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의 장맛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7월 말,
보위부 차량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검정색 중형 승용차가 이 밤중에 평양 시내를 들어섰다.
자정 무렵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출발하여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두 시간 내내 차창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평양을 방문하는 국가안보실장과 윤 비서관이 일부러 이런 척박한 날을 선택했던 것은 미국의 감시망을 따돌리려는 남북한 당국의 고육지책이었다.
핵탄두를 장착한 죽음의 백조 B1B가 어제도 북한 동해상을 유유히 날면서 무력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지하 65미터의 벙커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 있어 정 위원장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미국의 전략폭격기가 최근 들어서 더욱 자주 출현했다.
이것은 북한 지도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미국이 가진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이었는데 이럴 때 우리 정부의 특사가 평양을 방문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형식적인 외교관례 따위는 일체로 생략한 채 제1호 청사로 알려진 노동당본관 지하주차장으로 곧바로 직행했다.
호위사령관의 안내로 정 위원장의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정 위원장을 정점으로 기라성 같은 북한의 권력실세들이 포진해 있었다.
최근에 정치국상무위원으로 등극한 정숙과 림광철 정찰총국장 그리고 박철 보위부장이 남쪽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최 실장에 대한 북측의 신뢰는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최 실장은 민 대통령의 복심과도 같아서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대북특사로는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최 실장이 정 위원장에게 직접 전달한 파란색 파일 속에는 에이포 용지 한 장에 쓰인 민 대통령의 친필 편지가 담겨있었다.
정 위원장이 자신의 집무책상에 앉아서 대통령의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여섯 명의 남북인사들은 정 위원장의 얼굴표정만을 주시하면서 경직된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숨소리마저 느껴지지 않는 긴장감이 1호 청사 집무실안의 공기를 팽팽하게 흡입했다.
많은 글자가 쓰인 편지가 아니었음에도 이십여 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정 위원장의 눈동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편지만 쳐다봤다.
미국의 선제공격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남북한의 전면적인 여행자유화조치를 제안하는 내용이었고 사십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선례는 있었다.
1989년 11월 10일부터 동독이 시행하려던 여행 간소화 행정조치는 결과적으로 동독의 완전한 몰락으로 귀결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위험한 조치를 남한의 대통령이 제안했고 이에 대한 첫 반응을 지금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보이려는 상황이었다.
물론 다른 북쪽 인사들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삼십여 분간이나 파란색 파일 속의 편지만 응시하던 정 위원장이 파일을 가만히 접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안의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지 의식적으로 미소까지 띠면서 일행들을 응접소파로 안내했다.
정 위원장이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사령관의 지휘로 신속하게 찻잔들이 놓였다.
정 위원장 특유의 컬컬한 목소리에서는 친서 내용의 심각성이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이 새벽에 먼 길 오시느라 고생들이 많았습니다!”
정 위원장이 찻잔을 들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도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이 차의 빛깔이 참으로 곱지 않습니까?
백두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녹차를 채집해서 우려낸 진짜배기 백두산 야생녹차란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윤 선생!”
정 위원장이 윤 비서관을 콕 찍어서 친근감을 드러내자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은 적잖이 놀랐다.
정 위원장은 20년 전 동북아역사재단의 팀장이던 윤 비서관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다 장백산천지회의 보복테러를 당한 사실까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 장군님께서도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윤 선생의 활약상을 높이 치하하셨는데 제게 남기신 유훈이 뭔지 아십니까?”
정 위원장이 갑자기 유훈애기를 꺼내자 모두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중국을 경계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정 위원장은 지금 북측인사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 말에 당황하는 자를 색출하겠다는 듯 온통 주의를 기울였다.
정 위원장의 이런 행동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서 대물림된 일종의 습관이었다.
북한의 자주의식은 고구려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주의식을 반대하는 사대주의자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쥐새끼들처럼 지천에 숨어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야음을 틈타 중국과 내통하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고구려의 자주성을 꺾으려는 역당들을 발본색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 늘 이렇게 경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 윤 비서관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동북공정 이야기가 화재거리로 등장한 후 어느새 방안의 팽팽하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훈훈한 공기로 채워졌다.
윤 비서관은 참으로 오랜만에 백두산 야생녹차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의 장인 배 교수의 채취를 느꼈다.
평생을 고지식한 민족사학자로서 꼿꼿한 삶을 살다가 이십 년 전 장백산천지회의 테러로 죽임을 당했다.
