠다는 것은 주변국의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 의제는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가 한 목소리로 주문하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를 통일 한반도 정부는 지킬 의사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통일한반도의 핵보유국 지위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초반부터 강경하게 견지하자는 것이 삼일특공대의 주문이었다.

지금 시 주석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지만 대통령으로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최근에 우리나라는 북한의 핵무력이 없었다면 일본으로부터 우리 땅 독도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한반도가 주변국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자위적인 수단으로써 핵무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에 해당합니다,

없던 핵을 새롭게 개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핵자산을 안전하게 보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주석께서도 통 크게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 주석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던 대통령이었다.

중국의 압박에 단 한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띠던 시 주석이 불쑥 내뱉은 다음 한 마디가 그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통일논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드디어 대통령이 기다리던 의제가 시 주석의 입으로 튀어나왔다.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정색한 표정으로 돌변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 어떤 나라든 간에!

한반도의 그 어디라도 폭격하거나 단 한 발작이라도 우리의 영토에 진입하게 된다면 남북한이 똘똘 뭉쳐서 함께 대응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의 도움으로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내었듯이 만약 평양이 공격받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즉각적으로 우리 국군은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의 국토를 사수할 것입니다!”


사실 대통령의 이 말은 섬뜩한 말이었다.

성탄절폭죽놀이를 빌미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아울러서 제2의 나당전쟁에 임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가 천명되는 순간이었다.


애당초 한국대통령을 만만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머리를 쳐들고 맞짱까지 뜨자는 식으로 나올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시 주석도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바른 자세로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치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대통령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대응했다.


이때 대통령의 눈가에서 불쑥 핏대가 솟아올랐다.

“그렇습니다! 남과 북의 그 어디라도 공격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미국이든 일본이든 그 어떤 나라든,

단 한 치의 좌고우민도 없이 단호하게 맞서 싸울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말하고 있는 그 어떤 나라는 바보가 아닌 이상 단박에 알아먹을 수 있도록 비교적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


대통령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작심 발언에 내심 당황했던지 시 주석의 동공은 점차로 커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두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중화제국을 통일했던 수나라,

그 앞에서 머리빴빳이 쳐들고 대어 들던 고구려에 대하여 수양제가 느꼈을법한 모멸감이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어디 만만한 상대였던가,

거대한 수나라마저 무너뜨린 고구려의 용맹과 저력을 천사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목격하고 있었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시 주석 아니 시 황제의 입장에서는 탁자를 내리치면서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지금 호통을 치는 사람은 주변국의 일개 왕 격인 한국대통령이었다.    


“주석님! 중국과 우리 한민족은 오천 년 이상을 가까운 이웃나라로 지내온 형제사이입니다,

때로는 싸우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선린우호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지내왔습니다,

곧 우리 남북한은 통일이 되겠지만 가급적 중국의 지지 속에서 축복받는 통일을 이루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중국과는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 팔천만 우리 국민들의 마음입니다”


이건 뭐 거의 얼르고 달래기였다.

시 주석으로선 한국대통령이 오천 년 이상을 지켜온 자기네 영토를 보전하면서 중국과 잘 지내고 싶다는데 딱히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지지할 수도 없는 기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이제 곧 동북공정의 최종 작업인 고구려의 구토를 회복할 날이 머지않았고 어쩌면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 그야말로 G2의 연합작전인데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주저한단 말인가.


“한국대통령의 통일의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각 나라들마다 저간의 사정들이 있으니 이 자리에서 가타부타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따로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통일한반도가 한미동맹을 파기하면서까지 중립외교를 천명하겠다는 것은 중국의 이익을 고려한 호의로 받아들이겠습니다만 글쎄요?

약소국이 G2를 상대로 중립외교노선을 견지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시 주석은 역시 노련한 정치지도자였다.

먹잇감의 경계심을 풀게 할 심산으로 호랑이의 발톱을 숨기면서 최대한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중국몽’ 이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의 꿈이었다.

지금 시 주석은 ‘중국몽’을 부르짖으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고 있다.

헌법서문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삽입되어 실질적인 중국의 황제로 등극한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십 년으로 제한된 주석의 임기 규정도 진즉에 삭제되어 영구집권도 보장되었다.

