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사는데 못 보태줘서 미안해. 아들

by 윤구


2025년 11월 15일, 부동산 계약을 했다. 첫 내집마련이다. 계약하기로 마음을 먹고, 가계약금 1000만원을 입금하면서 손이 벌벌 떨렸다. 계좌이체 번호와 매도인의 이름, 이체 금액을 보고 또 보고 또 확인했다. 가계약금을 넣고나서도 벌렁거리는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지금 뭘 하는 짓이지, 이게 잘한 짓인가, 뭐 실수한건 없을까, 잘못 판단한 건 없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대출을 알아보니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정부는 가계대출을 줄이겠다고 규제를 계속 강화하고, 금리는 오르고, 어떤 은행은 올해 주담대 한도가 끝났다고 한다. 지난주까지 대출 가능하다던 은행도 일주일 만에 기준이 바뀌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잔금까지는 치를 수 있지만, 취득세며 중개수수료며 도배며 이사비며... 부수 비용까지 생각하면 아슬아슬했다.


와이프는 만약 대출이 적게 나오면 장인어른 도움을 받자고 한다. 사업하시는 장인어른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내가 부족한 돈 정도는 쉽게 빌려주실 수 있다. 하지만 간섭하고 잔소리하길 좋아하시는 장인어른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면 엄마와 아빠가 원망스럽다. 경기도 성남에서 평생 살았으면서도 남들 다 하는 부동산 투자 한 번 안 하고,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하나 없이 환갑이 넘어서도 월세로 사는 부모님이 이해가 안 됐다.


그나마 아빠는 2-3년 전 판교 아파트를 팔고 대출금 갚고 월세로 살고 있다. 판 가격에서 3억이 더 올랐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집값에 거품이 많이 꼈다며 잘 팔았다고 한다. 퇴직한 지 10년 가까이 되어 강제 전업투자자가 되었는데, 주식으로 돈 벌 위인은 못 되는 것 같았다.


장인어른께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빠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으면서도, 뻔히 돈이 없을 것 같은데 괜히 말 꺼내서 아빠의 남은 자존감마저 밟아버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밥값을 결제한다거나 용돈을 드리려는 시늉만 해도 정색하며 기분 나쁘다고 하는 사람이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이사 갈 예정이라 주소지도 바뀔 거라고 얘기도 해줄 겸, 등기부 등본 확인도 해달라는 어줍잖은 핑계로.


주식시장이 끝난 오후 5시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발신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 바로 아빠의 목소리가 나왔다.


"어쩐 일로 전화를 했나" "어 아니.. 나 이제 이사 갈 건데 궁금한 게 있어서"


어줍잖은 핑계지만, 전화할 당시에는 그럴싸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부동산 계약할 때 중도금을 거는 게 좋은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등기부 등본도 확인하긴 했는데 같이 봐줘."


20년 전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놓아서 등기부 등본에 빠삭한 아빠는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등기부 등본은 깔끔하네. 근데 전세계약에 무슨 중도금이야. 중도금은 필요 없지."


이제 본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좋은 타이밍이다.


"전세 아니고 매매 계약이야."


내심 이 다음에 나올 아빠의 말이 기다려졌다.


안 그래도 너 주려고 아파트 팔고 돈 모아뒀어. 또는 너 집 사게 되면 주려고 따로 빼둔 돈이 있어 등등…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아빠는 은연중에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니가 나중에 커서 결혼하고, 집 살 때 주라고 할머니가 모아둔 돈이 있어."

"할머니가 나중에 너 주려고 꽁꽁 숨겨둔 돈이 있어."


할머니가 얼마나 큰 돈을 모아두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얼마든 있긴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빠의 말은 내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아…매매야?"


목소리 톤이 갑자기 낮아지고, 속도가 느려졌다. 난처함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느껴졌다. 이 한마디에 나는 아빠가 도와줄 능력이 안 된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등기부등본 사진이랑 어느 아파트를 계약했는지 등등 간단한 정보만 주고받고 통화를 끝냈다.


그래 뭐, 대출 잘 나오겠지. 대출이 안 나온다는 것도 아니고, 혹시나 잘 안 나올까 봐 나 혼자 걱정하는 거다. 문제없다. 아주 약간의 허탈감이 오히려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문자 한 통이 왔다. 아빠다.


"니가 집을 산다고 하니 뿌듯하면서도 마음이 무겁다. 보태줄 상황이 되지 않아서 미안하네. 등기부등본 마지막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돈에 있어서 자존심이 강한 아빠가 이런 문자를 보내다니.. 갑자기 짠한 마음이 든다. 돈없는 부모를 원망하는 아들의 입장이 아닌, 돈 없는 아빠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본다.


무력하다. 한심하다. 부끄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빠가 능력이 안 된다는 걸 확실해진 뒤로는 오히려 전혀 원망스럽지 않다. 돈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내 아들이 만약 커서 큰 돈이 필요할 때, 내가 도와줄 능력이 안 돼서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떨까 또 한번 상상을 해본다.


나는 아빠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걸까. 내 새끼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지? 아이가 클 동안 20년 30년 동안 도대체 난 뭘 한 거지?


"보태줄 상황이 되지 않아서 미안하네"


아빠의 문자를 다시 읽는다.


20년 30년 뒤에 나는 아들에게 어떤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아빠가 되어 있을까.


"미안하다 아들.."


혹은


"집은 아빠가 해줄게."


정답은 명확하고, 시간도 충분하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방법이 문제다.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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