뼛가루나마 백두산에서 잠들기를 원하여 그의 유골을 천지에 뿌려주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정 위원장이 소환했다.
“혹시 편지 내용의 최초 제안자가 윤 선생이신가요?”
예상치 못한 정 위원장의 돌발 질문에 윤 비서관은 머뭇거릴 새도 없이 그렇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정 위원장이 윤 비서관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질문했을 때 윤 비서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윤 선생은 현재의 우리 공화국과 당시의 그 나라와는 다르다?
그래서 다 잘 될 수 있으니 까짓것 한번 해보자 뭐 그런 뜻인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서 윤 비서관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머뭇거린다면 과거 동독의 실패를 답습할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여행자유화를 제안하는 의도를 의심받을게 분명했다.
확신에 찬 어투로 ‘예’라고 답변했지만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정 위원장이 윤 비서관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냐고 따지듯이 묻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직까지는 이 치명적인 논란거리를 자리를 함께한 북측 인사들과 공유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윤 비서관은 지금 정 위원장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왠지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았다.
역시나 윤 비서관에게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정 위원장의 태도에서 남쪽 인사들은 크게 안도했다.
사실 윤 비서관 나름으로는 북한 지도부가 듣기 좋은 요식적인 설명거리를 준비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애당초 흡족한 설명이란 불가능하였기에 확실히 치명적인 논란거리가 분명했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행히 정 위원장의 생각도 남쪽인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했다.
정 위원장이 답배 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들었다.
이때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보위부장이 잽싸게 일어나 자신의 라이터를 켜서 정 위원장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시종일관 문 입구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곽 사령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정 위원장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행위 또한 최고 존엄의 신변을 경호하는 자신의 중요 임무인데 감히 박철이 그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다.
남쪽손님들을 배려하느라 니코틴의 흡입 타이밍을 놓쳤던 정 위원장으로서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길게 배출한 정 위원장이 이번에는 다소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쪽에서는 미제가 우리 공화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독도 전쟁 때 우리가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공화국의 핵무력 앞에서는 미제의 항공모함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 위원장의 이 말에 북측 인사들이 동시에 파안대소를 하면서 동의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특히 눈물까지 흘리면서 다소 과하게 행동하는 박철 보위부장의 행동은 확실히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남쪽 손님들의 입장이 애매해졌다.
함께 박수를 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난처했다.
남쪽손님들의 난감한 처지를 눈치챈 정숙이 나란히 편 두 손바닥을 무르팍 위에서 까닥이자 장내가 다시 차분해졌다.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발언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사람의 지목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경직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깟 미제의 공격이 두려워서 그 결과조차 예단할 수 없는 이런 제안을 우리가 수용하리라고 생각한 겁니까?”
정 위원장의 방금 이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북측 인사들은 거의 동시에 동공이 커지면서 불문곡직 정 위원장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여동생만큼은 유일하게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철은 필요이상의 과격한 표정을 보였다.
바로 이때였다.
무슨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윤 비서관이 정 위원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대단히 위험한 돌직구 발언을 날렸다.
“위원장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입니다, 인민들을 믿어보시죠!”
정 위원장으로서는 흡수통일의 음모를 가장한 남측의 기만책이라며 적대감을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윤 비서관이 내뱉은 말이 ‘인민들을 믿어보시라’는 말이었으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는 대단히 불쾌할 수 있었다.
자칫 자신의 인민을 불신하는 지도자에게 던지는 훈계로 곡해될 여지도 있었다.
대북특사 자격으로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최 실장으로서는 방금 윤 비서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은 전혀 계획에 없던 생뚱맞은 말이었다.
최 실장은 간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고 얼마나 긴장했으면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편 이번에도 입장은 달랐지만 북측 인사들의 표정이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최고지도자에게 불경스러운 태도로 지껄이는 남측 인사에 대한 적대감으로 들끓었다.
그 순간 정 위원장이 왼손으로 테이블을 ‘탁’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 위원장의 돌발행동에 나머지 인사들도 거의 반사적으로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간 정 위원장이 담배연기를 패속 깊이 들이마신 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의외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으흐흐흐 새로운 길을 가보라!