지난해 3월부터는 제4연임이 시작되어 팔십 세가 되는 2033년 3월까지 임기가 보장된 터라 무려 이십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경제와 군사 부분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초강대국 미국의 경쟁상대로 떠오른 중국이 아니던가,

그 중국의 실질적인 황제가 자그마한 한반도 그것도 그 절반의 한국대통령에게 수모에 가까운 능멸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북공정의 완성을 앞둔 특수한 시점이라 이를 악물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일행은 조어대 18 호각에서 다음날 아침을 맞았다.

대통령이 아침식사 후 모닝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무렵 윤 비서관은 오늘자 환구시보에 대서특필된 고구려 관련 특집 기사내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제목부터가 ‘고구려공정을 끝낼 때가 되었다’로서 기사의 내용이 너무나도 노골적입니다,

대통령님의 방중기간에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는 것은 그들의 계획을 밀어붙이겠다는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기사의 끝부분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미군의 선제공격이 임박한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자력생존이 어렵게 된 조선을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 한다,

조선은 본래 중국의 변방민족이었던 고구려의 구토로서 위기의 조선을 구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들고 있던 신문을 펼쳐진 상태 그대로 탁자 위에 내려놓은 윤 비서관은 침착하게 보고를 이어나갔다.  

“대통령님!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출자한 신문사로서 통상 중국당국이 직접 말하기 곤란한 내용을 기사화합니다,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공식의견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자 환구시보의 지면을 빌려서 중국공산당은 북한영토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성탄절폭죽놀이에 임하는 저들의 태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윤 비서관의 보고 중에 대통령의 얼굴색이 짙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들고 있던 커피를 흘릴 정도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손을 떨어야 했다.

“어제 내가 그만큼 이야기했음에도 멈출 의사가 없다는 말이겠지!”

“이런 식으로 저들의 의도를 적나라케 드러내는 것은 대통령님께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그동안 쉬쉬하면서 북한흡수계획을 추진하던 중국이 한반도가 느닷없이 통일을 추진하겠다고 나오니까 그 초조감이 반영된 메시지로 보아집니다!”

“그래요 중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우리의 대응도 그 수위에 맞추어 주어야겠지요!

기어이 뉴프레지와 짝짜꿍이 되어서 성탄절폭죽놀이를 즐기시겠다면 우리도 그에 합당한 방책으로 맞설 수밖에요,

공격을 하려는 자들의 손익계산서를 우리가 다시 써주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주어야 합니다,

저들의 역린을 건드려서라도 아픈 곳을 후벼 파야 한다면 그렇게 해주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일정이 대단히 중요하겠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대통령님의 북경대 연설에서 모든 중국인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셔서 그들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일깨워주셔야 합니다!”


대통령은 오늘의 결전에 앞서 윤 비서관이 준비해 준 연설문을 한번 더 읽어보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연설제목은 ‘21세기 한중이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였지만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자 붉은 사인펜으로 밑줄 친 문장들이 나왔다.

이 문장들을 골똘하게 쳐다보던 대통령이 볼펜으로 몇 문장을 더 가다듬으며 입술을 깨어 물었다.     


오전 열 시에 맞추어 대통령 일행이 북경대학에 도착했다.

대통령의 강연이 예정된 강당에는 재학생 오백여명과 교직원들 그리고 취재기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통령이 행사장의 연단에 올라 중국어로 ‘따지 아하오!’로 인사하자 여기저기서 플래시 터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외신기자들도 생각보다 많이 몰려들었다.

작금의 한반도 위기상황에서 대통령은 이슈메이커가 분명했다.


연설내용의 초중반부는 중국을 대국이라고 띄워주면서 한중간의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었다.

삼십 분을 예정한 연설에서 마지막 오 분을 남기고 무려 열두 번의 박수를 받은 대통령은 드디어 붉은 사인펜으로 밑줄 친 마지막 장을 남겼다.

대통령의 목청이 한층 더 높아지기 시작한다.

