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 박물관
인도의 성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에 이어, 이번 편 타고르 2는 그의 넓은 시야를 보여준 세계 여행과, 인도 독립운동의 두 거목인 마하트마 간디와의 복잡하면서도 깊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타고르는 단순히 인도의 시인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지성이었다. 그는 1912년부터 1934년까지 22년간 다섯 번의 대규모 세계 여행을 했으며, 30개 이상의 나라를 방문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문명을 연결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지적인 순례였다.
서구 문명과의 대화
노벨 문학상 수상(1913년) 이후, 서구 지식인들은 타고르를 '동양의 현자'로 열렬히 환영한다. 그는 아인슈타인, 앙드레 지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강연을 펼친다.
하지만 타고르는 서구 문명의 물질주의와 국수주의(민족주의의 배타적 형태)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서구의 과학적 진보는 인정하지만, 이윤 추구와 제국주의적 팽창에 가려진 서구의 정신적 빈곤함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강연집 《국가주의(Nationalism)》에서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인류를 전쟁과 파괴로 이끈다고 경고하며, 세계주의(Universalism)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시아와의 교류
타고르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꿈꾼다. 그는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을 방문하며 아시아 문명이 가진 공통의 정신적 유산을 강조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히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어,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시 〈동방의 등불〉을 헌정하며 한국의 독립을 염원한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비판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여행의 목적
그의 세계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산티니케탄에 세운 비슈바 바라티 대학교(세계 대학)의 재정을 확보하고 국제적인 인재를 초빙하는 일이었다. 그는 학교를 동서양의 지식이 만나는 진정한 지식의 허브로 만들기를 원했다.
타고르와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쌍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도의 미래와 독립의 방법에 대해서는 철학적 차이로 인해 평생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
타고르는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부른다.
간디는 타고르를 '구루데브(신성한 스승)'라고 부른다.
철학적 대립의 주요 쟁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시성) :
1. 세계주의, 2. 동서양 문명의 조화로운 만남, 3. 산업화와 농촌 개혁 병행
4. 간디의 비협력 운동이 지적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함, 물레 돌리기가 구원의 유일한 길은 아님을 지적한다.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
1. 스와라지 (자치 및 독립), 2.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철저한 거부, 3. 물레와 손으로 짠 옷 중심의
자급자족 강조, 4. 타고르의 산티니케탄이 너무 엘리트주의적이며, 서구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비판함.
대표적인 논쟁: 비협력 운동과 카디 논쟁
1921년, 간디가 영국 상품 보이콧과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법원, 의류를 불태우자고 했을 때, 타고르는 이에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타고르는 "파괴는 해방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외부 문명과의 창조적인 대화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행위는 인도를 고립시키고 정신적으로 가난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그는 물레 돌리기 운동이 인도인들의 자유로운 지적 활동과 예술적 창조를 억압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공통점과 화해
두 사람은 인도의 독립과 빈곤층에 대한 연민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공유했다.
타고르가 산티니케탄의 재정난으로 고통받을 때, 간디는 모금 활동을 조직해 거액을 기부하며 깊은 우정을 보여준다. 결국 이들의 관계는 철학적 대립을 통한 상호 성장의 모델이 된다. 간디는 행동을 통해, 타고르는 사상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준비시킨 두 위대한 영혼이었다.
타고르와 간디의 대화는 단순한 정치 논쟁을 넘어, 현대 사회가 물질주의와 국수주의 앞에서 어떻게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지키고 세계 시민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타고르는 시와 음악을 넘어 회화, 무용, 교육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예술 활동을 펼쳤다.
타고르 음악
타고르 음악, 즉 라빈드라 상기트는 벵골 음악의 한 장르로, 타고르가 직접 작곡하고 작사한 노래들을 통칭한다. 이는 인도 고전 음악(힌두스타니 라가)의 복잡한 구조와 서구 음악의 화성학적 영향을 결합한 독특한 형태를 띤다.
그의 노래들은 애국심, 사랑, 자연, 영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벵골 사람들의 일상과 정서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모두 타고르의 시로 만들어졌다.
타고르 회화
타고르는 6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시나 글에서 수정한 부분들을 추상적인 낙서 형태로 채우다가 회화로 발전했다.
그의 그림은 전통적인 인도 화풍과는 거리가 멀고,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띤다. 종종 인간의 고뇌, 어두운 내면, 기괴한 동물 형상 등을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선으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회화를 '본능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라 말하며, 문학이 다룰 수 없는 감정과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를 개척했다.
무용 및 드라마
타고르는 전통 무용과 노래, 연극을 결합한 무용 드라마(Dance Drama, Nritya Natika)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연 예술을 창시했다.
그는 자신의 학교인 샨티니케탄에서 인도 여러 지역과 해외의 무용 스타일(마니푸리, 카타칼리 등)을 융합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이는 현대 인도 무용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치트랑가다》 등이 있다.
타고르는 80세가 되던 해인 1941년 8월 7일, 그가 태어난 콜카타의 조라산코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애 말년에는 오랜 기간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했다. 시력 저하와 만성 질환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창작 활동을 계속하며 마지막 시와 산문을 남겼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는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사색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예술적 고향이자 영적 안식처였던 샨티니케탄이 아닌, 도시의 집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인도와 벵골 전역에 깊은 슬픔을 안겼으며,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타고르는 현대 인도와 벵골 문화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문화적 자부심의 상징: 영국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인도인들에게 아시아 최초 노벨상 수상자로서 민족적 자부심과 문화적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그가 설립한 실험학교 샨티니케탄(평화의 집)과 후에 대학으로 발전한 비슈와 바라티 대학교는 인본주의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교육을 실현한 곳이다. '세계가 하나의 보금자리(The world is one nest)'라는 모토 아래, 동양과 서양의 지혜를 통합하고 예술 교육을 강조했다. 이 대학은 현재까지도 인도의 대표적인 국립대학으로 남아 있다.
타고르는 좁은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범인도주의(Universal Humanism)를 역설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인도 지식인들에게 인도의 역할이 단순히 지역 국가가 아닌 세계 문명의 통합자임을 강조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벵골어를 단순한 일상 언어를 넘어선 최고 수준의 예술 언어로 격상시켰고, 벵골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타고르는 단순한 예술가를 넘어, 현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문화적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