오직 우리 인민들만 믿고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다시 돌아선 정 위원장이 이번에는 최 실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난 미제가 일으킬 그 어떤 형태의 전쟁에 대해서도 남쪽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두렵지가 않아요,
미제의 본토가 우리보다 수십 배는 크다고 해도 우린 그들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만큼의 핵무력을 보유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난 자동적으로 내 책상 위의 핵버튼을 누르게 될 겁니다!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장군님께서도 날 이 세상에서 가장 뱃심이 두둑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셨는데 실제로 내 심장은 쇳덩이처럼 단단하단 말입니다!”
최고지도자의 이 말에 이번에는 정숙까지 가세하여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북측 인사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고 이번에도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오버 페이스 하는 박철이 단연 압권이었다.
남쪽의 두 손님들이 이런 어색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을 때 정 위원장이 자신의 집무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파란색파일을 펼친 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큰 희생과 우리 국토의 파괴입니다,
미제와 우리 공화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을 치르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전쟁의 결과는 양쪽 모두에게 회복이 불가능한 생지옥을 선물하게 될 것인데 승자가 없는 처참한 지옥을 말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윤 비서관이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 최고지도자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끼어든다는 것은 북측 인사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히 위험한 끼어들기였다.
“위원장님! 남과 북이 힘을 합친다면 전쟁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안이 과학적으로 백 퍼센트 안전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이 시점에서 남과 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후대에 위원장님께서는 위기에서 우리 민족을 구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받으실 겁니다!”
지금 이 발언은 윤 비서관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확실히 과도한 발언이 분명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리낌 없이 흘러나왔다.
뜻밖에도 남쪽인사로부터 민족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극찬의 말까지 들은 정 위원장은 호방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차창 밖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남측손님들이 탄 검정색의 세단 승용차는 앞뒤로 보위부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쉼 없이 내달렸다.
정 위원장으로부터 명쾌한 확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려가 계시라’는 말속에서 고민해 보겠다는 대답이 담겨있었다.
남북간의 전면적인 여행자유화 조치는 사실상의 국경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북의 입장에서는 자칫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모험이다.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다 하더라도 결코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정 위원장으로서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명색이 북한이 자랑하는 왕복 4차선의 중추 고속도로라지만 관리상태가 부실하기가 짝이 없었다.
움푹 파인 도로를 그때그때의 땜질만으로 보수공사를 하다 보니 전체적인 노면상태가 고르지 않아 확실히 시속 팔십 킬로 이상은 무리였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승용차는 시속 칠팔십 킬로를 오르내리며 한 시간쯤을 내달리고 있었다.
이 밤을 극단의 피로 속에 노출시켰던 두 사람은 몰려오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북녘 땅을 달리고 있다는 경계심 때문인지 옅은 선잠만 반복될 뿐 온전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흐릿한 윤 비서관의 머릿속으로 오늘 새벽녘에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들이 몇 조각으로 나뉘어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만일 정 위원장이 사십 년 전 동독의 실패를 지금의 북한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는 근거를 물었더라면 참으로 난감할 뻔했다.
삼일특공대의 정책보고서에는 자유통행 초장기에는 남북당국의 통제범위를 웃도는 규모의 이동이 이루어지겠지만 차츰 안정을 찾을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삼일특공대는 사만 여명에 이르는 북한이탈주민을 주목했다.
이들은 이미 한국에 정착하여 살면서 광범위한 내부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고향사람들에게 남북한을 비교 설명할 수 있는 능력집단으로 보았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한에서의 삶은 그들을 치열한 경쟁에서 뒤처진 2등 국민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북쪽사람들의 의식을 냉철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독을 마냥 유토피아로 인식했던 당시 순진했던 동독인들과는 확연히 다를 것으로 진단했다.
비몽사몽간에 차가 커브 길을 도는지 몸이 우측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고속도로를 벗어나 비포장 샛길을 달려갔다.
삼십 여분을 더 달렸을 때 어느덧 이제는 전조등을 켜지 않고서도 시야가 확보될 정도로 어둠이 물러갔고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차가 한적한 숲 속의 어느 군부대 막사 앞에 당도하자 저만치서 방금 도착한 군용 헬기 한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애써 죽이고 있었다.
이 새벽 안에 서울로 귀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어떤 협의절차도 없이 예정에 없던 방문지로 들어서게 된 남측 손님들은 본능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불안해하는 남측 손님들을 차에서 내리게 한 보위부 요원들을 따라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두어 시간 전까지 평양에 함께 있었던 박철 보위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두 분 어서 오시라요! 평양에서는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나누었습니다,
나는 공화국의 보위부장 박철이요!”