“이제 남북한은 평화통일의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기 시작했고 새로 출발하는 대통합 코리아연방은 새로운 한중관계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합 코리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아직까지는 행사장의 분위기에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대강당을 지배하게 되면서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대통령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며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 첫 조치가 조선과 청나라 간에 결렬되었던 국경분쟁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1887년 조선과 청나라 간에는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하게 확정하기 위한 제2차 국경감계회담을 열었지만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으로 지금까지 감계회담이 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강당 안은 심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흥분한 기자들이 눌러대는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로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대통령은 메시지를 압축하여 더욱 또렷하게 연설했다.

마치 백두산호랑이가 포효하듯이 중국인들에게 외쳤다.

“대통합 코리아연방과 중국정부가 그동안 미완으로 남겨두었던 양국의 국경을 명확히 함으로써 두 나라가 함께 만드는 번영의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북경대 연설은 ‘한국대통령의 북경선언’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한국과 중국을 넘어 세계의 톱뉴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모여든 취재기자들은 윤 비서관이 나누어주는 보충자료를 토대로 미완으로 끝난 감계회담의 역사적 사실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당일자 뉴욕타임스의 인터넷 판에는 역사적 사실의 배경설명을 소상하게 덧붙이면서 1면 전체를 도배하다시피 했고 기사의 제목은 ‘중국의 역린을 건드린 한국대통령!’으로 뽑았다.


지구촌 전체가 이 흥미로운 뉴스에 미주왈 고주왈하고 있었을 때 중국지도부의 내부분위기는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시 주석의 충복으로 통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왕 서기가 자신의 집무실을 들어서자마자 구둣발로 책상을 걷어찼다.

주석실의 긴급 호출을 받고 시 주석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하달받은 후 방금 돌아온 길이다.

왕 서기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단 일곱 명뿐인 중앙상무위원회의 위원이면서 시 주석의 정치적 행동대장을 자임하고 있어 그 위세는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지경이다.

‘빌어먹을 한국대통령을 어떻게 처리한다?’

잔머리를 굴리던 왕 서기가 무엇이 생각났던지 사회과학원의 허밍친 원장에게 전화했다.

“허 원장! 동북공정은 당신네들 소관이니 오늘 한국대통령이 터트린 폭탄은 당신이 책임지고 수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렇챦아도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허 원장의 깔끔한 업무처리 솜씨야 내 익히 알고 있소만 이번 사안은 보다 더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이오!

감히 우리 중국을 상대로 경거망동한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한 경고를 보내되 그 불똥이 당국으로 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할 것이오!

아마 한국대통령은 지금쯤 선양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 같은데 주석께서 격노하신 관계로 북경에서의 이후 일정들이 전면 취소된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오,

그곳에서 남은 방중기간을 하릴없이 관광이나 하다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중국을 상대로 객기를 부리다간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잔 말이요!”


언제나처럼 하늘색 청나라 전통복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허 원장이 뒷짐을 진채 원장집무실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며 고민에 빠졌다.

왕 서기의 특별한 지시는 동북공정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한국대통령을 응징은 하되 외교적 파장을 고려하여 일처리를 정교하게 하라는 맞춤형 주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궂은일이라면 길림성의 왕징이 제격일 테지만 매사에 거친 일처리가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을 거듭했다.

지난여름에도 불쑥 북경으로 날아와서는 감히 자신의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패악 질을 하던 통에 아랫사람들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동북공정의 과업 대부분이 동북 3 성지역의 실무현장에서 진행되는 일이다 보니 현실적으로 장백산천지회만 한 하부 실행단체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무례한 언행과 시도 때도 없는 인사 청탁이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적당히 왕 회장을 컨트롤하면서 관계를 지속해 왔던 속사정이었다.


백두산의 서문방향으로 중국식 호텔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화려한 청나라풍의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한 호텔이 숲 속에 가린 채 우뚝 솟아있다.

위풍도 당당하게 일필휘지로 새겨진 호텔의 이름은 장백호텔이다.

호텔의 맨 위층인 9층 전체를 일단의 삼합회 패거리들이 사용하고 있었고 금빛 바탕에 짙붉은 색으로 쓰인 현판에는 ‘장백산천지회’라고 쓰여 있다.

