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에게

일단 미소짓기로 했다.

by 가을


지하철 문이 닫히고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민은 돌아가는 길에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들어보라고 했다.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그댄 내게 말을 안해요
허면 그대 잠든 밤 꿈속으로 찾아가
살며시 얘기 듣고 올래요 _숙녀에게 중

‘비포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의 전화통화놀이 장면이 떠올랐다. 아까 함께 본 비포의 최애장면이었다. 이들은 절친과 통화하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솔직한 마음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전했다. 상대와 눈을 너무 가까이 맞대면 특정 시점 이후부터는 초점이 흐려진다. 초점이 흐려지는 걸 경계하는 편인데 ‘비포’에서나 ‘숙녀에게’에서의 마음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흘려보내는 잠꼬대도 옮겨 적고 싶은 마음이겠지.

셀린의 옆자리 사람들이 싸우지 않아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다른 기차를 탔더라면 둘을 마주치지도, 셀린이 비엔나에 가지도 않았을 거다. 민과 그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았더라면, 도서관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 때 박카스를 건네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영화도 없었을 거다.

‘사랑’이란 단어를 제외하고 사랑을 말하는 건 뭘까. 움켜쥐고 있던 심장이 녹는 느낌, 마음이 무장해제 될 것 같은 느낌. 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안정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채워진 느낌. 보글보글 마음이 끓는 느낌. 사람의 마음이란 마녀의 마법 솥단지 같아서 취향 가루들을 이것저것 넣어도 언제고 요상스런 형태가 될 수 있다. 오늘의 마법 솥단지에는 봄의 산들바람 냄새가 나는 연한 분홍색의 것이 있다. 언제 색이 변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일단 아름다운 것에 미소지으며 바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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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