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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섬 Jun 06. 2022

미아

나를 찾다.

또다시 그 꿈을 만났다.




대학에 다시 입학을 했다. 애쉬 브라운 컬러의 S컬 웨이브, 등까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유난히 햇볕에 반짝거렸다. 아이보리 색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허리에는 H버클이 달린 사피아노 소가죽 벨트로 포인트를 주었다.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은 벅차올랐다. 게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피아노 전공이라니. 당연히 신발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세련된 디자인의 은빛 킬힐이겠지.

......

하지만 나는 어울리지 않게 회색 밍크 장식이 달린 검은색 겨울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




나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음침하고 허름한 폐교 안에 서 있다.

그곳에는 결혼 이후 연락이 소원해진 초등학교 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정화야! 유경아! 희전아!"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다. 그들은 서로에게 눈길을 떼지 않고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 셋도 보였다.

“은정아! 재경아! 현자야!”

이번에도 큰 소리로 친구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보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수다에 열중하느라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친구들은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도 한 번씩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때는 웃음기가 싹 빠진 싸늘한 표정으로.


종종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각자 아이를 키우고 생활하기 바쁘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더군다나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까지 챙겨줄 마음의 여유는 서로가 없었던 듯하다. 들에게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궁금하고 그리웠던 친구들이기에 서운한 마음이  컸던 나는 서둘러 레슨을 받으러 지정된 강의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나서자,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복도가 펼쳐졌다. 그 길은 폭이 좁고 길었으며 끝이 보이지 않아 목적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양옆으로 회색 페인트가 얼룩진 여닫이문이 징검징검 보였다. 그 문을 열고 당장이라도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음산한 공기가 복도 전체를 메웠다. 걸음을 떼기도 전에 긴장이 되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극한 공포심에 가야 할 길을 올곧이 보지 못하고 바닥과 신고 있는 신발에 의지하면서 이 길의 끝을 찾아 나는 천천히 첫 발을 내디뎠다.


얼마나 걸었을까. 먼발치 나무벽 갈라진 틈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다가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옅은 불빛은 점점 그 범위가 커지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이 눈앞펼쳐졌다. 숨이 조금 쉬어졌다. 나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얼른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그곳에 강의실은 없었다. 도로에는 무지개색 고급 세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사람들은 앞만 보고 바삐 걸어갔다. 아무도 내 목적지에는 관심이 없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았다. 낯설고 화려한 도시에서 미아가 된 나를 도와줄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레슨 시간에 쫓긴 나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피아노 레슨실이 어디예요?"

용기를 내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모든 것이 생략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그 사람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도움을 주고 싶어도 선뜻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놓고 기대했던 답이 안 나오자 나는 다시 절망의 늪에 빠졌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잡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곳의 사람들처럼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걷고 무작정 걸었다. 걷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이제 좁은 골목길 어귀로 들어선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래된 집들이 즐비하다. 낡은 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빨간 깃발이 보였다. 영락없는 무당집이다. 어떤 집 문밖에는 생선 대가리와 막걸리 한 사발, 과일 쪼가리가 놓인 사자밥 한 상이 보였고, 어떤 집엔 상을 당했는지 근조 등이 걸려 있었다. 옆집에는 사내 아기가 태어난 듯 빨간 고추와 숯을 노란 새끼줄에 엮은 금줄을 대문에 매달아 놓았다. 이 동네는 한 집 건너 한 집에 근조 등 아니면 금줄이 매달려 있었다. 생과 죽음이 빈번히 교차하는 섬뜩하고 희한한 동네라고 생각했다. 골목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사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머리 위로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었다. 몇 시쯤 됐을까. 벌써 날이 거무스름하다. 이곳에도 나의 강의실은 없었다.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끔찍한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제 더 갈 곳이 없다. 눈앞에 세 갈래길이 나왔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지만 이미 지쳐버린 영혼은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내 안에 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디를 가려고 이 길을 나섰는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모든 것을 새까맣게 잊은 듯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이제 길도 잃고 나도 잃은 처절한 미아가 되어 버렸다. 이 지긋지긋한 미로에서 빠져나가려 나는 가장 밝은 골목으로 앞만 보고 내달렸다.  

나를 잃은 미아가 나를 잊은 미아가 되지 않도록 나에게 나를 찾아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 싸인 성터와 마주하고 있는 나. 내 위치를 알아야 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성터를 기어 올라갔다. 성터 밑은 흑백 사진처럼 전체가 회색빛이다. 낡은 판잣집이 몰려 있었지폐가인 듯싶었고 푸른 나무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온통 암흑인 곳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나 혼자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래로 아래로 뛰는 것뿐이다. 나는 돌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을 참고 뛰고 또 뛰었다. 무섭게 속도가 붙었다. 어느새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양팔에 날개를 단 듯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붕 뜬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염없이 돌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갑자기 내 뒤를 바짝 쫓는 알 수 없는 형체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멈추고 싶어도 잡히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뛸 수밖에 없었다.


나를 잃은 것도 모자라 나는 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꿈, 목표, 이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시커먼 물체가 나를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잡힐 듯 말 듯 검은 물체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스산한 기운이 풍기는 검은 물체가 내 등을 확 덮쳐 버렸다. 몸부림을 치던 나는 스텝이 꼬여 그만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때 신고 있던 검은 모카신이 벗겨지며 장식으로 붙어있던 회색 밍크가 반쯤 떨어져 나갔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남편의 번호를 미친 듯이 눌렀다. 반복해서 눌러도 자꾸 이상한 번호만 눌러지고 신호가 걸리지 않았다. 검은 형체가 내 목을 감싸고 힘을 실어 조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잠겨버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상황을 벗어나려 몸부림쳐보지만 ‘으으윽’ 짧고 작은 신음 소리만 터져 나왔다.




요란하게 흔드는 남편의 손놀림 덕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또 비슷한 꿈을 꾸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꾸는 악몽. 이번엔 대학이었다. 전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조회를 마친 후 교실을 못 찾아 학교 체를 헤매고 다녔다. 얼마 전에는 중학교 체육시간에 체육복이 없어 이 반에서 저 반으로 체육복을 빌리러 다니다 결국 빌리지 못해서 체육복을 입지 못했다. 밤새 학교에 다녀온 날은 몸이 무겁고 불길한 기분 때문에 하루 종일 한기가 서린다.




꿈은 솔직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내가 드러내지 못한 채 포장하고 넘어갔던 지난 일과 감정을 나 대신 제대로 꼬집어 주었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나를 멈추게 했다. 그렇게 한 번씩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다. 꿈은 억눌러서 불편했던 내 무의식을 끌어다 투영했다.


'내 안에 상처가 들어있구나'

'지금 난 힘들구나'

'내 마음이 불안하구나'

'내 심기가 불편하구나' 


꿈을 꾸면서 나의 현재를 알아차렸다.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나에게 쉴 틈도 주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내가 나를 잃지 않도록.

내 안에서 길을 헤매는 미아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나를 완전히 잊지 않도록.





돌아가야 하는 나 쉬운 길은 없어서
돌고 돌아가는 길 그 추억 다 피해
이제 도착한 듯해
이젠
<미아 - 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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