그중에서도 복도의 가장 왼쪽 끝에 위치한 드넓은 방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장백산천지회의 우두머리인 왕 회장의 사무실이다.


방금 북경의 허 원장으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은 왕 회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거 연기를 무지막지하게 뿜어 됐다.

비범하지 않은 거구의 풍모에 언제나처럼 모자부터 구두까지 올 백색으로 치장한 왕 회장의 오른손에는 잠시도 시거가 떠나지 않는다.

매서운 눈빛이 인상적인 행동대장 훠치산이 그의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검색 중이다.

북경대학에서 기자들에게 자료를 배포하던 윤 비서관의 사진을 찾아내 왕 회장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회장님 보십시오! 이십 년 전의 윤 팀장 바로 그 작자가 틀림없습니다,

한국정부의 통일정책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답니다!”

“그래 맞아 또 그 작자였어!

그때 덤퍼트럭으로 완전히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불사조가 되어서 다시 돌아왔구먼,

이 작자가 한국대통령과 함께 있다면 대통령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이 친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품이 틀림없을 거야,

허 원장의 당부가 동북공정에 맞서면 어떻게 되는지를 한국대통령이 알아먹도록 해주라는 거야,

톡톡히 망신은 주되 외교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북경이 곤란해진다나 어쩐다나,

적당한 선에서 손을 좀 봐주라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능수능한하게 꼼지락거리던 훠치산이 또 뭔가를 찾아낸 모양이다.

“회장님! 윤 팀장 이 친구의 부인이 옛날에 우리가 죽인 배 교수의 딸 배은하 같습니다”

훠치산이 보여주는 사진을 흥미롭게 들여다본 왕 회장이 그의 큰 손바닥으로 힘껏 손뼉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때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시거에서 재가 떨어져 온 사방으로 날렸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요즘은 이 스마트폰이 도깨비방망이군,

뭐든지 다 알아낼 수가 있으니 말이야,

좋았어! 한국대통령에게 경고하는 본보기로 배은하가 적당하겠군,

서울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 외교문제와도 관련이 없을 테고, 오랜만에 피 맛을 한번 보자고!

우리가 보내는 경고의 표시는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지!”


피 맛을 한번 보자는 왕 회장의 말에 그동안 움츠려 들었던 훠치산의 세포들이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았다.

깍듯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서울에 있는 아이들에게 연락해서 가급적 빨리 조치하라 지시하겠습니다!”

다시 시거를 입에 문 왕 회장이 시거연기를 천장으로 쏘아 올린 후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왕이면 오늘 자정 안으로 조치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야 오늘 일에 대한 응징의 표시가 될 테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연변조선인 향토연구소를 설립하여 재중 동포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배 교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도 이들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교통사고를 위장하여 윤 비서관을 죽이려 한 세력도 바로 이들이었다.

'장백산천지회' 이들은 동북 3성 지역에서 공안은 물론이고 당정군에 걸쳐서 그들의 마수가 뻗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서울 속의 연변이라는 대림동 일대에서 활약하는 건달패들도 이들 조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 회장이 이끌고 있는 이 단체는 보통의 삼합회 건달 세력들과는 질적으로 그 차원이 달랐다.

만주족의 후예로서 청나라의 발원지인 장백산을 지키는 것이 이들의 신념이라면 현재 북한과 반반씩 공유하고 있는 장백산의 천지를 온전히 되찾는 것이 이들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따라서 장백산을 백두산이라고 부르면서 신령이 깃든 영산으로 받들어 모시는 우리 동포들을 핍박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다분히 의도되었던 북경대에서의 소란을 뒤로한 채 대통령은 다음 일정인 ‘한중무역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두 시간을 날아서 요녕성 선양시에 당도했다.

요녕성 당서기인 위펑의 영접을 받으며 개막식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은 해거름녁이 되어서야 상그릴라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내일아침 다시 북경으로 이동하게 되면 방중 기간 가장 중요한 일정들이 연속적으로 줄지어 있었다.

