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와 라다
인도가 배출한 성자 - 불교 석가모니, 자이나교 마하비라, 힌두교 가우디파타, 샹카라, 미슈라, 미드바에 이어 이번 글에는 '차이탄야 마하프라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인도의 성자 시리즈는 타고르, 라마나 마하리쉬까지이다. 이 아홉 분의 성자, 성인들은 인도 출신으로 인류 정신세계의 지평을 마음껏 펼친 거룩한 영혼들이다.
차이탄야 마하프라부(1486~1534)는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 인도 벵골 지역에서 태어난 성자이자 사회 개혁가로, 가우디야 비슈누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박티 요가, 즉 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의 길을 대중화하고, 하레 크리슈나 마하 만트라를 통한 산키르탄 운동을 통해 인도 종교와 사회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크리슈나(Krishna) 신과 그의 최고 에너지인 라다(Rādhā)의 연합된 현신, 즉 스스로의 헌 애자로서 세상에 강림한 가장 자비로운 신의 화신으로 여긴다.
1. 출생과 어린 시절
본명: 비슈밤바라 미슈라
출생: 1486년 2월 18일, 벵골 술탄국 나바드위프 마야푸르 (현재 인도 서벵골)
부모: 아버지 자간나트 미슈라와 어머니 사치 데비는 실헷 출신의 경건한 브라만 가문이었다.
어린 시절 이름: 금빛 안색 때문에 가우르 하리 또는 가우랑가, 태어날 때 근처에 있던 님 나무 때문에 니마이라고 불렸다. 어린 니마이는 어려서부터 비범한 지성과 신동의 면모를 보였다. 그가 울 때 이웃 여인들이 "하리볼!"이라고 외치면 울음을 멈추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미래 사명을 예고하는 일화로 전해진다.
2. 학자 시절: 니마이 판디트
당시 나바드위프는 벵골의 지성적 중심지로, 산스크리트어 학습의 주요 거점이었다. 니마이는 8세경 학교에 입학하여 단기간에 산스크리트 문법과 수사학에 통달했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논리학자이자 학자였던 그는 니마이 판디트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6세 또는 17세경에 자신의 학당을 열고 많은 학생을 가르쳤으며, 때로는 나이 많은 학자들을 논쟁에서 꺾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3. 결혼과 영적 전환
첫 결혼: 라크슈미데비와 결혼했으나, 그가 동벵골로 여행을 간 사이 아내가 뱀에 물려 사망했다.
재혼: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요청으로 판디트 사나타나 미슈라의 딸인 비슈누프리야와 재혼했다.
가야에서의 시작: 17세경, 그는 학생들과 함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비슈누파의 산야시(출가자)이자 마다벤드라 푸리의 제자인 이스바라 푸리를 만나 영적 입문을 받고 크리슈나 만트라를 전수받았다. 이 만남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그는 학자로서의 냉정한 태도를 버리고 크리슈나에 대한 지극하고 열렬한 헌애자(박타)로 변모했다.
1. 나디아의 종교 운동
가야에서 돌아온 후, 니마이 판디트는 학문적 논쟁 대신 크리슈나에 대한 헌신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지식인들과 이미 비슈누 신앙을 갖고 있던 슈리바사, 아드바이타 프라부 등 다른 비슈누파 신자들과 연합하여 산키르탄 운동을 시작했다. 산키르탄은 거리에서 신의 이름을 합창하고 춤추는 집단적인 헌신 행위로, 차이탄야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었다.
하레 크리슈나 마하 만트라 : "하레 크리슈나 하레 크리슈나, 크리슈나 크리슈나 하레 하레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Hare Krishna Hare Krishna, Krishna Krishna Hare Hare Hare Rāma Hare Rāma, Rāma Rāma Hare Hare)"
그의 크리슈나 사랑은 매우 강렬하여 종종 황홀경에 빠지거나 기절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2. 출가 (산야사)
1510년, 24세의 나이에 차이탄야는 컷와에서 케샤바 바라티에게 출가 서원을 받고 크리슈나 차이탄야(Kṛṣṇa Caitanya)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젊고 유능한 학자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하는 산야시가 되어 종교적 사명을 완수하기 시작했다.
