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11)] 필리핀에서 다섯 달 살기
공포의 물갈이
2017년 2월.
대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시간은 약 3시간 30분 정도였다. 마닐라 공항에 내리니 무덥게 내리쬐는 햇살이 반겨주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두 명의 사제 지망 형제들과 함께였다. 우리는 마닐라에 있는 신학원에 도착해서 다른 형제들을 만났다. 날씨는 무덥고 벌레도 많고 적응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달부터 셋째 달까지는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마닐라에 있는 한국선생님들이 개원한 어학원에 가서 평일 동안 공부를 했다. 수능 영어 공부 이후로 처음 다시 시작한 영어 공부라 그런지 쉽지 않았다. 수업방식은 두 시간 문법 수업, 단어 시험 그리고 한 시간 회화 수업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겪는 새로운 공부라서 그런지 매일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던 도중, 한 달 정도 지났을까?
학원에서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화장실에 갔는데 물이 쏟아져 나왔다. 뱃속을 비워도 배가 계속 아팠다. 나는 단순히 어제 먹은 음식을 떠올리며 배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증상은 하루가 아니라 3일 동안 지속되었다. 밤마다 잠이 들지 못하고 진짜로 10분 간격마다 화장실에 가서 앉아있었다. 함께 지내던 형제들은 나를 위해 흰 죽을 쑤어 주었고, 배를 따뜻하게 할 온열배게도 빌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탈은 가시지 않고 4일째가 되어 오히려 악화되었다. 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38도를 웃도는 미열이었지만, 배탈과 함께 겪으려니 위아래로 말도 안 되게 고통스러웠다. 필리핀은 병원비가 꽤 비싼 편이라고 해서 나는 최대한 안 가고 싶었다.
"자, 들어! 너는 팔 잡고, 넌 다리 잡아!"
열로 인해 정신없던 내가 들은 형제들의 대화내용이었다. 형제들은 화장실 욕조에 찬물을 한가득 담아놓고 나를 그곳에 넣으려고 했다. 나는 상황판단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미 형제들은 내 두 팔과 두 다리를 잡았다.
"봐봐, 아직도 열 있네... 더 올랐어".
팔을 붙잡은 형제 한 명이 말했다.
'풍덩!'
나는 너무 차가워서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제들은 내 열이 갑자기 올라서 체온을 낮추고자 냉수마찰을 시킨 것이다.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형제들이 30초 정도만 참으라며 붙잡았다. 3시간 같은 30초가 지나고, 욕조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도 냉수마찰은 꽤 효과가 있었다. 열이 거의 내려갔다. 아픈지 5일째였던 그날 밤에 처음으로 밤에 잠을 조금 잤다. 대부분의 형제들은 내가 아픈 이유가 '물갈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물갈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나는 스스로 면역도 좋고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외에 나가면 이런 경험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어학원에 결석을 했다. 아픈 동안 쉬었던 학원 일정은 많은 숙제들이 되어 돌아왔다. 필리핀에서 극심한 물갈이를 겪으면서 몸조심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나를 도와주었던 형제들을 기억하며 오늘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