오전에 예정된 확대정상회담을 마치면 곧바로 시 주석과의 오찬 일정이, 저녁에는 리 총리와의 만찬일정까지 잡혀있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살인 스케줄을 앞두고 잠깐의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욕실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이때 위펑 당서기와 함께 황급히 들어온 주중대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샤워를 끝내고 소파에 앉은 대통령은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주중대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석과 총리 두 분께서 갑자기 몸이 불편하셔서 내일 확대정상회담과 이후의 일정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대통령의 옆 자리에 서 있던 윤 비서관마저도 전혀 놀라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북경대 연설에 대한 중국 측의 첫 반응인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엄청난 외교적 결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우리 측보다는 오히려 당황한 쪽은 위펑 당서기였다.

북경으로부터 전달받은 지시사항이라며 황망한 표정으로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님께서 일정을 단축하여 이대로 귀국하신다면 양국의 우호관계에 오해하는 여러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기왕에 저희 지역을 방문하셨으니 이후의 일정을 여기서 소화하시는 것이 어떨지를 제안드립니다!”  


북경의 의도는 명확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기분 나쁘면 그냥 보따리를 싸도 좋지만 가능하면 동북지방의 촌구석에서 두어밤 더 자고 가라는 메시지였다.

중국에 대항하는 주변국에 대한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홀대의 차원을 넘어선 이웃나라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이었다.


위펑 당서기도 얼마나 무안했던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태도는 의외로 쿨했다.

“주석과 총리께서 갑자기 몸이 불편하시다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면 서기장님의 말씀대로 양국 간의 관계에 대한 여러 말들이 만들어질게 뻔 하니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기장님! 남은 일정을 뭐 하면서 보냈으면 좋겠습니까?

따로 생각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대통령이 편하게 웃으면서 말하니 위펑 당서기도 다소 마음이 놓였던지 나름대로 준비해 온 프린트 물을 대통령에게 내어놓았다.

“그래요 한번 봅시다!,

내일 일정표가 조찬에 고궁유적지나 둘러보고, 또 오찬에 장성유적지나 둘러보고, 또 만찬에 밥 먹고 자고 그것으로 땡이네요,

모레는 또 조찬에 선양 타오센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군요,

이쯤 되면 내가 중국까지 와서 관광한번 잘하고 가는 격이 되겠습니다,

뭐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어째 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서기장 자신이 보더라도 이건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뒤통수를 긁어가며 머쓱해하자 대통령이 대뜸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서기장님! 기왕에 관광을 할 바에는 그 대신 좀 편안하게 둘러보고 싶은데 양해를 해 주시겠습니까?”

대통령의 진의를 알턱이 없던 위펑 당서기는 북경으로부터 물먹고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잠시 머물게 된 대통령을 가급적 배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디 특별히 방문하고 싶은 곳이라도 계신다면 경호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기장의 호의에 고맙다는 표정으로 대통령이 답했다.

“서기장님이 주신 관광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해 보고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펑 당서기가 물러나자 대통령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국내에서 구상했던 대로 실제로 플랜 B를 가동하게 된 것이다.

플랜 A는 중국이 대국답게 처신한다는 전제하에 짜인 계획이었다.

기존의 일정표대로 움직이면서 정면으로 맞대응하는 전략이었다.

반면에 플랜 B는 중국이 어제와 오늘처럼 좁쌀처럼 대응할 때를 대비한 전략이었고 대통령은 내심 이런 상황을 더 선호했다.

중국의 수도 북경 한 복판에서 시작된 작전명 ‘역린 비틀기’는 동북지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본격화되었다.

지금부터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의 숨통을 더욱 바짝 조여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쟁취할 시간이다.    


바람결에 스쳐 지나가는 향기만으로도 여기가 서울 속의 중국임을 느끼게 해주는 대림전철역 12번 출구,

사십 대 초반의 두 사내가 건축현장 노동일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차이나타운 거리로 들어섰다.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차이나타운 거리의 저녁 불빛들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여기선 고향의 정취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속에 연길시장을 통째 옮겨놓은 듯 하루 종일 중국동포들로 북적거리는 이 거리에서 만큼은 이국땅에서의 긴장감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기수와 경태는 5년 전 한국으로 건너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둘 다 기본 바탕이 어질고 손끝도 야무져서 이곳 시장사람들 사이에선 억척이 총각들로 불렸다.

