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도강 Aug 29. 2022

25년의 자화상

6.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아침 여덟 시경, 오늘은 평소보다도 삼십 분이나 이른 시각에 출근했지만 웬걸 사무실 앞 나의 전용 주차 자리를 무단 점용한 차량이 있었다.

호기롭게 도 그 차량의 바로 코앞에 내 차를 정차시키고 눈치 없이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흰색 구형 승용차를 매서운 눈매로 살폈다.

그런데 차량의 운전석에 웬 낯선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고 난 거들먹거리는 품새로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나보다 얼추 열 살은 많아 보이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신사를 쏘아보면서 오른손으로 차창을 내려달라는 손짓을 취했다.  


“여기 이 자리는 25년째 우리 부동산 중개사무실의 전용 자리거든요! 죄송하지만 다른 자리로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난 지금 일종의 관습법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인데 마을 주민들이나 인근의 상인들은 평소 잘 아는 처지니 그들에게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는 가끔씩 들리는 외지인일 테고 대부분 군소리 없이 비어있는 다른 주차 칸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중년 신사는 달랐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마을 공동주차장에 전용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나도 이 마을 주민인데 비어있으면 아무라도 주차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한번 해보자는 수준이었다. 자신도 이 마을의 주민이라고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내가 모른다면 필시 최근에 이사 왔다는 말인데 어쨌든 지금 이 중년 신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땅도 아니고 법적으로 인정받은 전용 주차 자리도 아니니 경쟁자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할 말이 없는 입장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백 년 전부터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였다고 헌법재판소도 인정한 관습법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좌우지간 여기는 내 자리니까 나중에 볼일 다 보고 차 나가실 때 우리 사무실로 와서 말해주세요, 그때 차 빼드릴 테니까!”

그것으로 내 차의 잠금장치 버튼을 누른 후 바로 앞에 위치한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와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우리 마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구 전체에서도 개업 일자로는 넘버 투를 자랑하는 25년 위용의 포스가 주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버린 중년 신사가 사무실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까 옆에도 빈자리가 많이 있네요, 차를 이동시킬 테니까 사장님! 차를 좀 빼주세요!, 다음부터는 다른 자리에 주차하겠습니다!"   

“아 그러시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오늘도 거의 반 강압적으로 내 전용 주차 자리는 지킬 수 있었지만 관습법에 근거한 나의 25년 권위는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이사 온 사람들은 이 말도 안 되는 관습법을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이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되는 과정이 있다.

도전을 하겠다면 회피하지 말고 상대해 주어야 한다. 가장 최근에 내게 도전장을 던졌던 열혈 청년들은 일 년 전 길 건너 창고를 임차하여 새로 이사  젊은 직원들이었다. MZ 세대답게 그들은 고리타분한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나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출근시간이 나보다 빠른 경승용 모닝 한 대가 앙증맞은 품새로 꽤 오랫동안 나의 자리를 차지했고 난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그 코앞에 주차한 후 태연히 업무를 봤다. 부동산 사무실 업무의 특성상 수시로 손님들과 현장을 돌아봐야 하기 때문에 차를 넣고 빼기가 불편하다면 업무에 지장이 초래된다.

그래서 전용 주차자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주변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하는 수없이 무언의 의사표시를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앞 부동산 사무실의 차량임을 알리는 명함을 부착한 후 관습법상의 점유권을 주장하는 강력한 의사표시 행위에 돌입하는 것이다.

눈치 없이 남의 전용 자리를 차지한 차량의 바로 코앞에 주차하는 일명 '명함 알리기 작전'인데 바로 옆자리에 빈자리가 있든 없던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제는 젊은 직원들이 점심시간에는 모닝을 이용하여 식사를 하러 가야 했는데 나에게 차를 빼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난 잔뜩 심술이 난 불퉁한 표정으로 모닝이 빠져나간 나의 전용 칸을 확보하는 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무려 몇 달이 지났을 때 드디어 모닝이 먼저 손을 들었고 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에서 다른 곳에 주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순순히 물러날 열혈 청년들이었다면 MZ세대가 아니라는 듯 또 다른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언제 주차를 하였던지 그 회사의 일 톤 트럭이 이른 아침부터 마치 시위하듯 나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고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그 코앞에 차를 주차시켰지만 그다음 날 출근했을 때 까지도 트럭은 꿈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이것은 분명 나의 25년 권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으므로 나로서도 대응의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길 건너의 회사 마당으로 걸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덩치 큰 젊은 직원이 노려봤다.

“나 여기 부동산 사장인데 내 자리에 주차한 차량이 여기 차 맞지요?”

청년은 작심을 한 듯 호기롭게 대꾸했다.

“마을공용주차장인데 어째서 사장님 자리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무라도 먼저 주차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옆에 빈자리가 많은데도 꼭 그 자리만 고집하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이 대목에서는 나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25년 타령이 자동으로 시작되었다.

“이것 보세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 자리는 주차장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25년 동안 우리 사무실의 전용 자리였어요!

그 옆자리가 20년째 지게차 사무실을 운영하는 김 사장 자리고요, 그렇게 각 상가들 마다 딱 한 대씩만 주차하기로 서로가 약속이 되어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상가들 마다 있는 대로 다 주차해 버리면 정작 마을 주민들이 이용할 자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합의해서 지켜오고 있는 일종의 주차장 운영 규약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이 젊은 친구가 피씩 웃으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것을 우리가 왜 따라야 하는데요? 복개천 위에 만들어진 공용주차장이면 아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땅 주인도 아닌 사람들이 자기 땅처럼 행세를 하는 겁니까?”

부지불식간에 내 목소리가 딱 세 배로 커져버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구먼! 각 마을마다 오래된 관습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법인데 갓 이사 온 분들이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알았어요! 이 문제는 마을 차원에서 논의할 수밖에 없겠군요!”


마을 차원에서 대처하겠다는 나의 엄포에 문제가 커질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젊은 친구가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직원별로 여러 대의 차량을 주차하고 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문제를 확대시켜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지금 차를 빼려고 했어요!"

주차장으로 이동 중인 청년을 향해서 부지불식간 나의 넘치는 마무리 공격이 이어졌다.

“땅주인도 아니면서 주인 행세한다고 했지요? 우리 사무실 전용 주차자리는 내 땅이 맞으니까 앞으로 그쪽으로는 주차하면 안 됩니다!”

“사장님 땅이 맞다고요! 그럼 다음에는 꼭 문서를 한번 보여줘 보세요? 땅 주인이 맞는지 확인 좀 해보게요!”

“내 땅인지 아닌지가 궁금하다면 우리 부동산 사무실로 찾아오세요, 언제든지 보여줄 테니까!”


물론 이후에도 이 도발적인 젊은 친구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지 않았고 나의 25년 권위에 맞서려는 그 어떤 도전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내 땅이라고 자신 있게 큰소리쳤던 것은 다소 빈약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법에도 20년 이상을 평온하게 내 땅이라는 의사로 점유를 했다면 비록 등기부에는 등재되지 않았더라도 소유권을 인정받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말미함 나로서도 전혀 할 말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이걸로 만족하자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