최 실장과 악수를 나눈 박철이 갑자기 격하게 끌어안는 지나친 친절까지 베풀면서 남쪽손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최 실장보다는 작은 키였지만 단단한 체격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는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인 보위부에서만 잔뼈가 굵은 그의 이력을 잘 말해주었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그가 말한다.
“공화국 대원수님의 명령으로 최 실장 선생한테 직접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 내 이렇게 급히 날아왔지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보위부장이 오른손으로 최 실장의 왼손을 확 끌어 잡더니 순식간에 부대장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 사이에 부관 한 명이 잽싸게 문을 닫아버렸다.
졸지에 윤 비서관은 부관실에서 몇몇의 부관들과 함께 대기하는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을 떨어뜨려 놓기 위한 박철의 농간이 분명했다.
부관의 책상맞은편 한켠에 볼품없이 휑하니 놓여있던 철재의자에 앉은 윤 비서관은 순간적으로 걱정이 몰려왔다.
박철 보위부장의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십중팔구 최 실장을 통해서 그 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의도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대장실 앞은 물론이고 윤 비서관의 주위를 부관들이 둘러싸면서 철통 같은 경계가 시작되었다.
최 실장은 이 새벽에 급작스럽게 발생한 상황들로 인하여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두꺼운 안경 속에 비친 눈알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였다.
최 실장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혈압 약을 꺼내고 있었을 때 마침 부관이 들어와 탁자 위에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최 선생! 그 뭐시기 약이요?”
최 실장이 순식간에 혈압 약을 입속으로 털어 넣자 보위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독극물이라도 먹은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본시 혈압이 일정치 않아서 가지고 다니는 혈압강하제입니다,
갑자기 혈압이 올라와서 약을 먹었습니다”
그제야 박철이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면서 면박을 주듯이 하는 말이다.
“난 또 뭐라고! 최 선생도 몸무게를 좀 줄이시라요,
몸관리를 그렇게밖에 못하니 혈압이 제멋대로 미쳐서 날뛰는 것 아니 갔습니까?
난 말입니다, 자신의 몸뚱이 하나도 똑바로 관리하지 못해서 흐느적거리면서 걷는 자들을 보면 당체 수긍이 가지를 않아요!
그렇게 기본기도 못 갖춘 인사들이 무슨 큰일을 한답시고 나대는지 납득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최 선생!”
가만히 듣고 있던 최 실장이 기가 막혔던지 헛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이 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겉과 속이 다른 박철의 실체를 목격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박철도 자신의 발언이 과했다고 판단했던지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말에 무슨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오해 같은 건 하지 마시라요, 자 자 커피나 듭시다!”
보위부장의 권유로 커피 한 모금을 마셨을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진한 커피의 효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다운되었던 혈당을 급속히 끌어올리면서 지친 심신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박철이 탁상 위에 놓인 밤색 가방에서 황색서류봉투를 조심스럽게 꺼내더니 최 실장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최 선생! 우리 공화국의 대원수님께서 남조선대통령께 전하시는 답신서요”
“오호 그래요, 그렇잖아도 빈손으로 내려가기가 허전했었는데 잘됐습니다!”
파일이 담긴 서류봉투를 최 실장이 정중하게 받아 들었을 때 일반적인 서류봉투와는 확실히 달랐다.
고급 소가죽 재질로 만든 황색의 서류봉투로서 봉투 속에 담긴 직사각의 파일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특수 봉투였다.
그런데 봉투의 겉 표면에 부착된 단추 두 개가 어딘지 모르게 느슨한 감이 들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손으로 만져 보았을 때 왠지 꽉 닫히지 않은 미세한 느낌이 들었다.
최 실장이 힘을 주어서 닫아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닫히지 않았다.
“그냥 놔두시라요! 원래는 딱 소리가 나면서 닫히는 건데 단추가 불량인 모양이오!”
명색이 북쪽의 최고지도자가 남쪽 대통령에게 보내는 답신서가 아닌가.
한눈에도 최종 수신인만 열람하기를 바라는 정 위원장의 보안 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단추가 불량하다는 박철의 말에서 최 실장은 뭔가 개운치 않는 감정이 교차됐다.
“알겠습니다! 우리 대통령님께 잘 전달하겠습니다!”
가냘프게 뜬 눈으로 이리저리 최 실장을 훑어보던 박철이 그 답지 않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요 최 선생!
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남조선에서는 어째서 우리 공화국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새로운 길을 낭패 없이 잘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오?