시장뒷골목을 돌아 낡은 3층 건물의 옥탑 방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철재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골목 한쪽에서 낯익은 건달패 예닐곱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의! 연변 억치기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한참을 기다렸잖아”

동북 3성 일대를 무대로 상인들을 갈취하고 특히 우리 동포들에게는 무슨 악감정이 그리도 많은지 딱히 이유도 없이 폭력을 일삼던 장백산천지회 패거리들이다.


얼굴에 칼자욱이 있다 하여 칼치로 불리는 자가 중간 보스였는데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지근지근 씹어가며 두 사람에게 아래로 내려오라 손짓했다.

기수와 경태는 연변에 있을 때부터 이들 조직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한국에 와서까지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뭡니까?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경태 뒤에서 철재계단을 오르던 기수가 호기롭게 대꾸하면서 먼저 내려왔다.


가까이서 본 칼치의 얼굴은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험상궂었다.

그가 씹던 오징어다리를 기수의 얼굴에 툭툭 치면서 깐죽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이 연변 떨거지 새끼야! 볼일이 있으니까 한 시간째 이 추운 데서 벌벌 떨고 있었겠지,

그냥 심심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었겠냐?”  

순간 경태가 분통을 참지 못하고 대어 들려고 하자 기수가 막아서며 칼치에게 다시 말했다.

“댁들하고 길게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용건만 빨리 말하고 각자 볼일 보러 갑시다!”


이때 칼치 앞에 서있던 다른 건달패 두 명이 갑자기 품속에서 시퍼런 식칼을 꺼내더니 기수와 경태의 목에 들이대었다.

칼치가 다시 오징어 다리를 씹어가면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한다.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애기고, 너거들 배 교수 제자들인 거 다 알고 왔으니까 시치미 뗄 생각들일랑 애당초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한국으로 시집온 배 교수딸 배은하 지금 어디서 살아?”


칼치의 이 말에 기수와 경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장백산천지회가 배은하를 찾는다면 그 목적은 단 하나, 배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의 딸도 해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탈을 쓴 살인마들이기에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존재들이다.

지금 이 순간, 동정을 바라는 그 어떤 행위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기수가 태도를 바꿔서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우리한테 볼일이 있던 게 아니고 배은하한테 볼일이 있었구먼,

배은하 사는 곳만 가르쳐주면 되는 거지?

그게 뭣이 어렵다고 닭모가지 날릴 때나 쓰는 칼까지 꺼내 들고 무섭게들 그러는 거야,

우리가 가리켜 줄 테니까 따라와!”


경태도 기수의 의도를 이심전심으로 이해했던 터라 능청스럽게 거들고 나섰다.

“은하 누나는 바로 옆 동네 가리봉동에 살고 있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우리가 안내해 주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될 일을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지”

기수와 경태가 순순히 협조해 준다고 나서자 얼떨결에 칼치 일당이 뒤따르게 되었다.


시장을 지나 대로변에 들어서자 칼치일당이 초조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바짝 따라붙었다.

이때 앞장선 기수는 느긋한 표정으로 이들을 안심시켰다.

“은하 누나는 빌라에 살고 있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기수가 염두에 둔 목적지 근방에 이르자 기수와 경태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칼치일당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십여 미터 전방의 대림파출소 앞에는 마침 2인 1조로 순찰 나가던 경찰이 순찰차에 타기 위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칼치가 걸음을 멈추고 분위기를 살피는가 싶더니 품속의 칼을 기수 옆구리에 들이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돌아서 다른 길로 가!”

다른 패거리 중 한 명도 경태의 옆구리에 칼끝을 들이대고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경태가 다시 능청스럽게 말한다.

“알았어 알았어! 빠른 길 놔두고 굳이 둘러서 가잔 말이지,

난 또 시간이 촉박한 줄 알았지,

그래그래 둘러서 가자고!”

이때 기수가 갑자기 화난 표정으로 큰소리로 말했다.

“아야! 아프단 말이야 새끼야! 그만 좀 찔러!”

이 돌발적인 상황에 칼치 패거리가 짐짓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드디어 기다리던 상황이 만들어지자 경태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강도야! 강도야!”

