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사랑은 질색한다. 좋아하는 거면 좋아하는 거고 안 좋아하는 거면 마는 거지. 애매한 관계를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다. 친구 주머니에 넣어야 할지 연인 주머니에 넣을지 고민되어 애석하게 구슬만 만지작대다가 한번 연인 주머니에 넣어보면 여긴 아니었구나 하고 다시 친구 주머니로 옮겨 담게 된다.
애매한 관계는 짝사랑에서 시작된다. 짝사랑을 하는 이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비밀스럽게 스며드는지와 받는 상대는 얼마나 마음이 동하는지, 알아채고도 고민하는지, 알아채지도 못하는지 그것의 싸움이다. 그것에 따라 기분이 매일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기도 하고 우연히 먹은 청양고추처럼 얼얼하게 매운기가 한참을 가기도 한다.
나에겐 잔향이 오래가지 않는 향수 같은 사람이 있다. 그는 별 중요하지 않은 과제도 내용을 꽉꽉 채워오는 사람이었다. 다들 한 번씩 늦는 7시 반 아침 운동에 한 번을 안 늦었다. 언젠가 보면 글씨를 잘 쓰고 싶다며 글씨교정 책을 사서 연습하는가 하면, 이전에 스쳐 지나가면서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는 세심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럿이 모이면 말을 줄이기에 눈길이 가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사람.
같은 기숙사에서 살았기에 시험기간에 자연스레 어디에서 공부하는지 언제 공부할 건지, 운동은 언제 가는지 등의 일정을 맞추고 밥도 같이 먹고 밤엔 카톡으로 서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몇 시간씩 얘기 나누다 잠에 들었다. 가끔씩 드는 생각은 '그래서 이게 무슨 관계야?' 하는 것이었고 가만히 돌이켜보다 의문이 드는 지점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제안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게 나를 계속 알쏭달쏭하게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왔다.
그에게 동기 J와 B에 대해서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며 뒷산에 산책 나가려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기대된다며 따라 나왔다. 산을 오르는 내내 나는 J-B 얘기를 했다. 같은 과 동기가 커플이 된 얘기 말이다. 산 정상에 오르고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다
"그래서 대박적인 얘기는 뭐야?"
"음.. 사실 J랑 B얘기 아니야.
그게.. 요즘 내가 너를 대하는 게, 너한테 감정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아? 근데 너의 반응이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좋아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넌 도대체 어떤 마음인 거야?"
그냥 뱉어버렸다.
"음.. 나는 뭐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있어서~.."
당황한 그는 아무 말이나 하고 봤다.
"미안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돌려서 얘기하는 거야.."
"음.. 그래.. 알겠어."
황급히 상황을 마무리하고 산을 오를 때보다 좀 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내려왔다.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앞장섰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걸었다.
‘산에 엄청난 비밀을 묻어두고 내려오는 기분이다. 그치?‘
‘그러게..’
기숙사 중앙현관에서 우린 쿨한 인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선 그날의 그 장면이 계속 재생되었다. 얼굴은 몇 번이고 더 화끈거렸는데 한편으론 이제 마음 정리해도 되겠다 하는 속 시원함도 있었다. 결말을 모른 채로 누군가를 계속 좋아하는 건 감정 소모가 많은 일이다.
다음날 아침 운동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저어 멀리서 그의 단짝과 한참을 얘기했다. 아마 내 얘기였겠지. 나중에 들어보니 그를 뒷산에 데려가기 며칠 전 그는 나와 연애하는 개꿈을 꿨다고 한다. 그에겐 더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혹은 나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했을 수 있다. 아님 계속해서 고민하다 놓치는 사람이거나. 그렇게 우리의 운동시간은 점차 엇갈려갔다.
애석하게도 한 달 뒤 나는 그의 절친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얼마 뒤, 그도 과후배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여자친구를 내 졸업작품 전시회에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그의 갈색 구슬은 친구 주머니 저 아래쪽에 자리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