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한 삶이 좋아 Sep 26. 2022

느린 봄의 미학

더디게 봄이 왔다. 나만 기다린 봄은 아니겠지. 화창한 볕에 홀린 듯 가벼운 차림으로 외출하려다 녹록치 않게 감도는 냉한 기운이 있어 걸음 되돌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내가 기후의 카오스를 호되게 겪는 중에도 자연의 시간은 이미 내 곁에 순서대로 와있다. 어느덧 노란 산수유도 개나리도 홍매화도 가까이서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름 모를 풀들의 새싹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서서히 높아지는 기온으로 나의 차림새도 한결 가벼워져 간다. 곧 꽃물결이 일렁이고 국토가 술렁일 것이다. 반면 예기치 않은 일도 벌어졌다. 안타깝게  수일간 동해안을 아우르고 있는 산줄기가 화마로 들끓었고, 그 곳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던 이들의 고통스런 신음이 언론 매체를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해 결국 산야도 사람도 벌거숭이 민낯으로 되어 버렸다. 하지만 거친 비바람이 휩쓸고 간 곳도 이내 꽃천지로 바뀌면서 사나운 맹수의 울부림처럼 들끓던 시름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지는 듯했다. 


따스한 봄볕이 가득한 텃밭 주변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냉이를 캐기 위해서이다. 쑥은 너무 어려 좀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 한줌의 냉이가 오늘의 수확량이다. 마트나 시장에 가면  살 수 있는데 고생스럽게 그러냐고 하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성직자들이 노동을 통해 수련을 하듯이 나 역시 그렇다. 처음엔 먹을려고 그리하였다. 하다보니 생각이 정리되고 느린 걸음으로 밭두렁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 신기하게 조급함이 사라졌다. 한발 뒤로 물러나니 느낌이 다르다고나 할까. 시야가 달라진다고 할까.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냉이 하나하나 캐고 흙을 떨어내고.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지만 그 파장의 영향은 대단하였다. 명상하듯 시간이 흘러간다. 급하지 않게. 그냥 머리 속이 비워진다. 캐온 냉이를 잠시 물에 담가 둔다. 냉이에 묻어 있는 흙이 불려져 잘 씻겨진다. 경험치에서 나온 노하우랄까. 세척 시간이 줄어든다. 또한 나의 수고로움도 줄어든다. 맛있게 먹는 것은 덤이다. 냉이 된장국, 냉이 만두, 냉이 무침으로 나는 봄의 맛을 만끽한다.


고운 빛깔로 바깥이 채워진다. 그 황홀경은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지친 일상에 위로가 되고 가슴 한켠에선 생기가 돈다. 3년 전 형성된 내가 사는 동네는 해가 갈수록 꽃과 나무가 풍성해져 간다. 목련, 벚나무,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 철쭉, 배꽃 등등 시간차를 두고 봄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온다. 마을 조경을 위해 옮겨 심은 것들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자리를 잘 잡고 있어 보인다. 다행이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봄꽃들의 향연을 즐길 수 있어 감사하다. 동네 마실로도 봄날 한자락이 충분히 즐겁다. 


공원 잔디밭을 뛰어 다니는 어린아이들, 졸업 사진을 찍기 위해 무리 지어 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안타깝게 코비드19로 인해 지난 2년여 시간이 멈춰 있었다. 그 멈춤으로 우리네 삶은 훨씬 뒤로 옮겨진 상태이다. 그로 인해 회색으로 점철된 일상은 우울감으로 물들어 버리고 소통마저 단절시키고 있다. 이제는 달라지려나. 어린 세대들의 생기로움이 눈에 들어 온다. 그들의 청아한 소리도 들려 온다. 이제 당연하다고 여겼었던 것들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할 것이다. 유행처럼 돌았던 소확행, 욜로가 어쩌면 특별한 일상이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경우엔 그렇다. 


텃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이 하나씩 발아되어 싹을 틔운다. 갈색 흙더미 위에 빼꼼이 등장한 새싹들이 반가워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다. 건강한 토양이 주는 선물이랄까. 이제 시간이 지나매 나의 황홀경은 여기서도 펼쳐질 것이다. 물론 나의 수고로움이 전제되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날마다 물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솎아주는 일은 루틴처럼 해야 한다. 성실함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일구는 이의 발자국 소리나 숨소리를 듣고 작물은 큰다고 하니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4월은 작물들이 뿌리를 잘 내리도록 돌봐야 한다. 새순들이 서서히 돋아날 동안 나의 걸음은 부쩍 바빠질 것이다. 


새찬 바람이 분다. 잿빛으로 가득한 하늘색이 거리로 내려 앉는다. 예기치 않은 겨울 기운으로 사람들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졌다. 불과 하루 사이에 저멀리 가 있던 겨울이 한창인 봄을 미뤄 내었다. 쉽게 자리를 내 주지 않을 모양이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봄꽃들을 어찌할꼬. 20도를 상회하던 낮기온이 뚝 떨어졌다. 10도 내외로. 체감은 더 냉하다. 갑작스런 기후변화에 대처할 틈도 없이 설마하다 벌어진 일이 되었다. 더디게 더디게 와 있는 봄을 향해 겨울이 그리도 시샘을 하려는 것인가. 동이 트는 시각, 거실 통창문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빛은 그야말로 칙칙하다. 짧게 잠시 머물다 가려나 이 봄. 얼마 전 반팔 상의를 갈구하게 만들었던 낯의 따사롬이 그립다. 