이 소리에 순찰차에 오르려던 경찰 두 명이 달려오고 있었고, 긴급 상황을 알아차린 파출소 내의 다른 경찰들도 쏟아져 나왔다.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서 황량한 대로변에서 도망자들이 몸을 숨길만한 공간은 마땅치가 않았지만 그들은 사력을 다해서 도망쳤다.

결국 칼치를 비롯해서 주동급 서너 명은 놓치고 말았지만 삼십여 분의 추격 끝에 칼치의 부하 세 명이 체포됐다.

그런데 수갑을 채우던 이들의 왼쪽 손목에는 예외 없이 산모양의 파란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이것은 장백산천지회를 표식하는 문양이었다.


사건조사를 받기 위해서 경찰서로 이송 중이던 순찰차 안에서 경태가 어디론가 급히 연락을 취했다.

“누나! 나 경태요, 놀라지 말고 내 애기 잘 들어요,

교수님을 해코지했던 그 천지회 놈들이 방금 누나를 찾았어요,

다행히 몇 놈이 잡히긴 했지만 이 자들이 이쯤에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가 않소,

빨리 매형한테 연락해서 대책을 세우는 게 좋겠소!”


경태로부터 장백산천지회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은하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사지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 배 교수를 저격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고, 남편인 윤 비서관을 덤프차로 치여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게 한 자들이다.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으로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지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윤 비서관에게 전화했다.


침착하게 은하를 다독거린 윤 비서관은 곧바로 국정원의 곽 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 같은 사정을 알 리 없던 곽 차장은 평상시와 같이 편안하게 응대했다.

“대통령님을 모시고 중국을 순방 중인 윤 비서관께서 어떻게 전화를 다 주십니까?”

“차장님, 방금 저희 집사람한테서 연락을 받았는데 국내에 잠입해 있던 천지회 패거리들이 우리 집사람을 찾아다닌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대통령님을 보좌하고 있는 윤 비서관이 표적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의 북경대 강연에 대한 경고가 목적이었다면 은하 씨에게 큰 위해를 가할 작정이었을 것 같은데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집사람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들이 이 정도에서 물러설 작자들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우리 요원들이 은하 씨를 최대한 잘 보호할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실력 잘 알지 않습니까?

여기서의 일은 우리한테 맡기시고 윤 비서관은 남은 순방기간 대통령님 모시는 일에 전력해 주세요,

그쪽 일도 만만치가 않아요!”

“그런데 차장님! 사실은 집사람이 지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됩니다!”

“혹시…”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천지회 쪽에서 은하 씨가 그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급적 이동을 줄여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당분간은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그쪽에 그대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곽 차장과의 통화를 마친 윤 비서관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에 내장된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여보 난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요,

당신을 노리는 자들은 우리 정부에 앙갚음을 하려는 자들인 것 같으니까 발각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겠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거기서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

윤 비서관은 거듭해서 은하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지만 은하는 오히려 윤 비서관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십여 년 전, 윤 비서관의 북경대 유학시절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아직도 애틋한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실 배 교수는 윤 비서관을 은하의 배필감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못난 한국 사람들이 연변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우리 동포들을 농락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이에 분개한 배 교수는 한국 사람들을 천민자본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결코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은하가 윤 비서관을 데려왔을 때 두 사람을 쉽게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딸의 행복을 바라던 자연인 아비로서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끝내 배 교수는 딸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켜보지 못하고 장백산천지회의 테러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지금 윤 비서관은 목전에 닥친 한반도전쟁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국땅에서 동분서주하는 대통령을 모시는 입장이다.

이런 비상한 시기에 한낱 가정사로 자신의 소임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지만 왠지 모를 불길한 조짐 때문에 좀체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위펑 당서기와 조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제안한 첫 방문지는 집안 시에 있는 국내성이었다.

대통령이 국내성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당서기는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예민한 시점에서 한국대통령의 고구려유적지 방문은 자칫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어 그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 수 있었다.

“서기장님! 제가 아직 광개토대왕릉비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유적지를 둘러보고 싶은데 어떻게 편의를 좀 보아주실 수 있을는지요?

다시 돌아오기도 번잡스럽고 하니 차라리 그 지역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바로 출국했으면 합니다”


당서기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승낙했다.