3. 인도 전역의 순례와 전도
출가 후 차이탄야는 6년 동안 인도 아대륙 전역을 여행하며 산키르탄을 전파했다.
동부 순례 : 그는 오리사의 푸리에 정착하여 자간나트 사원의 주신 자간나트 신을 숭배하며 말년을 보냈다. 푸리는 그의 주요 활동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는 라마난다 라야 등 중요한 제자들을 만났다.
남부 순례: 남인도를 여행하며 여러 순례지를 방문하고 많은 학자와 헌애자들에게 박티의 원리를 가르쳤다.
북부 순례 (브린다반 방문) : 그는 크리슈나의 어린 시절 성지인 브린다반을 방문하고, 그곳에 여섯 명의 핵심 제자들(여섯 고스와미)을 남겨 크리슈나 신앙의 신학적,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도록 했다.
4. 말년과 열반 (1515~1534)
순례 후 차이탄야는 푸리에서 남은 생을 보냈으며, 그의 영적 황홀경과 크리슈나에 대한 깊은 비라하, 즉 이별의 고통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1534년, 48세의 나이로 푸리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열반에 대해서는 자간나트 신상 속으로 합일되었다는 등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차이탄야 마하프라부의 사상은 지고의 인격신 크리슈나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하는 가우디야 비슈누파의 근간을 이룬다.
1. 박티(헌신)의 최상위성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지고의 목표가 해탈이나 합일이 아닌, 크리슈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며, 그 사랑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하리-나마 산키르탄, 즉 신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2.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
차이탄야가 제시한 비슈누파 베단타 철학의 결론은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차이와 비차이"라는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 원리이다.
크리슈나와 영혼(지바)의 관계:
비차이 : 모든 개별 영혼은 본질적으로 크리슈나와 질적으로 동일하다 (크리슈나의 에너지).
차이 : 그러나 영혼은 크리슈나와 양적으로 구별된다 (크리슈나는 전체, 영혼은 그의 미세한 부분).
아친티야 : 이 둘의 관계는 인간의 논리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닌다.
이 사상은 영혼이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되어 개별성을 잃는다는 마야바다 철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영원한 헌신적 관계(박티)의 가능성을 확립했다.
3. 식샤쉬타캄
차이탄야 마하프라부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문헌은 식샤쉬타캄이라는 여덟 구절의 찬가이다. 이는 그의 가르침을 함축하는 짧지만 심오한 기도문으로, 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산키르탄의 영적 효과, 겸손의 중요성, 그리고 크리슈나에 대한 순수한 헌신을 얻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식샤쉬타캄은 차이탄야 마하프라부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문헌으로, 그의 모든 가르침과 박티( 헌신적인 사랑) 철학의 정수를 여덟 구절의 찬가에 압축한 것이다. 이 구절들은 하리-나마 산키르탄(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합창)의 위력과,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헌애자의 마음가짐을 설명한다.
식샤쉬타캄: 여덟 구절의 가르침
식샤쉬타캄은 산스크리트어로 '여덟 가지 가르침(Śikṣā: 가르침, Aṣṭakam: 여덟 수)'이라는 뜻이다.
핵심 내용
1장 신의 이름 찬양의 영광
2장 신의 이름의 위력
3장 겸손의 원칙
4장 순수한 헌신의 갈망
5장 영원한 관계의 회복
6장 이별의 고통
7장 눈물과 황홀경
8장 조건 없는 헌애
4. 핵심 가르침의 의의
식샤쉬타캄은 가우디야 비슈누파의 종교적 실천(사다나)과 영적 목표(사디아)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1) 산키르탄의 중요성 (1장, 2장)
차이탄야 마하프라부는 하레 크리슈나 마하 만트라를 통한 합창과 춤(산키르탄)이 가장 쉽고 효과적인 영적 수행법임을 강조했다. 특히, 이 시대(칼리 유가)에는 복잡한 의례나 고행 대신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영적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2) 순수한 마음가짐 (3장)
가장 유명한 3장은 헌신적인 행위를 할 때 가져야 할 영적인 자격을 설명한다. 진정한 헌신은 외적인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극도의 겸손과 인내심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 경의를 표할 때만 순수한 마음으로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며, 이는 차이탄야의 사회 통합 사상과도 일치한다.
