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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an 30. 2023

제사보다는 생일파티를!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한 삼 년쯤의 이별도 대단히 아쉬울테다. 그런데 십 년이나 백 년보다도 더 아득한 영원한 이별을 맞이했다면 그 침통한 슬픔의 심정을 어찌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럴 때 누군가 다가와 영혼은 살아있다며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해준다면 살짝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과학적인 사실여부를 떠나서


단지 그리움을 표현할 하나의 방편으로서 혼령이라는 비물질과 그들끼리 모여서 산다는 별도의 공간이 상상되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해마다 죽음을 맞이했던 기일 내지는 명절과 같은 아주 특별한 날에 한해서 잠시 현실 세상을 다녀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상상 속의 허구가 아닌 과학적인 팩트라면 제사를 대하는 후손들의 마음가짐은 대단히 특별했을 것 같다. 살림살이가 다소 궁핍하다 할지라도 제사상의 준비만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집안의 큰 행사가 될 것은 자명하다. 음식을 흠향하는 이는 조상님의 혼령이 될 테니 평소 조상님께서 좋아하시던 음식을 차례상에 올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또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손 치더라도 웬만하면 참석하여 조상님의 혼령에 절하고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지 않겠는가? 살짝 후손들의 안위를 부탁하면서.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실제로 일어날법한 상황과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를 분간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육체를 구성하던 원자들이 분해되어 본래 왔던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죽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인생이 존재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의 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과학을 이해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비과학적인 옛 문화들의 설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미래세대인 MZ세대들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가해지는 비과학적인 혼령 문화의 강요는 어지간한 곤욕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전통과 미래의 가치관 사이에서 절묘하게 끼여 있는 우리 세대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만만치 않음이다. 전통문화의 취지를 잘 지켜나가면서도 앞뒤 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지혜로운 소통을 고민해 보았다. '있다고 치자'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혼령문화를 대신할 과학적이면서도 참신한 새로운 문화를 고민하던 중 번쩍하면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성현들의 기념일은 왜 죽음의 날짜가 아닌 그 반대의 의미를 지닌 탄생의 날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의 생일날은 온 세상 사람들의 축제로 승화시켰지만 장작 그분들의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결국 대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 실제로 제사음식을 흠향할 혼령이 있다면 모를까 단지 그리움을 표현할 방편으로서 가정된 것이라면 시대에 맞게 개선하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라고 판단했다.


몇 년 전 우리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 군림하던 아이들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설픈 물리주의자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또 다른 결단을 단행했다. 명절 차례상의 허망한 관습을 혁파했으니 굳이 돌아가신 날짜를 기념하려는 오래된 의식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던 거다. 그래서 해마다 기억하게 될 어머니의 기념일을 달리 정하기로 결정했다.


돌아가신 날짜가 아니라 태어나신 생일날에 맞추어서 생전처럼 생일잔치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비록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이지만 설날과 추석 다음으로 현재 우리 집안의 3대 명절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케이크에 꽂을 초의 개수는 딱 하나면 충분하겠지만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소고기 미역국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가족으로서의 정을 되새기게 된다.


누구라도 죽음의 날짜를 기분 좋게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테지만 태어난 생일만큼은 대단히 기분 좋은 날짜임이 분명하다. 굳이 좋지도 않은 죽음의 날짜를 기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분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축하해 주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처럼 말이다.

 

가까운 미래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나 또한 어김없이 본래 왔던 그곳인 대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후에도 매년 우리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나의 생일날을 축하해 준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짠해진다. 물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증손자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무방하겠다. 그냥 명절날 차례식을 올리면서 ‘우리를 이같이 행복한 세상에 나게 해 주신 조상님의 은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종합적으로 퉁치더라도 난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 같다.


남과 나를 구분하던 이슬방울 같은 자아는 이미 냇가로, 다시 강으로, 또다시 바다로 흘러들었으니 무슨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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