씻어 놓은 쑥이 바구니에 가득하게 담겨 있다. 인근 텃밭 주변에서 한 시간여 쭈그리고 앉아 뜯었다. 가위로 쑥떡 자르고 그릇에 꾹꾹 눌어 담아서 채취하고 보니 그 양이 제법 많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요즘 텃밭에 물 주러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머리도 식힐 겸 봄나물을 채취하고 있다. 바로 조리해서 먹기도 하고 세척해 놓았다가 나중에 조금씩 꺼내 먹기도 한다. 지난 3월말부터 냉이, 씀바귀, 쑥을 캐온다. 요즘은 어린 민들레, 망촛대가 눈에 보이지만 채취하진 않는다. 딱히 정해진 레시피대로 조리하진 않는다. 전, 된장국, 된장찌개, 무침, 만두소 등등 나만의 레시피로 맛을 즐길 뿐이다. 마음가는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먹더라도 봄맛은 나를 그저 행복하게 한다. 다만 해가 갈수록 자연스레 자라나는 숫자가 줄어들고 있음이 안타깝다. (


쑥인절미를 해볼까. 여지껏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다. 시도하려는 마음은 유튜브 채널을 검색하다 계절 영향을 받아서인지 쑥떡에 관련된 동영상들의 노출로 생겨났다. ‘저 정도면 나도 무리없이 할 수 있겠다’는 무모함에 일단 시작했다. 마트에서 콩가루를 구입하고, 몇 시간 물에 불려 둔 후 물을 한동안 빼 놓은 찹쌀과 씻어 논 생쑥을 준비했다. 전기밥솥에 물을 붓고 찜기를 얹어 보를 깔고 그 위에 찹쌀과 쑥을 섞어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고 백미 코스를 눌렀다. 34분 후 조리된 상태는 덜 익어 보였다. 추가로 만능찜 코스로 30분간 더 익혔다. 이제 방아로 밥알을 쪄주면 된다. 예상보다 절구질은 험난했다. 내가 만만히 여겼던 것이다. 나의 착각. 밥알 으깨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끈적이는 상태라 힘이 더 들었다. 간 맞추기도 실패했다. 떡은 간이 관건인데 너무 싱거웠다. 짠맛도 단맛도 없었다. 그럭저럭 형태는 인절미로 보인다. 맛은 아주 건강하다. 떡집에 가면 쉬울 일을 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한가로운 봄날, 나의 행보를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막연함은 없어졌다. 다음에 다시 시도하면 더 나은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난 다시 시도하지 않는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렇게 아날로그스럽게 나의 봄은 흘러가고 있다. 남편은 떡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나마 맛있게 먹어주었다. 


걸음을 천천히 한다

주변의 꽃들이 바뀌었다

잠깐 머물다 간 것이다

형형색색을 이어가는 봄으로만 알았다

며칠 전 노랑빛 꽃이 있었던 자리에 그것이 없다

초록빛 풀 사이로 다른 빛깔의 꽃송이가 양기를 즐기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본다

오래도록 음미한다

이쁨이 이어지고 있고

내게도 그 이쁨이 퍼진다


오월 오일 어린이날, 나는 화원에서 메리골드 5포기와 스위트 바질 1포기를 구입했다. 방정환 선생님이 제정한 이날이 100번째날이란다. 나도 새싹을 심기로 했다. 신기한 일이다. 새로운 모종을 사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가는 길에서 나의 마음이 설레임으로 번지고 있었다. 새로운 손님을 맞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 형형색색 다양한 식물들이 모여 있는 화원에서 꽃집 아가씨와 간단히 나누는 대화로도 그 설레임은 증폭되어 간다. 돈을 지불하고 비닐 봉지에 담아 차에 실고 오면서 콧노래가 나온다. 텃밭 어디에 심을까 잠시 고민을 하며 서성거리다 정했다. 열무를 걷어낸 자리에 한 줄로 심기로 한다. 흙을 정리하고 간격을 띄우고 모종을 심었다. 초록초록한 중에 노란 빛이 중앙에 자리하니 제법 산뜻하다. 미리 알고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메리골드와 바질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이제 알아가야지. 결과물이 어떻게 되든 괜찮다. 나의 봄 걸음이 하나더 기록된다. 


오월 하순을 지나가고 있다. 곧 봄의 서정도 마무리 될 것이다. 싱그러움이 줄어들 것이고 화사함도 줄어들 것이다. 짙노란 개나리가 더 이상 눈에 담기지 않아 못내 서운하던 차에 뜻 밖에 또다른 짙은 노란색이 하늘하늘 거리고 있다. 금계국이 초록에 섞여 그 자태를 영롱하게 뿜어낸다. 반갑다. 자연의 순리에 감사함이 더 견고해진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들의 색채가 마음을 휘젓는다. 기분좋은 파동이 나를 에두른다. 올핸 유난히 많이 다채롭게 봄의 색이 줄지어 온다. 잰 걸음으로 봄을 질러 왔다. 봄볕에 그을리더라도 좋았다. 따스해서 좋았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를 찾아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