3) 목표의 설정: 프레마-박티 (4장, 8장)
다른 힌두교 전통이 물질적 복이나 해탈을 목표로 삼는 것과 달리, 식샤쉬타캄은 헌애자가 오직 크리슈나에 대한 순수한 사랑(Prema-bhakti) 그 자체만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신이 자신을 외면할지라도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8장의 선언은 지고의 사랑이 어떤 조건이나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식샤쉬타캄은 차이탄야 마하프라부의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는, 가우디야 비슈누파의 헌애자들이 매일 암송하는 가장 중요한 기도문이다.
5. 식샤쉬타캄 3장의 가르침
식샤쉬타캄 3장은 헌애자가 신의 이름을 부를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필수적인 태도를 명시한다.
"길거리의 마른풀보다 더 겸손하게, 나무보다 더 인내심 있게, 자신에게 돌아오는 존경심은 바라지 않고 다른 모든 이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끊임없이 하리(신)의 이름을 찬양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사회 개혁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1) 극도의 겸손 (풀보다 더 낮게)
사회적 영향: 카스트 제도의 무력화
2) 무한한 인내 (나무보다 더 인내심 있게)
사회적 영향: 비폭력과 포용
3) 모두에게 존경심 표하기 (자신은 바라지 않고, 남에게 존경심 표하기)
사회적 영향: 통합과 차별 철폐의 실천
그 결과로 차이탄야는 무슬림 배경의 하리다사 타쿠라와 같은 낮은 계층 인물을 핵심 전도자로 삼았다. 그가 모든 이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원칙을 실천함으로써, 카스트나 종교에 관계없이 신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원칙은 가우디야 비슈누파를 카스트 제도를 초월하는 포용적인 종교 공동체로 만들었다.
이 가르침 덕분에 가우디야 비슈누파는 빈민, 하층 카스트, 무슬림까지 포용하며 벵골과 오리사 지역의 대중적인 종교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차이탄야 마하프라부 자신이 방대한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 특히 브린다반의 여섯 명 고스와미에 의해 체계화되고 방대한 경전으로 집대성되었다.
1. 여섯 고스와미
이들은 차이탄야의 명령에 따라 브린다반으로 가서 가우디야 비슈누파의 신학적, 철학적 토대를 구축한 헌애자들이다.
루파 고스와미 : 박티라사암리타 신두, 우즈발라 닐라마니 등 박티의 미학(라사)에 대한 핵심 문헌 저술.
사나타나 고스와미 : 하리박티 빌라사 등 종교적 규범(사마사나)에 대한 문헌 저술.
지바 고스와미: 삿 산다르바 등 가우디야 철학의 베단타적 결론을 체계화한 가장 권위 있는 신학자.
라구마트 다사 고스와미, 라구마트 바타 고스와미, 고팔라 바타 고스와미
2. 차이탄야 생애사
차이탄야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한 주요 전기는 다음과 같다.
차이탄야 차리탐리타 : 크리슈나다사 카비라자 고스와미 저술. 차이탄야의 삶, 그의 철학, 그리고 푸리에서의 말년 황홀경을 가장 상세하고 권위 있게 다룬 문헌이다.
차이탄야 바가바타 : 브린다바나 다사 타쿠라 저술. 주로 차이탄야의 초기 생애에 초점을 맞춘다.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는 인도 철학의 주류인 베단타학파 내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갖는다.
1.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학파
사상 : 케왈라 아드바이타 (절대적 비이원론)
핵심 주장 : 궁극적인 진리는 오직 하나(브라흐만)이며, 개별 영혼은 환영(마야)에 의해 브라흐만과 분리된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완전히 동일하다.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와의 차이점 : '차이'를 부정하고 완전한 '비차이'만을 인정한다. 박티보다는 합일을 목표로 한다.