어제 북경에서도 이것저것 일정을 만들어서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것은 북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이곳 주변에 묶어두었다가 출국시키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마치 중국의 유물처럼 표현한 대통령의 용의주도한 발언이 위펑 당서기의 경계를 일순간 허물고 말았다.

그리고 다분히 골치 아픈 손님을 경쟁관계에 있던 길림성의 장 서기장 관할로 보낼 수 있게 된 점도 한몫을 거들었다.


위펑은 정치적 야심도 컸지만 한번 결단하면 일처리가 대단히 신속한 인사였다.

당의 긴급 연락망을 통해서 길림성의 당서기장에게 연락을 취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위펑 당서기가 마치 큰 짐을 벗었다는 듯 홀가분하게 한숨을 내어 쉰다.    


대통령일행이 국내성 입구에 도착하자 헐레벌떡 달려온 장더장 길림성 당서기가 진땀을 흘리면서 깍듯이 인사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던지 다수의 외신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장 서기장이 당황할 정도로 많이 모여든 기자들은 한국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윤 비서관은 대통령의 동선을 의도적으로 흘리면서 취재거리를 원하는 외신기자들의 먹잇감을 충실히 제공했다.


그런데 북경에서도 대통령의 동선을 세심하게 살피던 동북공정의 실질적 책임자 허밍친 원장은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준비된 한국정부의 사전 기획물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정되었던 확대정상회담을 거부한 채 한국대통령을 동북지방에 머무르게 한 것은 당국의 큰 실수라고 판단했다.

북미 간의 큰 전쟁을 앞둔 특수한 시점에서 한국대통령이 그 어떤 의도도 없이 한가로이 관광만 즐긴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것도 북경선언의 진앙지인 동북지방이 아닌가?

행여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위험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최근 달라진 중국의 정치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도 모택동 1인 통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등소평이 구축한 중앙정치국 7인 상무위원회가 작동하던 시절에는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왕조체제처럼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명실상부한 시 황제의 시대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시 주석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감히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대신 허 원장은 장백산천지회의 왕 회장에게 연락하여 한국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관찰하라고 지시했다.

혹여라도 한국 대통령이 승리자의 모습이 되어서 동북지방에서 출국하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대통령은 장대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던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마치 경외감에 도취된 사람처럼 양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하나의 잘 기획된 장면처럼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번쩍일 때 대통령이 또렷하게 말했다.

“바로 여기가 천년동안 중원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심장입니다!

나는 여기서 우리 민족의 힘찬 박동소리를 느끼고 있어요, 감개무량합니다!”


이제야 대통령의 의중을 알아차린 장 서기장의 얼굴빛이 새까맣게 돌변하더니 카메라의 표적을 피해서 서둘러 물러섰다.

잔뜩 화난 표정으로 관용차에 올라탄 후 어디론가 급히 전화했다.

누군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던 장 서기장이 무책임하게도 부서기장에게 대통령의 의전 책임을 떠넘기고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은 다시 남서쪽 이백 미터 지점에 장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던 광개토대왕 능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원대륙을 호령하는 거대한 태산의 모습이었다.

대통령이 돌계단을 따라서 능 위의 석실까지 올라가는 장면을 아래에서부터 카메라가 잡았다.

그런데 이런 각도에 잡힌 대통령의 모습은 광개토대왕 능과 어떤 일체감을 이루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북경대학에서 터트린 대통령의 폭탄선언을 고구려 최전성기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이곳 국내성에서 다시 한번 확실하게 다졌다.

오늘날의 길림성과 요령성 흑룡강성의 동북 3 성지역은 고조선부터 고구려 발해의 주 무대로서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고토가 분명하다는 한 편의 잘 짜인 이벤트처럼 보였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 양국이 최종적으로 합의한 국경선은 백두산에 세워진 정계비의 기록대로 ‘동위토문 서위압록’이 틀림없다.

백두산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대통합코리아연방의 국경선이 확실하니, 여기 동간도 일대가 우리 민족의 영토임을 전 세계를 향해서 외치고 있었다.

이 대담한 모습이 담긴 영상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를 향해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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