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를 가득 채운 침묵마저 끝없이 놓치는 기분이다. 문득, 깨닫는다. 침묵의 바닥에서 올라갈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올라갈 ‘방향’ 자체가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희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은 손을 뻗는 순간마다 멀어지고, 빛이 아니라 착시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한다.
환상의 멸종을 마주한 뒤, 나는 조금 더 가파르게 낙하하기 시작한다. 바닥이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음은 흩어지고, 어느 지점이라도 붙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손은 헛되이 허공만 쓸어내린다. 다다를 수 없는 잔혹한 희망에 오늘에 놓인 모든 것들이 뿌예진다. 바로 앞에 있는 듯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단 한 발자국도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 미세한 간극이 무너짐을 더 깊게 파고든다.
간극 앞에서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조차 하염없이 낙하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멈춰 있지 않는데,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상태. 추락이 곧 정지이고, 정지가 곧 추락처럼 느껴지는 모순 속에서 서서히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희망이 닿을 수 없는 자리에서 희망의 기척만으로도 무너져 버린다. 어쩌면 희망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의 심연보다 더 깊고 잔혹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살아간다’는 말 자체가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와 살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점점 더 빠르게 떨어지고, 그 떨어짐의 속도를 제어할 힘조차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낙하의 끝이 어디인지, 혹은 끝이 있기나 한 건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계속 떨어진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아무도 모르는 방향으로 모든 빛과 온기가 조금씩 이탈해 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그 추락의 한가운데서 나는 또다시 깨닫는다. 절망은 폭발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아주 천천히 삶의 가장 깊은 곳을 잠식하는 긴 파동이라는 것을.
이제 그 파동 속에 사로잡혀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존재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