먼저 시도한 나라는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도 어째서 우리는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오?
내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는 성미라서 물어보는 것이니 최 선생이 편이 좀 봐주시라요!”
커피가 입에 맞았던지 입맛을 다시며 커피 잔을 내려놓던 박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최 실장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가 입을 벌렸을 때 드러난 금빛 어금니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다소 거만하게 앉은 자세며 팔짱을 낀 채 하대하듯 말하는 폼새며 일국의 특사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최 실장의 성품이 워낙 점잖은 선비 형이라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40년 전의 당시 동독상황과는 시대적 상황이 다르고 또 북한의 현 체제가 충분히 안정되어 있어 능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는 겁니다,
그 부분은 나보다는 윤 비서관이 더욱 정통하니 불러서 한번 물어보시죠?”
윤 비서관을 불러보자는 말에 보위부장이 정색을 하며 제지하는 것을 보고서야 최 실장은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40년 전이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그래서 동독은 체제가 무너졌단 말이지,
그때와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더라도 우리 공화국은 거뜬히 버텨낼 수 있다면…
고거이 대체 뭐시기 말입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휴전선을 걷어내자는 말이지 아님매!”
당황한 최 실장이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보위부장이 삿대질까지 하면서 최 실장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똑바로 말해 보시라요!
지금 당장이라도 휴전선 장벽을 걷어내지 않으면 뭘 어쩌겠다고 우리 대원수님을 겁박한 겁니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판단한 최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치듯이 보위부장에게 말했다.
“난 지금 우리 정부를 대표하여 방북한 특사신분이요,
그런데 보위부장께서는 날 한낱 하찮은 시중잡배 대하듯 하시니 돌아가는 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문제 삼겠습니다!”
갑자기 부대장실 안에서 최 실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밖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기 중이던 윤 비서관이 부관들을 밀치고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어쩔 수 없이 부관들도 황급히 뛰어 들어왔지만 보위부장이 호방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최 선생! 덩치보다는 성질이 급하십니다 그려,
궁금해서 몇 마디 물어본 것인데 뭘 그렇게 언쟎게 생각하고 그러시오? 무례했다면 용서하시오!
내 본시 화법이 직설적이라서 오해가 있었던가 본데 그만 역정을 푸시고 자자 우리 같이 아침식사나 하러 갑시다!”
그러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함께 나가기를 권했으나 최 실장이 정색한 표정으로 보위부장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쏘아붙였다.
“우리의 일정이 그렇게 한가롭지가 않습니다!
우린 가던 길을 재촉할 테니 이제부터는 우리의 가는 길이나 막지 마시오!”
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저 멀리 떠나가는 검정색 세단을 멀찍이 바라보던 박철의 눈빛이 적대감으로 이글거렸다.
앞뒤로 보위부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남쪽을 향한 차량이 한 시간 가까이를 더 달렸을 때 개성에 진입했다는 도로 표시판이 지나가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당도했어야 할 거리를 아침 햇살이 눈부시도록 북녘 땅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윤 비서관이 가방을 어루만지면서 황색봉투에 담긴 파일을 느껴봤다.
어떤 답변이 들어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정 위원장의 판단 여부에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가 끔찍한 핵전쟁 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기적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만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최악의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량이나 수준으로 볼 때 한반도를 넘어서 그동안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통째 파괴할 수도 있다.
단 한방으로 독도전쟁을 종결시킨 NK차르봄바급의 수소폭탄들이 쌍방으로 날아든다면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하게 될 터인데 그전에 이 위험한 치킨게임을 멈추게 해야 한다.
미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며 정 위원장은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치킨게임에 임하는 자의 만용일 뿐 내심으로는 그도 이 끔찍한 전쟁을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치킨게임의 결과는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는 대재앙이 분명하기에 그로서도 회피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먼저 브레이크를 밟아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한반도가 작금의 이 위기상황을 극복하여 기적적으로 전쟁을 회피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평화통일이라는 위대한 전리품까지 챙길 수 있음을 은연중에 말하면서 말이다.
삼일특공대는 제2단계의 한반도실행계획으로 진입할 때까지는 가급적 통일을 암시하는 발언을 자제하자고 주문했지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두 정상 간에는 처음부터 솔직한 마음으로 상호 교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의 요청에 대한 답변이 지금 이 황색의 봉투 안에 담겨있었다.
드디어 경의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가 눈앞에 다가왔다.
