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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Jul 11. 2023

설악산의 푸른 수박

서리 맞은 열정과 감성

 며칠째 찜통더위로 온 집안이 뒤끓는다. 이런 날은 에어컨 바람도 이를 덜덜 떨리게 만드는 얼음 빙수도 성에 차지 않는다. 시원한 수박 몇 조각이면 이 한더위를 물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지만, 여름 수박은 나의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대학 시절 어느 해 여름이었을 것이다. 의상학을 전공하는 친구와 함께 설악산 캠핑을 떠났다. 시원한 개울가 옆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더위를 식혀줄 큰 수박도 한 덩어리 사서 차가운 개울물에 담가 두었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넓적한 바위에 대자로 누워 계곡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푸른 밤하늘을 노래했다. 싱그러운 청춘의 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젊은 가슴속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문득 개울가에 담가 둔 수박 생각이 났다. 붉은 열정을 꼭꼭 숨긴 채 의연하게 푸른 옷을 입고 있던 수박, 칼을 대자마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상큼한 수박 향기가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붉은 속살을 한 입 베어 물자 사르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그때의 그 달콤한 수박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앉은자리에서 수박 한 통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그날 이후 수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름밤은 태양의 뜨거움과 계곡의 차가움과 수박 향의 상큼함으로 채색된 한 장의 그림처럼 남아있다.      

 

 신혼 시절에는 가끔 남편이 퇴근길에 수박을 사 들고 오기도 했다. 얼기설기 엮은 비닐 망에 수박 한 덩어리 담아 오는 날은 내 마음에서도 시원한 얼음폭포가 흐르는 것 같았다. 둘이 다 먹어 치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보관해 둘 냉장고도 옹색했던 신혼 시절, 반쪽은 항상 주인아주머니께 드렸다. 문제는 남편이 골라오는 수박은 늘 설익어 밍밍한 맛을 냈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색시는 잘 골랐는데, 수박은 왜 하필….’하고 핀잔을 주면,

‘두들겨 보아서는 도시 그 속을 알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여전히 그는 지금까지도 수박에는 문외한이고, 그렇다고 허리가 부실한 내가 사 들고 올 수도 없는 형편이다. 큰 수박은 여전히 내게는 무거운 존재다. 가끔은 작은 애플수박이나 잘라놓은 수박을 사보기도 하지만 큰 수박에서 풍기는 향과 씹히는 감촉은 따라갈 수가 없다.      


 오늘도 수박이 당긴다. 수박들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다. 군침이 돌지만 포기하고 만다. 어쩌면 설악산 개울가에서 밤새 젊음을 이야기하며 함께 나누어 먹었던 그 수박의 맛은 이제 영원히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만 남아있다. 그 시절의 수박처럼 붉었던 열정도 차가운 이성도 그리고 달콤한 감성까지도 이제는 모두 현실에 서리 맞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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