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와 술과 음악
점심부터 맥주로 시작한 하루는
이제 소맥의 달콤한 쓰림 속으로 미끄러진다.
내 손에서 탄생한 안주들이
잔 위의 거품과 함께 춤춘다.
엊그제부터 아내가 친구에게 들었다고 몇 차례 얘기했다.
"유성에 가면 '유린기'를 그렇게 잘하는 중국집이 있데"하면서 말이다.
중국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이렇게 얘기하니
괜히 신경이 쓰여 찾아봤다
그 요리 잘하는 집이 아니고 요리하는 방법을 찾아본 것이다.
'내가 만들어 주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토요일은 원래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떤 상황상
출근을 못하니 핑계 삼아 푹 쉬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내 생각에 토요일 대형마트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오늘 내가 그놈의 '유린기'를 만들어 바치리라 생각하면서..
닭다리 살과 양상추 그리고 고추잡채가 먹고 싶은 나는
피망에 눈길이 갔다. 하지만 와~ 엄청 비싸다
들었던 피망을 내려놓고 옆의 아삭 고추를 두 봉 들었다.
이게 삶의 현실인가 보다.
집에 돌아오니 11시
빨리 유린기가 먹고 싶다는 아내를 위해 시작했다
사실 내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던 건
언제부터인가 티비에 요리하고 먹는 먹방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시절이다
방송을 보면 나도 쉽게 요리를 접할 수 있겠다 싶고
아내를 위하고 가족을 위해서 시작했다
나의 요리는, 요리?라고 까지는 얘기 못해도
음식을 만드는 것이 취미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김치찌개부터 토속적인 기본음식은 모두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쉽지 않은 잡채까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 낸다.
아내가 좋아하는 소면(잔치국수)부터 여러 종류의 파스타,
스테이크 굽기까지..
오늘은 아내의 요구대로 점심에 유린기를 만들었다
물론 정통 요리는 아니고 약식의 간편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약식이긴 하지만 정성이 듬뿍 들어간 나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맛이야 음식점에서 파는 맛은 덜하겠지만 말이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냉장고 맥주를 주문한다.
크~ 이 정도면 반은 성공이다.
주말엔 혼술을 최고의 기쁨으로 위안 삼는 나는
안주 만든 김에 대낮에 맥주로 시작했다.
맛은 있어도 느끼해서 많이 못 먹겠다는 까탈스러운
아내가 남긴 음식을 안주 삼아 휴식을 만끽했다
어느새 4시가 넘고 시곗 바늘이 5시 10분 전을 가리킨다.
2차전의 시작이다
고추잡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피망 대신 아삭 고추와 집에 있는 청양고추를 섞어
채끝살을 돼지고기 대신 넣어 요리했다
와~ 역시 한우는 한우네.
부드럽고 입안에 감칠맛이 확 도는 게 이건 진짜 요리다 싶다.
소맥을 한두 잔 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취기가 오른다
음악이 절로 생각나는 감정의 순간이다.
말러의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음악은 나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죽음의 가장 아름다운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나는 음표 사이에서 정신줄을 놓는다.
밤은 깊어가고
달빛 아래 드뷔시가 내 귓가를 어루만진다.
흐르는 선율 속에서
나는 웃고, 울고, 취하고, 깨어난다.
모든 순간이 나의 것,
모든 감정이 나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