활발하게 돌아가는 개성공단의 상황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입출경하려는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 출입구의 북쪽지점에서 범상치 않은 장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십여 명의 장정들이 마치 먹잇감을 찾는 장산곶매의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공터에 대기 중인 헬기의 시동이 완전히 꺼진 것으로 봐서는 꽤 오랫동안 기다렸던 모양이다.
드디어 그들이 찾던 사냥감을 발견했던지 장정들이 양 사방으로부터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놀랍게도 표적은 남쪽 손님의 차량을 앞뒤로 호위하던 보위부차량이었다.
신속하게 두 차량을 둘러싸더니 강제로 운전석과 조수석의 차문을 열어젖혔다.
보위부 요원들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던 이들의 가슴팍에 나붙은 인공기배지를 통해서 이들이 북한의 또 다른 권력기관 소속임을 짐작케 했다.
손쓸 틈도 없이 제압 돼버린 보위부 요원들이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차에서 내리자 이내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보위부 요원들이 저항하기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운전석에 올라탄 장정들이 차량의 방향을 돌려서 그들의 일행이 대기하던 공터로 몰아갔다.
우역곡절 끝에 이제 막 입경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또다시 예정에 없던 황당한 상황에 부닥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이 서로를 바라볼 때였다.
방금 일어난 이 쇼킹한 사태의 책임자인 듯한 중년사내가 웬 서류봉투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다가왔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서류봉투를 들고 있는 폼새만 아니었다면 체형이며 걸음걸이가 대단히 거만한 자세였다.
이 중년의 사내보다도 한 발짝 앞서서 걸어오던 사내가 재빨리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서류봉투를 가슴에 안고 조심스럽게 차에 오른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두 남쪽손님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벽녘까지 정 위원장의 집무실에 함께 있었던 림광철 정찰총국장이었다.
“공화국을 찾아온 귀한 손님들을 놀라게 해 드려서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수다!
우리 공화국 대원수님의 답신을 급히 가지고 오느라 다소 소란스럽게 되었소”
윤 비서관으로부터 황색의 서류봉투를 건네받은 최 실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위원장님의 답신은 여기 이렇게 이미 받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굳은 표정의 림광철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이 가져온 황색서류봉투를 최 실장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귀측에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측의 사정으로 대원수님의 답신서가 바뀌게 되었소,
들고 계신 것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것이니 그냥 돌려주시오!”
최 실장이 윤 비서관을 바라보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건네받은 황색 서류봉투를 면밀하게 만지작거리던 림광철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기렇치! 뜯어봤구먼, 이 반동 새끼래 내 그럴 줄 알았지!”
한 시간 전, 최 실장이 박철로부터 서류봉투를 건네받은 직후부터 단추가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정 위원장의 답신서를 박철 보위부장이 임의로 뜯어봤다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하는 증거가 바로 두 개의 단추였다.
최근 박철의 이상 행보를 유심히 관찰하던 림광철 정찰총국장이 사전에 정 위원장에게 보고하면서 오늘 그에게 미끼 하나를 던졌다.
정 위원장의 답신서가 담긴 서류봉투의 단추는 한 번 열리게 되면 두 번 다시는 닫히지 않는 특수단추였다.
그 사정을 알 리 없던 박철이 정 위원장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박철이 열어본 정 위원장의 답신서에는 북남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평이한 내용들 일색이었다.
이 답신서의 내용만으로는 남쪽의 제안사항을 파악할 수 없었던 박철이 최 실장을 통해서 세부내용을 알아내고자 그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림광철이 남쪽손님들에게 겸양쩍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아무렴 남조선의 대통령께 드리는 우리 공화국 대원수님의 답신서인데 이런 고장 난 봉투에 담아서야 돼 갔소?
방금 내가 전해준 그 봉투 속에는 우리 대원수님의 각별하신 의지가 담겼으니 잘 전달해 주시라요,
최 선생! 윤 선생! 그럼 우리 다음에 또 봅시다!”
볼일을 마친 림광철이 차에서 내리자 남쪽손님을 태운 검정색의 중형 승용차는 마치 고단한 땅을 속히 벗어나고 싶다는 듯 쏜살같이 출입구를 빠져나갔다.
남쪽 손님들의 떠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림광철이 헬기에 탑승하기에 앞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휴대폰을 공손히 든 채 한참을 그렇게 긴장된 자세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림광철의 이런 모습은 정 위원장에게 통화할 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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