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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운 Mar 30. 2022

3. 매력적인 그 이름, 만년필

솔직함에 대하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모두가 아는 그 시, 나태주 시인의 '풀꽃'   

어떤 대상을 자세히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것보다 그 대상의 깊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바라보기 시작하자, 나에게 깊은 매력을 뿜어내며 다가왔던 그 이름, 만년필.     



만년필과 나의 추억이 시작된 것은 내가 26살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신인 배우 생활을 하다가 25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단풍이 떨어질 무렵, 군에 입대하였다. 그래서 만년필과 처음 마주한 26살의 나는 겨우 일병이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군에 갔기에, 비장한 다짐을 하고 갔던 기억이 난다. "난 21개월 동안 책 100권 읽고 나올 거야." 그런데 이등병 시절에는 도저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이등병이라는 계급은 딱히 하는 게 없어도, 이상하리만치 바쁘고 분주한 오묘한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일병이 되니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할 여유가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매일 같이 책을 읽고 나만의 독서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군대에서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내가 군 생활을 하던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독서노트를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손 글씨를 써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재밌는 것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예쁘게 쓰고 싶어.. 글씨..’ 독서노트를 누구 보여주려고 쓰는 것도 아니지만, 예쁘게 쓰고 싶었다. 군인은 원래 예쁜 걸 좋아한다. 짧아서 만질 것도 없는 머리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만들 수 있을지 매일 같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더 예쁜 피부를 갖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처럼 PX에 들어오는 신상 수분크림을 수집하듯이 구입하여 모든 제품을 다 써보는 게 군인이다. 그래서 글씨마저 예쁘게 꾸미고 싶었나 보다.

  

결국 나는 휴가 기간에 만년필을 구입했다. 만년필을 고르는 기준은 매우 심오했다. 가성비?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가미(美)비. 가격 대비 예뻐야 했다. 무조건 예뻐야 했다. 너무 아저씨 느낌이 나도 안 되고, 너무 10대 느낌이 나도 안 되고, 군인 같으면? 이건 정말 심각하게 안 되고. 결국 오랜 고심 끝에 나는 세일러(Sailor) 사에서 나온 ‘하이 에이스 네오’라는 제품으로 만년필과의 첫 추억을 쌓아가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도 썼다. 만년필과 함께 독서노트 7권을 썼으니. 내게 만년필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오늘 책상에 앉아 있던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나의 만년필들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있는 만년필들, 가방에 있는 만년필, 정장 포켓에 꽂혀있는 만년필. 이 불편한 만년필들을 나는 왜 아직도 쓰고 있을까? 구체적으로 어떤 장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왜 만년필을 쓰는지 궁금했다. 찾아보니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로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었다. 글씨가 예쁘게 써져서, 손이 덜 아파서, 다양한 잉크를 사용할 수 있어서. 충분히 이해되는 이유들이었다.     



오늘 나는 왠지 정말 솔직한 이유를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멋있어서.”


6년 정도 만년필을 사용한 나를 돌아볼 때, 내가 만년필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낸 이유는 사실 엄청 단순했던 것 같다. 글씨를 예쁘게 쓰고 싶어서 처음으로 구입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만년필과 나의 6년간의 추억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냥 멋있어서 쓰는 거다. 내가 노트를 펼쳐놓고 만년필로 글씨를 쓰고 있으면, 멋있어 보이니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고, 질문해왔고, 신기해했다. 난 그게 좋아서 만년필을 계속 썼다. 어려서부터 관심받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관종 정재운에게 만년필의 매력은 이거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남들이 왜 만년필을 쓰냐고 물어올 때마다 이처럼 솔직하게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없었다. “글씨가 부드럽고 예쁘게 써져서 써요. 만년필을 관리할 때 마음이 편해지는 무언가가 있어요. 장시간 글씨를 써도 손이 아프지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참 어설프고 얄미운 대답들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포장한 대답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우습다.


냉정히 따져볼까? 사실 다른 펜으로도 만년필로 쓰듯 신경 써서 쓰면 충분히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다. 만년필 관리? 귀찮다. 만년필 세척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건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손이 아프지 않다? 요즘 시대에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손이 아플 만큼 손 글씨를 쓸 일이 생길까? 그런 일? 없다. 적어도 나의 삶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이렇게 포장해왔던 것이다. 만년필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차마 “멋있잖아요.”라고 씩 웃으며 당당히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멋있음이 재빠르게 도망칠 것 같아서.

   

어쩌면 이런 포장들은 내가 나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는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되어왔던 것 같다. 단순히 만년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만년필 외에도 다양한 것들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만큼 쓸데없는 이유들을 만들어내야 하니 머리를 짜내야만 했고 얼마나 바빴겠는가? 그러는 사이에 내가 가진 솔직한 감정과 생각은 미처 파악하지도, 돌아보지도 못했다.


되지도 않는 이유를 만들어내느라 머리를 쓰는 것보다, 나 자신을 더 정확히 알아가기에 힘쓰는 시간을 갖고 솔직해지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것이 나 자신에게 훨씬 더 이로웠을 텐데.      



그래. 이렇게 떠들어놓고도 남들이 물어보면 어차피 "멋있잖아요."라고 대답하진 못하겠지. 나는 또 이상한 이유를 둘러대고자 하겠지. 그래도 이제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자. 난 만년필이 단순히 멋있어서 좋은 거라고. 만년필을 쓰면 사람들이 나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갖기 때문에 그게 좋아서 쓰는 거라고.


비록 여전히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매력적인 그 이름, 만년필

자세히 보아도 멋있다. 오래 보아야 멋있다. 관종인 나에게 만년필 너는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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