2. 마드바의 드바이타 학파
사상 : 드바이타 (절대적 이원론)
핵심 주장 : 신(비슈누)과 영혼(지바)은 영원히 구별되며 분리될 수 없다.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와의 차이점 : '비차이'를 부정하고 완전한 '차이'만을 인정한다.
3. 차이탄야의 가우디야 학파
사상 :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
핵심 주장 : 신과 영혼은 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양적으로는 영원히 다르다. 이 동시적인 상태는 이해할 수 없다.
아친티야 베다 아베다와의 차이점 : 합일과 분리를 모두 인정하고, 그것을 초월적 원리로 설명함으로써 두 이원론을 포괄한다.
차이탄야 마하프라부는 단순한 학자나 종교 지도자가 아닌, 신에 대한 지고의 사랑을 인류에게 분배하기 위해 강림했다고 여겨지는 성자이다. 그는 지적인 이해나 엄격한 의례 대신, 겸손한 마음과 신의 이름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행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영적인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의 유산은 사랑과 평등의 메시지를 담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영혼에게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크리슈나와 라다는 인간인가, 신인가?
크리슈나는 힌두교, 특히 비슈누파에서 가장 중요한 신 중 한 명이자, 많은 인도 사상 전통에서 지고의 인격신 또는 비슈누 신의 가장 완전한 화신(아바타라)으로 숭배된다. 그의 이름 '크리슈나'는 산스크리트어로 '검은', '어두운' 또는 '모든 것을 매료시키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크리슈나는 일반적으로 푸른색 또는 검은색 피부에 황금빛 도티를 입고, 공작 깃털로 장식된 관을 쓰고 플루트(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푸른색/검은색: 이 색깔은 하늘이나 바다처럼 무한함을 상징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고의 존재임을 나타낸다.
플루트: 그의 플루트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매료시키고, 모든 영혼(고피)을 영적인 유희(릴라)로 불러들이는 신성한 초월적 부름을 상징한다.
크리슈나 숭배는 인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며, 특히 벵골의 가우디야 비슈누파와 마하라슈트라의 비토바 숭배, 그리고 남인도의 여러 비슈누 사원에서 강세를 보인다.
20세기 후반,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에 의해 설립된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를 통해 크리슈나 숭배와 그의 가르침(특히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와 바가바드 기타)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크리슈나는 서구권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힌두교 신 중 한 명이 되었다.
크리슈나와 라다는 힌두교, 특히 비슈누파 신학에서 육신을 입은 지고의 신성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단순히 육체를 가진 인간이 아니며, 영원한 영적 형태를 세상에 현현(아바타라)시킨 것이다.
크리슈나는 모든 화신과 신들의 근원인 지고의 신 그 자체로 숭배된다. 그의 육신은 물질 세계의 육신과는 달리 영원하고, 지식으로 가득하며, 지복 본질을 가진 사트-칫-아난다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인간의 모습(목동)으로 나타나 사람들이 신에게 친밀하고 달콤한 사랑(마두리야 라사)을 바치는 방법을 가르치고, 스스로도 그 사랑을 즐기기 위해 강림했다.
라다는 크리슈나의 힘 중 즐거움을 주는 능력의 완전한 구현체이다. 즉, 그녀는 크리슈나의 내적 잠재력, 사랑의 본질이 여성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라다는 크리슈나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이다. 그녀가 없으면 크리슈나의 유희는 불완전하다. 비슈누파 신학에서는 라다를 통해 크리슈나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장 쉽게 신의 자비(크리파)를 얻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크리슈나와 라다는 육체를 가진 인간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육신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형태로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현한 지고의 신성 그 자체이다.
크리슈나는 야무나 강변의 목장 마을인 브린다반에서 양부모인 난다 마하라자와 야쇼다의 아들로 자랐다. 라다 역시 같은 마을의 목동 가문 출신이었다. 라다와 크리슈나는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짝이었으며, 그들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소몰이, 숲속 놀이, 숨바꼭질 등을 하며 순수하고 깊은 애정을 키웠다. 크리슈나의 플루트(피리) 소리는 라다를 포함한 모든 목동 소녀들(고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 소리를 들으면 고피들은 세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을 뒤로하고 밤중에 숲으로 달려와 크리슈나와 춤을 추었다.
라다는 이 모든 고피들 중에서 크리슈나에게 가장 소중하며, 그녀의 헌신은 마하바바, 즉 지고의 사랑 그 자체로 여겨진다. 크리슈나는 종종 라다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동하여 그녀의 헌신을 인정하고 찬양한다.
크리슈나와 라다의 관계에서 이별은 신성한 유희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크리슈나가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친부모가 갇혀있는 마투라로 돌아가 폭군 숙부 칸사를 처단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브린다반을 떠나야 했다.
이 이별은 라다와 고피들에게 극심한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 고통, 즉 비파람바는 단순한 인간적인 슬픔이 아니라, 신에 대한 영혼의 가장 강렬한 갈망을 상징한다.
가우디야 비슈누파에서 이별의 상태는 합일의 기쁨보다 더 영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된다. 이별은 헌애자가 신의 부재 속에서 끊임없이 신을 기억하고 봉사하며, 사랑의 감정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라다는 평생 동안 크리슈나를 그리워하며 그의 이름을 되뇌었고, 이는 최고의 헌신적 수행으로 간주된다.
크리슈나는 마투라와 드와르카에서 왕자이자 영웅으로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영원히 라다와 함께 브린다반에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사랑은 세속적인 관계가 아닌, 영원하고 순수한 영적 헌신의 모범이자 원형이다.
우디야 비슈누파의 신도 수는 공식 통계가 없으므로 추정치로만 파악할 수 있다.
핵심 지역에서의 영향력: 가우디야 비슈누파는 창시자인 차이탄야 마하프라부의 활동 무대였던 서벵골, 오리사, 그리고 성지인 브린다반과 마투라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상당한 수의 주민들이 가우디야 비슈누파의 종교적 관행(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합창 등)을 따르거나 영향을 받는다.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의 신자: 가우디야 비슈누파를 국제적으로 전파하는 주요 단체인 ISKCON(일명 '하레 크리슈나')의 공식 등록 신도는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에 달하지만, 이 중 인도 내 신도 수는 정확한 공인 통계는 없다.
힌두교 내 비슈누파의 비율: 힌두교 전체 인구(약 12억 명) 중 비슈누파를 따르는 사람들의 비율은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략 70% 내외로 추정된다. 가우디야 비슈누파는 이 광범위한 비슈누파의 한 분파에 속한다.
요약하자면, 인도 인구의 대다수가 힌두교이며, 힌두교인의 상당수가 비슈누를 숭배하지만, 그중에서 가우디야 비슈누파만을 따로 구분하여 몇 퍼센트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탄야 마하프라부의 유산은 인도 종교,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오늘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1. 박티 운동의 재조명과 대중화
그의 산키르탄 운동은 헌신적인 삶을 사원이나 성직자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거리와 가정에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민주적인 종교 생활로 만들었다. 신의 이름을 합창하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지고의 영적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힌두교 박티 전통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 사회 개혁과 통합
차이탄야는 당시 만연했던 카스트 제도의 장벽을 허무는 사회 개혁가였다. 그는 브라만이든 수드라든 상관없이 신에 대한 사랑이 있는 모든 이를 형제로 포용했다. 그의 가르침은 계급이나 종교의 차별 없이 모두가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외울 자격이 있음을 선언하며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 그는 특히 하층 계급이었던 하리다사 타쿠라를 핵심 전도자로 삼아 카스트 제도의 무의미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3. 문화 및 예술적 영향
차이탄야의 운동은 벵골과 오리사 지역의 문학, 음악, 무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황홀한 헌신을 묘사하는 무용과 헌애적인 시는 새로운 예술적 장르를 탄생시켰다.
4. 현대의 계승
20세기 중반, 차이탄야의 계승자인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를 설립하여 차이탄야의 가르침과 산키르탄 운동을 서구 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오늘날 이 단체는 차이탄야의 가우디야 비슈누파를 전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주요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ISKCON 브린다반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